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르슬라 Apr 21. 2022

이다 (2013)

- 이름이 제목이 되는 하나의 이유

감독 : 파벨 포리코브스키

출연 : 아가타 트르제부초우스카, 아가타 쿠레샤, 데이비드 가드너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55위에 랭크된 폴란드의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의 작품 <이다>를 보았다.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의 영화는 이 영화로 처음 보는 것이다. 벨라 타르의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를 보고 연속으로 흑백 영화를 본 것인데 같은 흑백이어도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이 영화 <이다>는 흑백 화면인데도 '순결함'이 느껴질 정도로 정갈해서 한 컷 한 컷이 흑백사진처럼 아름다웠다. 상황도 지지부진하게 설명하지 않고 껑충껑충 건너뛰는데 그렇다고 이해를 해칠 정도는 아니고 부드럽게 흘러간다. 흑백임에도 정교하게 만든 정갈함과 함께 속도감이 있어 보는 맛이 있다. 


웬만하면 양질의 영화를 보고 싶어서 이 BBC리스트 외의 다른 리스트나 영화제 수상작들, 또 고평점 작품들 위주로 보다 보니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소위 '작품성' 있는 영화를 하나쯤 만들어 이름을 알리고 싶거나 '의식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을 때 이런 소재를 다루면 비교적 자신이 원하는 바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인류 전체의 역사를 놓고 보았을 때도 가장 끔찍한 사건. 이 얘기를 꺼냈을 때 '이제 그만 좀 우려먹어'라는 말이 암묵적으로 '금기'가 된 사건. 이런 사건을 소재로 작품을 만든다면 (영화든 소설이든 시든) 어쨌든 가볍다는 말을 듣지는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고 지극히 '상업적'인 이유로 이 '홀로코스트'를 쉽게 가져다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을 다룰 때, 훨씬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시그니처를 살려 잘 만들어내겠다는 굳은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홀로코스트'를 다뤘으니까 천편일률적으로 '잊지 말아야 할 역사'라는 식의 호평을 주고 싶지는 않다. 이 소재를 다룬 의도를 더 집요하게 파고들고 싶고, 까다로운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영화 <이다>도 '유태인 학살'을 다룬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소재로 삼아도 캐릭터를 다양화해서 접근하는 것이 이런 류의 영화가 비교적 많이 선택하는 길이다. 출발이 달라도 결말에는 결국 똑같은 감상을 적게 만드는 영화도 사실 많다. 영화가 2/3 정도 진행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 영화도 그 길을 가는구나 했다. 그리고 왜 영화의 제목을 '이다'라고 했을까? 잘못 지은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면 왜 '이다'인지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 위에 날카롭게 서 있는 개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 <이다>를 '홀로코스트'를 다뤘음에도 단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시그니처를 완연하게 드러내는 좋은 영화라고 평하고 싶다. 



가족이 없어 수녀원에서 자란 안나(아가타 트르제부초우스카)는 수녀로서의 서원식을 앞두고 자신에게 혈육이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이모 안나 그루즈(아가타 쿠레샤)가 바로 그인데, 수녀원에서는 그녀에게 여러 번 편지를 보내 안나를 데려가라고 했지만 '데려가지 않겠다'는 답을 받았음에도 원장 수녀는 하나뿐인 혈육이니 서원식 전에 찾아가서 만나라고 안나에게 명령한다. 자신을 찾아오지도 않고 데려가지도 않은 이모이지만 안나가 찾아가니 박대하지는 않는다. 좀 차가워 보여도 안나를 자신의 혈육으로 인정하고 집으로 들인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차차 알아가는 식의 대화가 아니라 처음부터 돌직구를 날려버리는데 그것은 안나의 본명이 '이다'라는 것과 자신들이 '유태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시대적 배경이 정확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이다가 태어났을 때 '홀로코스트'가 한창일 때였고, 이다가 성인이 되어 서원식을 치를 때가 된 것이니 그로부터 20여 년쯤 지난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 폴란드가 공산정권인 시절, 이모 완다는 '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이다는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 묻고 이모는 숨기는 것 없이 말해준다. 부모님의 묘지라도 찾아보겠다는 이다의 말에 완다는 선뜻 동행하겠다고 나서고 따라나설 뿐 아니라 이다를 당황시킬 만큼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완다와 이다의 부모가 살던 집에 찾아가 그들을 어디에 묻었느냐고 묻는 두 사람. 지금 살고 있는 그 사람들은 뭔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완다는 대형 공판을 주로 맡았던 주 법원 판사의 경력을 갖고 있었다. 사형도 제법 내렸던, '피의 완다'로 불렸던 이력이 있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명의를 확실하게 거주자에게 이전해주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거주자의 아버지를 다시 찾아가지 않는 조건으로 이다의 부모가 묻힌 곳을 알려주겠다는 답을 듣는다. 

이다의 부모가 살아있을 당시 찍었던 사진 속에는 남자아이가 한 명 있었다. 이다는 자신의 오빠냐고 이모에게 묻지만 완다는 '아니야'라고만 대답했었는데, 완다는 감정을 억누르는듯한 모습을 보이며 누워있는 노인(현 거주자의 아버지)에게 묻는다.


"많이 무서워했나요?"

"누구?"

".. 남자아이요."


숲 속 어느 지점에 이르러 땅을 깊게 파자 유골이 나온다. 그리고 두상이 작은 해골이 하나 같이 나오는데 완다는 그 해골을 품에 안고 서럽게 운다. 그 남자아이는 완다가 낳은 아이였던 것이다. 유태인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완다는 아이를 동생에게 맡기고 전쟁터로 나갔던 것이고, 그 사이 지금의 거주자들은 이다의 부모와 완다의 아이를 숲에 숨겨준다고 속이고 죽였던 것이다. 



부모님의 유골을 찾아 가족이 묻혀 있는 곳에 안장하고, 이다(안나)는 다시 자신이 살던,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수녀원으로 돌아간다. 젊고 아름다운 이다가 삶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수녀로 사는 것을 완다는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그녀의 선택이기에 존중할 수밖에 없다. 이모와의 여행길에 (부모님의 시신을 찾는 여정) 우연히 만난 젊은 재즈 연주자가 그녀에게 호감을 표현하지만 이다는 신께 자신의 삶을 서원했던 것을 돌이킬 생각이 없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이다는 이제야 만난, 세상에 남은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이모 완다를 잃게 된다. 완다는 자신의 아이를 지키지 못했던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눈으로 아이의 유골을 보게 되자 삶의 의욕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다.



완다가 자살하기 전까지는 이다보다 완다가 훨씬 주동적인 인물로 나오고, 감정도 선명하게 내보이기 때문에(그녀가 가진 아픔도 분명하고)이다보다는 완다가 더 주인공 같은데 왜 제목을 '이다'라고 지었을까? 의아했다. 그런데 완다가 세상을 떠나고 이 넓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 '이다'를 보고 있자니 아, 이 영화는 '이다'일 수밖에 없구나 싶은 것이다. 


존재를 몰랐던 가족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를 만나서 시간을 함께 보내고 둘만이 공유하는 아픔과 슬픔도 깊이 나누었는데 그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이모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가족으로서 그녀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이다는 그녀를 보러 온 리사(재즈 연주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모가 입어보라고 했던 드레스를 입고 리사가 연주하는 공연을 보러 가고, 그와 함께 춤을 추고 사랑을 나눈다. 리사는 이다와 함께하는 삶을 그리지만 그리고 이다 역시 이모를 잃은 아픔 때문에 신을 향한 믿음을 잃고 이모가 말했던 평범한 삶을 살려고 하는 게 아닌가 했지만, 아직 자고 있는 리사를 두고 이다는 다시 수녀복을 입고 수녀원으로 향한다.



혼자 남겨진 그녀(이다)의 삶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마음을 저절로 헤아려보게 된다. 가족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러나 그 가족이 자신을 거부했다는 것을 알고도 만나러 가야 했을 그 마음이 어땠을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알게 된 출생의 비밀, 유일한 혈육이자 같은 아픔을 공유한 이모 완다와의 우정. 수녀원을 벗어나 처음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서 만나게 되는 신비들, 자신을 여자로 봐주는 멋진 남자에게서 느끼는 설렘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께 삶을 드리겠다고 서원한 자신 사이에서의 갈등, 부모의 시신을 찾아 안장하고 돌아간 수녀원에서 다시 듣게 된 이모의 죽음. 그 모든 상황에서 이다가 느꼈을 감정과 그녀의 머릿속 생각들을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수녀원 안에서 수녀들과 우정을 나누며 자신의 사랑은 신께 바치기로 결심한 한 젊은 여인이 '서원식'을 계기로 세상으로 나아가 처음으로 가족을 만났다. 폐쇄적이기만 했던 그녀의 삶이 한순간에 개방된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열린 세상은 자신이 유태인임을, 자신의 부모가 비참하게 죽임 당했음을 가장 먼저 말한다. 자신의 가족이 겪었던 슬픈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뿐 이다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부모님의 뼛조각을 모아다가 가족이 묻힌 곳에 안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겪을 때 정말 피를 나눈 유일한 혈육인 이모가 곁에 있었다. 그녀를 위로할 뿐 아니라, 더 큰 아픔을 공유하며 함께 울고 슬퍼했다. 그러나 잠깐 만난 이모의 마음이 얼마나 병들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있었던 곳,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간 것뿐인데 다시 홀로 남은 이모는 그 역시 유일한 혈육으로 남아 있는 조카 이다를 두고 세상을 등진다. 이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이다가 느꼈을 따뜻함과 위로는 완다의 자살로 한 순간에 박살 난다. 그녀를 알지 못했다면 이런 따뜻함과 위로도 알지 못했을 텐데. 얻었다가 잃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우리라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다 역시 완다가 살아있을 때 그녀가 해주길 원했던 것을 완다를 잃은 후에야 해보게 된다. 드레스를 입어보라고 했을 때 입어볼 걸, 평범한 청춘이 누리는 즐거움을 그녀 곁에서 누려볼 걸. 이모가 없는 이모의 집에서 그녀의 흔적을 느끼며 이다는 그녀만의 애도식을 치른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어디까지나 이모의 죽음을 애도하고, 다시 홀로 남은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는 세리머니일 뿐이다. 그녀는 오래전 결심했던 것, 평생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신과 자신에게 약속했던 것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조용하지만 묵직한 그녀의 이런 결단이 성스럽게 느껴지면서도 영화를 보는 한 사람의 관객인 나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어린 여인 한 명의 인생에 애처로움을 느끼게 된다. 뚜벅뚜벅 눈길을 밟고 걸어가는 그 발걸음에 실린 그녀의 삶의 무게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지금은 그렇게 그 길만을 바라보며 걸어가지만, 앞으로의 그녀의 삶을 어떨까? 하고 상상하게 된다. 




갑자기 열려버린 세상은 그녀에게 상흔만을 남긴 듯 보인다. 영화가 이다의 마음 깊은 곳까지 말해주진 않지만 폭풍처럼 펼쳐진 그녀의 삶의 역사 한가운데서 그 폭풍에 휩쓸리지 않고 변함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려는 그 모습이 그 어떤 대장부보다 강인하게 느껴져 마음에 남는다. 신을 선택해 신만을 사랑하겠다고 약속한 그녀에게 신도 더 큰 사랑으로 그녀를 안아주기를 바라게 된다. 


세상 한가운데에 홀로 서서 단독자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이름은 제목이 되기에 충분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200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