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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나톨리아 (2011)

- 이중 잣대는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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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누리 빌게 제일란

출연 : 무함멧 우즈너, 일마즈 에르도간, 타네르 비르셀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54위에 랭크된 터키의 누리 빌게 제일란 감독의 작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나톨리아>를 보았다. 제목을 보았을 때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류의 누아르나 서부극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장르는 '범죄'이지만 범인의 범죄 장면은 단 한 컷도 나오지 않고, 오히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경찰들, 검사, 의사(부검)들의 초라한 내면을 드러내면서 '죄인'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무게감 있는 영화였다. 이 리스트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기 전에는 내가 그래도 이름값 좀 하는 감독들을 어지간히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했었는데(쥐구멍 어딨어요?) 세상에 좋은 영화가 참 많고, 이런 훌륭한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감독들(아티스트들)이 정말 많구나, 싶다. 세상은 넓고 보아야 할 좋은 작품들은 참 많고, 인정받아 마땅한 훌륭한 아티스트들도 참 많다.

누리 빌게 제일란 감독은 공대 졸업했다가 적성에 안 맞아서 사진작가 생활도 몇 년 하고, 후에 영화 전공해서 데뷔한 케이스인데 사진작가 경력이 있어서 그런가. 카메라를 고정해 놓고 원거리에서 인물, 인물이 타고 있는 자동차의 움직임을 담는 식의 컷이 많았는데 나는 그런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영화가 이틀간의 이야기를 담았고 이틀이래 봤자, 늦은 밤- 다음 날 오후니까 만 하루 정도의 시간도 채 되지 않은 것인데 그래서 2시간 반짜리의 영화 중 절반 이상이 '밤' 시간을 담고 있어 어두컴컴한데 그 씬들에서 조명을 참 예쁘게 썼다고 느껴졌다. 영화를 보면서 '조명'에 대해서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영화는 그랬다. 그리고 참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 작품 '윈터 슬립'도 다운로드하여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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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지만, 한참이 지나기까지 이게 지금 어떤 사건인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 용의자를 데리고 사건 현장을 가는 것 같은데, 그는 자백을 했으면서도 그곳에 도달해서는 '잘 모르겠다', '여기가 아닌 것 같다' 이런 식의 말로 경찰서장의 뚜껑이 열리게 만든다. 이런 일이 영화 한 시간 분량에서 3-4번 반복된다. 그런데 이동하는 사이사이, 차 안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 멈춰 선 사건 현장에서 둘이, 또는 셋이 모여 나누는 사건과 관계없는 이야기들이 영화의 중요한 대사가 되고, 앞으로 밝혀질 일들에 대한 복선이 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소시민적이다. 특별한 직업적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도 없고, 범인이라고 자백한 이 사람이 정말 범인인가? 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도 없다. 즉 진실에 대한 관심이 없다. 남을 깎아내리면서 자신을 비호하고,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남에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뒷좌석 가운데에 용의자가 앉아 있고 양 옆에 의사와 경찰이 있다. 그리고 경찰서장이 조수석에 있고, 운전하는 사람도 경찰이다. 이들을 태운 차는 사건 현장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사체를 묻은 곳을 찾기 위해 늦은 밤에 이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동 중에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라는 게 '요거트'에 관한 것이다. 어떤 요거트가 더 맛있는가, 각 요거트의 특성은 어떠한가를 놓고 한참을 갑론을박한다. 다음 장소에서는 '검사의 전립선'이 화젯거리가 된다. 화장실을 얼마나 자주 가느냐로 신나게 떠든다.

인부들을 데리고 용의자가 특정한 장소에 가 땅을 파는 경찰들 뒤로 의사와 검사가 대화를 한다. 이 지역을 잘 알고 있는 군인 장교도 동행했는데 배가 고픈 검사는 장교가 건네는 비스킷을 맛있게 먹으면서 이야기를 꺼낸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적이고 매력 넘치는 어떤 여인의 죽음에 대해서. 사인을 알 수 없고,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면서 그 죽음이 너무 신비하다고 남 얘기하듯 말한다.

한참을 다녀도 시체를 묻은 장소를 찾지 못한 그들은 가까운 마을 이장댁에 신세를 지기로 한다. 그 집에서 대접하는 음식들을 맛있게 먹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스몰토크를 하는데 그들 가운데 살인자도, 그와 함께 있었던 그의 동생도 있다. 날씨 탓에 갑자기 전기가 나가 집주인은 막내딸을 불러 등을 켜라고 말한다. 한동안 어둠 속에 있던 그들은 막내딸의 등장과 함께 어둠에서 벗어나는데 그녀의 미모가 너무 눈부셔서 다들 넋을 잃는다. 잠시 나와 바람을 쐬던 의사는 좀 전에 검사에게 들었던 여인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이 세상에 설명되지 않는 죽음. 그냥 갑자기 죽어버리는 신비한 죽음은 없다고. 이유가 있을 것이고, 아마도 약을 먹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검사는 그럴 리가 없다고 힘 없이 반박하는데 경찰서장이 나와서 검사를 부른다. '용의자가 갑자기 자신이 죽인 피해자의 아들이 자신의 친아들이라고 말했다'는 것. 그 사이 용의자는 깜빡 잠이 드는데 꿈속에서 자신이 죽인 피해자를 보고 '죽지 않았구나' 하며 반가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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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날이 밝고 용의자는 그제야 정말로 시체를 묻어둔 장소로 그들을 데려간다. 손과 발이 꽁꽁 묶인 채 땅 속에 묻혀있는 피해자의 시신이 드러나고 경찰서장은 갑자기 감정적이 되어서 '죽였으면 됐지, 왜 저렇게 묶었냐'며 범인을 때리려고 한다. 그를 말리는 검사. 범인의 동생은 갑자기 울면서 '저 사람을 죽인 건 나예요.'라고 말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다. 형만이 그를 응시하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한다.

시체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부검을 하는데 그전에 검사가 의사를 찾아와 '어떤 여인의 신비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 사실은 그 여인이 자신의 아내였던 것. 아이를 낳고서는 예고한 날에 어떤 상흔도 없이 죽어버린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고 마치 건너 아는 사람인 것처럼 '신비하다'라는 말로 포장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외도를 했었고, 그녀도 그 사실을 알았었다는 말을 의사 앞에서 조심스레 꺼내며 이제야 자신의 과오를 조금이나마 인정하려고 한다.

그들을 보내고 피곤한 몸으로 부검실에 들어간 의사. 부검 장면은 보여주지 않지만 적나라한 소리로 관객을 괴롭힌다. 예상대로 별 이상 없이 진행되던 부검은, 갑자기 부검을 진행하는 법의관의 '여기 좀 와서 보세요'라는 말로 이 사건이 끝나지 않았음을 예고한다. 폐에서 흙이 나왔다는 것은 산 채로 매장되었을 확률이 높다는 것. 부검실에서 부검을 진행하는 법의관과, 의사의 구술을 받아 적는 기록관은 '의사'의 결정을 기다린다. 법의관은 '문제가 있으니 더 알아보아야 한다'라는 취지의 말을 하고, 기록관은 피곤하고 지쳤다는 듯 '빨리 결정하라'라고 보챈다. 의사는 잠깐 창밖을 바라보는데 죽은 피해자. 그러니까 지금 부검당하고 있는 시체의 가족(아내와 아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곧 입을 연다. '이상 소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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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경찰, 검사, 의사가 아니라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직업적 소명의식, 즉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는 말 말이다. 수많은 직업 중에 이 세 가지 직업 '경찰, 의사, 검사'에게 우리는 특별히 사명감을 요구한다. 대의를 위해 희생해달라고, 정의 실현을 위해 몸 바쳐 달라고. 하지만 이 영화에 등장한 '경찰, 의사, 검사'는 그냥 그것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보통 사람들이다. 경찰의 일을 하고, 의사의 일을 하고 검사의 일을 할 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범죄'를 다루는 일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잘잘못을 따져야 하고 판단해야 하는 환경 속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대부분 다른 사람의 잘못이다.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피해, 사건을 해결하고 처리해야 하는 직업이라 '이건 누구 잘못이다.' '이 일의 과정은 이럴 것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누군가를 판단하고 의심해보고 단죄하는 말이 습관처럼 튀어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항상 시선이 바깥을 향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정작 자신을 들여다보지는 못한다. 그들이 만나는 숱한 범죄자들과 비교해봤을 때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나는 범죄자가 아니다'라는 명제가 떡하니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호언장담을 한 자신(경찰서장)의 말을 듣고 따라나선 검사의 불만 섞인 몇 마디에 기분이 상하고, 고생은 자기가 다 하고 생색은 지(검사)가 낸다고 말한다. 자신(검사)이 늘상 보는 범죄들과 비교해보면 잠깐 외도한 것은 잘못의 축에도 들지 않는다. 아내도 분명 그 문제로 나를 비난하지 않았으니까 이해하고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를 낳으면 얼마 후 나는 죽을 것이라고 이상한 말을 하더니 아내가 갑자기 죽어 버렸다. 이 죽음에 대한 진상은 알고 싶지 않다. 그냥 이 죽음은 '신비한 죽음'으로 묻어두고 싶다. 쉽게 끼어들지 않고 말없이 상황을 관찰하며 분석하며 매사를 과학적으로 생각하려는 나(의사)는 결정적인 순간에 과학적인 분석을 밀어낸다. 나의 일상은 너무 피곤하고 반복적이고 그래서 권태롭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도 원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혼하고 혼자 산다. 피곤한 내 삶에 누군가가 더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자동적으로 분석하고 추론한다. 다만 내가 뭔가를 더 해야 한다면 멈추고 싶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분석과 재확인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냥 덮어버리고 싶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하나는 진범이 자백한 용의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피해자가 산 채로 매장되었다는 것. 그러나 아무도 이 일에 뛰어들지 않는다. 애써 일을 만들지 않고, 증거가 있어도 덮어 버린다. 피해자 가족의 눈물을 보았지만 덮는다.


어느 날 아나톨리아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사건은 어떤 한 사람의 자백으로 간단히 해결된다. 형식적인 부검은 해야 할 일은 다 했다는 것을 명시하는 용도로 쓰인다. 범인을 잡고, 사건을 정리하고 확인하는 이 작업만으로 나는 나의 소임을 다한 것이다. 진실이 어떠하든지 간에 일어난 것은 일어난 것이고, 해결된 것은 해결된 것이다. 이중잣대는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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