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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Apr 19. 2022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2000)

- 외부는 언제나 계기가 될 뿐, 무언가의  근원은 항상 내부에 있다.

감독 : 벨라 타르

출연 : 라스 루돌프, 피터 피츠, 한나 쉬굴라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56위에 랭크된 헝가리의 벨라 타르 감독의 작품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를 보았다. 벨라 타르 감독은 지난번 <토리노의 말> 리뷰에도 언급했듯이 영화로 '철학'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토리노의 말>은 좋은 말을 쓸 게 별로 없었는데 이 영화는 <토리노의 말> 보다는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소설 <저항의 멜랑콜리>가 원작이라는데 좋은 원작이 있어서 그런 걸까? 이런 걸 보면 BBC 순위에 신뢰가 가기도. 

영화가 잘 이해가 안 될 때는 제목이 뜻하는 바를 살펴보면 도움이 될 때가 많다. 그래서 나도 '베크 마이스터'라는 사람이 실존인물인가 하고 검색을 했는데 '안드레아스 베르크마이스터'라는 풀네임의 실존 인물이었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오르간 연주자이면서 음악이론가였다고 하는데, 이 사람이 한 대단한 업적이 뭔가 하니 '평균율'을 처음으로 이론화했다는 것이다. 음악을 좋아하긴 하지만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평균율, 순정률에 대한 여러 가지 포스팅을 찾아보고 사전도 뒤져봤으나 솔직히 명쾌하게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냥 간단히 설명해보면 평균율 이전에는 순정률이라는 음조(음계)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정수비로 조율된 음조를 말하는 것이다. 순정률로 조율된 음계로 연주하면 완전한 화음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순정률은 '현악기'에서만 (그것도 아주 숙련된 연주자만) 가능하고 건반악기에서 사용할 수가 없고, 조옮김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안드레아스 베르크마이스터'라는 사람이 '실용성'을 위해 근사치의 음정을 12개의 음계로 균등하게 나눈 것인데 이것이 바로 평균율이다. 

영화에서 정확히 어떤 종류의 예술을 하는지는 (피아노 연주자인지 작곡가인지는) 나오지 않지만 음악가로 유명한 '에스터'가 이 베르크마이스터의 '평균율'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길게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의 긴 대사를 옮겨본다.



나는 이것을 확실히 해둬야겠다. 이것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인 문제일 것이라는 의심은 단 한순간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음조 시스템을 연구함에 있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믿음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질문해보자.

우리의 다음과 같은 믿음은 어떤 근거를 지니고 있는가? 모든 하모니와 걸작들의 핵심은 그 불가역성에 비춰봤을 때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믿음. 여기서부터 우리는 음악에 대한 연구에 대해서가 아니라 비음악에 대한 유일한 재현에 대해 논해야 한다. 비록 이것이 수세기에 걸쳐 다뤄졌고 그에 따른 따분한 뒷얘기를 우리가 다시 언급해야 하더라도 말이다. 

결론은, 수세기에 걸쳐 인정받은 걸작들의 음정들은 전부 틀렸다는 부끄러운 현실이다. 이것은 음악과 그 하모니의 공명, 그리고 그 최고의 매혹은 완전히 잘못된 기초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우리는 명백한 기만에 대해 논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덜 확신하고 다소 절제하고 타협의 목소리를 낼지언정, 하지만 어떤 종류의 타협이 가능할까?

대부분의 경우에 순수한 음조가 단순한 환상일 뿐이고 진실로 순수한 음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제 우리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보다 운 좋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피타고라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시절. 오로지 순수하게 조율된 악기들이 몇몇 음조에서만 연주되었고 그것에 우리의 조상들이 만족해했던 시절 말이다. 그들은 천상의 하모니가 신의 유산이라는 믿음에 의심을 품지 않았기에 그럴 수 있었다. 훗날, 이 모든 것은 충분하지 않았고 통제 안 되는 오만함은 신의 하모니 전부를 소유하기를 원했다. 이것은 고유한 방식으로 실천되었고 기술자들은 해결책을 내놓아야만 했다. 그들은 프라에토리우스, 살리나스, 그리고 안드레아스 베크마이스터였다. 그가 어려움을 해결한 방식은 신의 하모니 옥타브를 즉 12개의 반조를 12개의 동일한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었다. 두 개의 반음 중에서 그는 하나를 위조했다. 10개의 검은 건반 대신에 5개가 사용되었고 그 위치는 고정되었다. 

이제 악기 조율, 즉 소위 불변조절 방식에 따른 악기 조율 방식의 개발과 그 슬픈 역사를 되돌리자. 그리고 자연 조율 악기를 되살리자. 조심스럽게 우리는 베크마이스터의 실수를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는 이 7 음계를 고수하되 옥타브 방식이 아니라 7개의 서로 다른 독립적인 음질에 따라야 한다. 

사이좋게 하늘에 떠 있는 북두칠성 7개 별처럼 이것을 인지한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자연 조율 역시 그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약간 우려스러운 한계인데 분명히 특정 고등 기호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에스터는 베크마이스터가 실용성을 이유로 음조를 위반하고, 가상의 음조를 만들고, 반음을 5개로 줄여 위치를 고정시켜버린 행위를 되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 조율도 한계가 있으나 천상의 하모니는 오직 신의 유산이라고 믿으며 소박한 음조에 만족했던 시절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에스터 외에 주요 등장인물로 '야노스'라는 청년이 나오는데 이 청년은 '예술적 감수성'이 아주 풍부하고 선량한 사람이다. 그래서 혼자 사는 에스터를 돌봐주며 그가 자신의 일 즉 '예술'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관찰하는 사람이고, 마을 사람들이 뭔가를 부탁하고 싶을 때 야노스를 찾는다. 그가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를 깔보고 이용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 마을 사람들은 그런대로 별 탈 없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서커스단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고래(박제) 그리고 프린스가 공연을 위해 찾아온다. 그들이 정말 그런 일을 벌인 것인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등장을 '나쁜 일이 일어날 징조'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을 선동한다, 벌써 어떤 상점의 유리창을 깨트렸다. 강도들 때문에 밤에는 더 이상 다닐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런 말 끝에는 '~더라.'가 붙는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은 얘기인 것이고 실제 그런 일을 그들이 벌인 것인지 목격한 사람은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에 에스터의 전부인인 튄데가 나타나 야노스와 에스터의 삶을 뒤집는다. 튄데는 자신이 에스터가 예술에 몰두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물러났다며 이제는 그가 희생해야 할 차례라고 말한다. 마을의 질서를 회복하고 깨끗하게 하기 위해 어떤 운동을 시작할 것인데 그 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에스터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늘 밤 당장 집으로 되돌아가 그와 저녁을 같이 먹을 것이며, 자신의 결심을 증명하기 위해 짐가방을 싸들고 왔으니 야노스더러 그 가방을 들고 가 보여주며 자신의 말을 에스터에게 전하라는 것이다. 에스터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야노스는 튄데를 설득하지만 소용이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그녀의 짐가방을 들고 에스테에게 가 그녀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그를 설득한다. 에스터는 너무 화가 나지만 튄데가 돌아오는 것보다는 마을 운동의 지도자직을 맡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그녀가 적어준 리스트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집 밖을 나선다. 그러다가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나눈 대화는 이렇다.


사람들 : 뭔가 조치가 있어야 해요. 전력 공급을 믿을 수가 없어요. 학교와 마을회관도 문을 닫았어요. 석탄 공급이 부족해서 가정 난방 문제가 이미 심각한 수준이에요. 의약품도 없고 버스나 자동차 운행도 끝났어요. 전화도 끊겼고요. 거리에 불도 안 켜져 있잖아요. 무엇보다도 지금 끔찍한 고래와 프린스를 데리고 서커스가 왔잖아요. 불경스러운 말로써 사람들을 폭동으로 선동할 거예요.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둥 말이죠. 그리고 저 냄새나는 괴물 때문에 혼란스러운 악몽을 불러올 것이고. 

마을이 언제쯤 위협당할까요? 이런 혼란 속에서 누가 즐거울 수 있겠어요. 좀 주목합시다. 단결해야 하지 않겠어요? 상식적으로 해결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재앙이 우리를 덮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요. 

에스터 : 여러분의 절망적인 말들이 상황을 오히려 더 심각하게 합니다. 질서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우리 함께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야노스 : 저는 잠시만 점심 가지러 갈게요. 식당 문이 닫히기 전에요.

에스터 : 우리 모두 이성을 잃기 전에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을 물리치고 함께 일어섭시다.


마을의 문제는 고래와 프린스, 서커스단이 아니다. 마을은 이미 전력 공급에 차질이 생겨 학교, 마을회관, 가정 난방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고 필수 의약품도 없고 사람들이 평범한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거의 모든 조건들이 차단된 상태다. 그런데 외부에서 갑작스레 등장한 고래와 프린스와 서커스단이 이 마을 사람들을 더 불안하게 하고 그들의 감정을 격동시킨다. 사람들이 온갖 절망적인 말로 호들갑을 떨지만 정작 에스터는 이 사람들이 말한 것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 사실 에스터는 마을의 유명인사로 좋은 집에서 편히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사람들이 고래니, 프린스니 난리를 치며 그것들이 무슨 큰 재앙이라도 불러들일 것처럼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내가 왜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이런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하나 싶을 것이다. 야노스는 착하긴 하지만, 관찰자이긴 하지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보긴 하지만) 굉장히 나이브한 구석이 있다. 사람들의 불안과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저렇게 대단한 생명체를 신이 만들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아요?'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꼭 '고래'를 봐야 한다고 얘기한다. 또  '안 좋은 일, 큰일이 일어날 거야.' 라며 불안해 떠는 사람들의 말을 흘려들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이 상황에서 서커스단의 감독과 프린스 사이가 틀어진다. 프린스는 눈이 세 개 달린 괴물로 묘사되는데, 그의 그림자와 목소리만 나올 뿐 실제로 그가 눈이 세 개 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감독은 프린스가 사람들을 선동한다면서 너를 더 이상 내보일 수가 없다, 그 '프린스'라는 이름도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내가 만들어 준 이름일 뿐 아니냐며 화를 내는데, 프린스는 차분하게 이렇게 답한다.


프린스 : 감독은 어떤 규칙도 정할 수 없다. 감독은 돈을 챙겨라, 프린스는 추종자들을 얻겠다. 논쟁거리가 전혀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프린스한테만 있다. 그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완전히 무너졌다. 그들이 만든 것과 앞으로 만들 것, 그들이 하는 일과 앞으로 할 일, 모두 다 착각이고 거짓말이다. 모든 게 절반만 완성되어 있다. 다 무너져야 모두가 완전해진다. 그들의 생각도 우습기 짝이 없다.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각한다. 하지만 두려워하는 이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감독은 이해를 못 한다. 추종자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프린스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종자들은 모든 걸 무너뜨릴 것이다.



그저 단순한 구경거리인 줄만 알았던 고래와 프린스와 서커스단은 그들이 실제로 선동을 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마을 주민들을 동요시키고, 추종자를 양산시켜 결국 폭동을 야기한다. 그런데 이들이 뒤집어엎는 곳은 아픈 사람들이 있는 병원이다. 힘이 없는 사람들, 어떤 위협도 되지 않는 사람들을 때리고 해친다. 뼈만 앙상히 남은 노인의 나신을 목도하고 나서야 폭도들은 폭동을 멈추고 흩어진다. 

이 일들을 모두 목격한 야노스는 '프린스'가 한 말과 똑같은 말이 쓰여있는 책을 읽는다. (소리 내어), 폭동이 지나간 마을은 폐허가 되었고, 사람들이 '그럴 거야'라고 했던 것처럼 군대가 들어와 점령했고, 군간부는 에스터의 전부인 튄데의 말에 귀 기울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야노스가 발견한 것은 그의 안위를 걱정해주던 라요스 아저씨의 시체다. 남편이 죽은 줄 모르고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걱정을 늘어놓는 하러 부인에게 야노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괴로움을 감당 못해 초점 없는 눈으로 무작정 달리는 야노스의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 한 대가 돌며 경찰서장이 술 취한 채 남발했던 '발포해!'라는 말을 실행한다. 

야노스는 환자복을 입고 병원 침대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고, 이제는 에스터가 그를 돌보기 위해 그의 옆에 앉아 있다.



에스터 : 네가 머물 곳은 마련해뒀다. 퇴원하면 같이 가보자. 나는 별채에서 살고 있다. 왜냐하면 그 여편네랑 경찰서장이 집을 차지해버리고 들어오는 바람에. 집 전체를 차지했지. 하지만 우리 둘이 지내기엔 별채도 나쁘지 않을 거다. 초록색 이불이 덮인 소파는 네가 쓰렴. 찬장 맨 윗 칸에 네 자리도 마련해 놓으마. 너 있을 공간은 내가 준비할게. 창문은 아직 손을 좀 봐야 해. 웃풍이 있어서 좀 춥거든. 거기에서 지낸 지 오늘로 이틀째다. 그리고 다행인 건 밖이 참 조용하다. 완전히 고요하지. 피아노도 새로 조율했다. 다시 보통 피아노가 되었지. 너도 마음껏 연주해도 된다. 돈도 넉넉지 않은데 이렇게 지내는 게 낫지 않겠니. 내 회색 코트를 아기에란에게 가져다줬다. 그가 널 위해 수선해줄 거야. 언제든 퇴원하기만 하면 다 준비될 거다. 걱정할 것 없다. 전혀 걱정할 것 없어. 몸조심해라. 내일도 이 시간에 또 오마. 


야노스를 병원에 두고 나온 에스터는 광장에 버려져 있는 고래를 그제야 본다. 관람료를 지불해야만 볼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던 거대 고래는 아무도 없는 횡뎅그레한 광장 한가운데에 비참한 모습으로 버려져있다. 야노스의 권유에도 나중에 보겠다고 미뤘던 에스터는 이제 아무런 가치도 없어진 고래. 버려진 고래를 보게 된다. 




사람들이 두꺼운 외투를 입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지금 이 마을은 난방이 반드시 필요한 추운 계절이다. 그런데 전기는 끊겼고, 가정 난방의 문제도 심각하고, 어둔 밤을 밝힐 가로등도 꺼져있고,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이동수단도 다 멈춰버린 상태다. 당장 필요한 의약품을 구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이 사람들은 생업의 현장에서 자신의 일을 한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예술을 논하고 누린다. 

그러던 어느 날 그저 '서커스단'이 마을에 온 것뿐인데 그들의 등장이 이들에게 굉장한 위협으로 다가온다. 실제 이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했다는 것이 증명된 바 없으나 사람들은 지레짐작하고, 두려워하고 날이 곤두선다. 그리고 주문을 외듯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날 거야'라고 말하는데 사실 그 나쁜 일은 바로 그들 자신이 일으키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에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재앙이 닥치기 전에 자신들이 선수 쳐 재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들의 폭동에는 어떤 목적도 없다. 무언가를 취하겠다는 목표도 없다. 그저 가장 약한 사람들이 있는 병원을 습격하고 그들을 해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선량한 사람들을 때리고 죽인다. 남의 집을 빼앗고, 멀쩡하게 잘 살고 있던 사람을 망가뜨린다. 실체가 없는 공포의 대상을 피하기 위해 그들 자신이 폭군이 되어 버린다. 

프린스는 사람들의 심리를 잘 알고 이용한다.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두려움은 모든 진실을 가려버린다는 것도. 그래서 누군가 추종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조롱하면서도 이용한다. 에스터는 베크 마이스터에서 돌이켜 자연 조율의 음조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결국 피아노를 새로 조율해 보통의 피아노를 만들어 버린다. 예술가가 아닌 야노스도 연주할 수 있는 평범한 피아노, 베크 마이스터의 평균율에 따른 피아노 말이다. 또 튄데를 거부하기 위해 마을 운동의 지도자를 맡기로 했으나 폭동 이후 튄데와 경찰서장(둘은 내연관계다)은 그냥 에스터의 집 전체를 차지해버린다. 야노스의 보살핌을 받던 에스터는 이제 반대로 미쳐버린 야노스를 돌보아야 한다. 



삶에는 필연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나 자신의 결점으로 야기되기도 하지만 이 마을의 문제처럼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반드시 필요한 어떤 것이 한 집단에게 결핍될 때 아직 밖으로 표출하고 있지는 않으나 생존에 대한 근원적은 불안과 공포가 생기게 되고, 이런 상황을 만든 외부 상황에 대한 분노가 쌓이게 된다. 그때 하나의 계기가 생기면 그 공포와 분노가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이 영화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가 그런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쌓였던 불안과 공포가 폭력적으로 표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참혹하다. 

튄데는 말한다. 마을의 질서를 바로잡고 깨끗하게 바꿔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나 그녀가 정말 원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은 남편 에스터에 대한 복수다. 그가 누리는 것을 빼앗는 것이다. 또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 마을에 이런 이런 문제들이 있다고. 그런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서커스단의 등장이라고. 그러나 그들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들이 선동할 것이라면서 이대로 당할 수 없다고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선동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의 문제는 마을에 전력 공급이 끊기고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들이 막힌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전기가 다시 들어올지, 의약품을 구할 수 있는지는 얘기하지 않는다. 아무 힘도 없는 박제된 고래와 그저 눈이 세 개 있을 뿐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은 가명의 '프린스'라는 인간이 자신들을 해칠 것이라고 믿으며 그 문제를 해결하자고 한다. 일어난 문제에는 눈 감고 일어나지 않은 문제에 발 벗고 나선다.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라 믿고 만들어낸 해결책은 자신들보다 더 힘이 없고 약한 사람을 짓밟으며 얻는 쾌감이다. 추위에 떨면서 어두컴컴한 밤에 강도가 두려워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며 저절로 무기력해져 버린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아무 힘도 없는 사람 위에 군림하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이다. 


환자들은 수치를 당하며 폭력 속에 방치되었고, 진정한 예술의 길을 모색하며 자신의 길을 올곧이 걷던 예술가는 현실과 타협해야 했으며 자신의 것을 불합리하게 빼앗겼다. 착하디 착한 야노스의 안위를 걱정하던 또 다른 착한 아저씨 라요스는 폭동에 휩쓸려 하룻밤 새 죽어버렸고, 선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돌보던 젊은이는 정신착란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스스로 공포의 대상이자, 더 큰 재앙을 몰고 올 것이라고 여겨지던 박제된 거대 고래는 쓰레기처럼 광장 한가운데 버려졌다. 




문제의 근원은 언제나 내부에 있다. 개인을 논하지 않더라도, 이 마을의 문제는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들을 직시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그것에 있었던 것이다.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사람들을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언제든 표출되기만을 기다리던 분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고래 한 마리에 의해 폭발하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폐허로 만들어 버린다. 

무언가를 밖으로 드러내고 싶으나 그럴 용기가 없을 때 사실 우리는 트리거가 될 만한 것을 어쩌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마을 사람들이 고래와 프린스와 서커스단의 등장을 두려워하며 싫어하기만 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를 건드려줄 무언가를 어쩌면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식으로 표출된 불안과 분노가 가져오는 결과가 참혹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해야만 한다. 힘들고 지쳤고 무서우면서 말하지 않고 서로 논의하지 않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늦은 밤 모여 술을 마시고 야노스를 부추겨 예술놀이를 한들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은 없다.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문제가 되고, 다른 문제를 일으키게 될지도 모른다. 



외부는 언제나 계기가 될 뿐, 무언가의 근원은 항상 내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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