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널 사랑하게 되면서 나 자신을 고쳐나간다.
감독 : 조 라이트
출연 : 키이라 나이틀리, 매튜 맥퍼딘, 로자먼드 파이크, 사이먼 우즈
<오! 멜로> 시리즈의 여섯 번째 영화는 조 라이트 감독의 2005년 작품 <오만과 편견>이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극장에서만 두 번 봤고, 본 횟수로 따지면 열 손가락도 모자랄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영화이다. 특히 다아시가 빗속에서 리즈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얼마나 돌려봤는지 모른다. 워낙 유명한 고전 소설이고, 남자 주인공인 다아시가 으뜸으로 멋있는 캐릭터로 정평이 나 있는터라 참 보는 맛이 있다. 소설의 내용을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영상미가 있고, 남녀 주인공이 캐릭터에 맞게 잘 어울려서 재밌게 볼 수 있다.
리즈의 가족들을 보면 짜증이 날 수 있지만 시대적인 상황을 보면 이해도 된다. 제인처럼 예뻐도 배우나 모델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리즈처럼 똘똘해도 사회적으로 써먹을 곳이 없다. 심지어 유산은 남자에게만 물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딸이 다섯이나 있는데도 먼 친척인 콜린스에게 상속된다. 여자는 결혼 외에는 생계를 유지할 수단이 없고, 아들은 하나도 없고 딸만 다섯인 베넷 가문은 원해서라기 보다 어쩔 수 없이 딸 하나를 콜린스에게 시집보내야 할 상황인 것이다. (제인 오스틴이 지적하는 부분이 계급 타파까지 가진 않는 점은 이 소설의 한계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베넷가와 가까운 네더필드 저택에 잘생긴 부자 청년이 휴양차 온다고 하니 온 동네가 들썩인다. 딸 다섯인 집안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잘생긴 부자 청년 미스터 빙리가 가장 가까운 친구 하나를 데려오는데,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청년보다도 훨씬 더 부자이고 훨씬 더 잘생겼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모두들 관심을 갖지만 차갑고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그에게 자존심 강한 리즈는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된다. 이번에 다시 볼 때 보니까 다아시가 리즈(엘리자베스)를 처음 보자마자 움찔하는데 외모가 자기 스타일이었던 걸까? 그래 놓고 "괜찮긴 하지만 끌릴 정도는 아니지."라고 독설을 날리니 보통, 멋진 남주들이 처음에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닌 척하는 게 국룰이니 다아시도 이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다 하겠다.
늘 상류층 사람들 사이에서 음악과 미술, 독서 등 각종 교양 잡기를 몇 가지나 가지고 있는 여성들(그렇지 않더라도 그래야 한다고 믿거나 그러려고 하는 여성들)을 보다가 딱히 내세울 특기 하나 없는데 움츠러드는 기색 하나 없이 당당하게 자기 할 말을 똑 부러지게 하는 여자를 보니까 다아시 눈에는 '이런 여자는 처음이야.'가 된다. 근거 없이 고집만 피우는 것이 아니라서 이 여자가 자기한테 하는 말에 반박하기가 어렵다. 결혼할 나이가 되고도 남았는데 별 걱정이 없어 보이고, 딱히 내세운 적은 없지만 늘 칭찬만 받으며 어디 가든 인기가 있었는데 이 여자는 오히려 자신에게 데면데면하게 굴며 자신을 별 것 아닌 것처럼 대하니 다아시 입장에선 관심이 더 갈 수밖에 없겠다.
또 '춤을 안 추는 것'으로 이렇게 욕먹어 본 적이 없는데, 이 일로 몇 번이나 자신을 나무라는 이 여자 때문에 자신이 무례했구나 하고 깨닫는다. 그래서 다음 무도회에서는 그녀에게 자신과 춤을 추겠냐고 묻는다.
리즈도 자신은 그를 싫어한다고 믿고 있지만, 싫은 것도 사실 관심이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니까. 눈길은 자꾸 가는데 왜 저렇게 오만한 거지? 싶고 결정적으로 처음 만난 무도회에서 '괜찮지만 끌릴 정도는 아니지' 자신을 두고 한 말을 직접 들었기 때문에 이 남자와 잘 될 가능성이 없다고 파악하고 어쩌면 리즈 입장에서도 먼저 벽을 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는데 나한테 끌리지 않는다고 말한 남자를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마차에 올라탈 때 잠깐 손 잡아 준 것만으로 신경이 쓰이는 것이고, 무도회에서 그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춤추자고 했을 때 고민 없이 'YES'라고 해놓고, 친구에게 내가 정말 'yes'라고 한 것 맞냐고 묻는 것이다.
남자가 먼저 자신의 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쭈뼛거리면서, 허당끼 넘치지만 자기 나름대로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애쓴다. 여자도 긴가민가하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데 언니 제인이 실연당하게 만든 장본인이 이 남자 다아시라는 것을 알고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빗속을 뛰어간다. 이번에 보면서 '왜 저렇게까지 하지?' 의문이 들었다. 사실을 알고 화가 날 수는 있는데 평소의 리즈라면 예배가 끝난 후 다아시의 면전에 대고 욕을 한바탕 퍼부어줬을 것 같은데, 오히려 그녀는 그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거친 빗속을 뚫고서라도 그로부터 멀리멀리 떨어지려는 것처럼. 왜 그런 걸까. 아마 이미 그녀도 그를 마음속에 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네 놀러 갔다가 이 남자를 우연히(리즈의 입장에서는) 만나게 되었는데, 이 남자의 태도가 전과는 확실히 달라졌고, 그래서 조금 설레고 있는데 갑자기 찬 물이 휙 끼얹어진 느낌. 그런데 이 남자가 자신을 따라와서는 (똑같이 비를 쫄딱 맞고)
"리지 양, 당신을 잊을 수 없었소. 로징스에 온 건 당신을 보기 위해서였소. 신분과 집안 체면 따질 분별력도 잃었소. 이 고통을 치유해줘요."
"무슨 얘기죠?"
"사랑해요. 열렬히요. 부디 나와 결혼해줘요."
이렇게 뜨거운 고백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따질 건 따져야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리지. 마음보다 더 독한 말로 그를 몰아세우고, 당신과 절대 결혼할 수 없다며 그에게 상처를 준다. 자기 입장에선 솔직한 것이지만 듣는 사람한테는 매우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을 다아시 역시 변명이랍시고 내뱉는다. 그러나 빗속에서 한바탕 감정을 격하게 표출한 둘은 각자 오늘 있었던 일들, 상대방에게 들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한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 그 사람 말도 일리가 있긴 한데..'
'오해받은 채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그녀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해명하고 싶어.'
나는 이 지점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가 상대방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내 잘못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인정하면 지는 것 같고, 자존심 상하기 때문에. 그래서 계속 상대방을 미워하기로 결심한다. 나를 보호하려고.
그러나 다아시는 사랑하는 그녀에게 거절을 받아 고통스럽지만 그녀를 얻을 수 없다고 해도 이 관계를 잘 마무리 짓고 싶어 한다. 당신이 나를 오해하고 있지만 그러나 나의 책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는 태도. '너를 사랑하기에 최소한 너에게 오해받은 채로 미움받으며 헤어지고 싶지는 않다. 나를 정확히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도 너를 향한 나의 배려이고 존중이고 사랑이다.'
리즈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한 말들을 생각하며 그가 두고 간 편지를 꼼꼼히 읽는다. 왜 '위컴'의 말만 듣고 편견을 가졌을까. 왜 언니에게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라고 권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향한 절절한 사랑 고백에 리즈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그래서 이모 부부를 따라 여행을 다니며 마음을 추스르는데 운명처럼 그의 집 근처에 오게 되고, 들러보자는 이모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다. (말로는 가지 말자고 했지만 가고 싶은 마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가 없다고 해서 왔는데, 또 있어서 만나고.. 다아시는 이렇게 만난 리즈를 그냥 보낼 수 없어서 그녀에게 직접은 안 통하니까 그녀의 이모부를 찾아가서 어떻게든 그녀와 함께 할 시간을 만든다. 그렇게 하루 함께 행복하게 보냈는데 집에서 온 편지에는 동생 리디아가 위컴이랑 도망쳐버렸다는 소식이 적혀있다. 우는 리즈를 보는 다아시는 어쩔 줄을 모르고, 미리 알리지 못한 자기 잘못이라며 어떻게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리즈는 집에 돌아와 리디아의 일이 어떻게 해결되는가 맘 졸이며 기다리고만 있는데 이모부의 편지에서 결론적으로 리디아와 위컴을 결혼시켰다는 가장 긍정적인 답을 듣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리디아를 찾은 것도, 위컴에게 거액의 결혼 예금을 주고 결혼식을 올려준 것도 다 다아시였다는 것. 그리고 그 다아시가 빙리를 데려와 제인에게 청혼하게 하고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확인하게까지 하는데..
그에게 못된 말로 상처를 주고 매몰차게 청혼을 거절했기에 뭘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리즈는 행복해하는 언니 옆에서 실없는 농담이나 하고 혼자 눈물을 흘릴 수밖에. 다행히 다아시의 숙모가 리즈를 찾아와 아침드라마 한 편을 찍는 통에, 슬쩍 흘린 리즈의 마음이 다아시의 귀에 들어가고, 여전히 그녀를 너무나 사랑하는 그는 아침 일찍부터 그녀의 집을 향해 걸어오고 잠이 오지 않아 새벽녘부터 집 주변을 걷던 리즈와 만난다.
"그 모든 일은 당신을 위한 것이었소. 이모님을 만났다는 얘길 듣고 한 가닥 희망을 품게 됐소. 내가 아직도 싫다면 지금 말해요. 내 감정은 변함없지만 싫다면 다신 말 안 꺼내겠소. 만약 더 이상 내가 싫지 않다면 고백하는데 난 마법에 걸렸소. 당신을 사랑하고 또 사랑해요. 영원히 함께 있고 싶소."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는 둘 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다. 자존감이 높다는 것은 자신을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굳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별로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솔직하다. 비록 이 둘은 솔직을 넘어 직설 화법을 쓰다 보니 오만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고, 자신의 판단을 믿다 보니 편견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그래서 서로 오해하고 상처 주고, 받았으나 거기에서 모든 걸 끝내지는 않았다. 상대방의 말을 가감 없이 듣고 옳고 그름을 다시 판단했으며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고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것이 처음이라서 서툴렀지만 당신만큼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도 소중했기에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다아시의 사랑 표현 방식은 언제 봐도 참 멋있게 느껴진다. 사랑을 증명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방식. 말을 앞세우지 않고, 당신의 말을 귀담아들은 후에, 당신에게 필요한 것,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해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면서 나 좀 사랑해달라고 애걸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표현한다. 기회가 왔을 때 우왕좌왕하지 않고, 서투르나 분명하고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써, 자신의 행동의 의미를 다시 말로써 확인시켜 주는 방식. 어떤 여자가 싫어할까 싶다.
사랑은 내가 오만했다는 것, 내가 편견을 가졌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일깨워줄 뿐 아니라 그것을 개선할 의지를 준다. 누구에게 끌리는 연애감정을 넘어서서 '사랑'이라는 개념에 가까워질수록 그것이 가진 '힘'이 가시화된다. 사랑은 분명히 꽁냥꽁냥 하고 알콩달콩하는 것 너머에 있다. 단 한 번의 키스신도 나오지 않는 이 영화,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이 고전으로 오래오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