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오, 멜로! 05화

시월애 (2000)

- 나를 사랑하지만 나를 알지 못하는 너에게

시월애.jpg

감독 : 이현승

출연 : 이정재, 전지현


<오, 멜로!> 시리즈에 다섯 번째로 소개하는 영화는 이현승 감독의 2000년 작품 <시월애>이다. 한국 영화 중에 한 작품을 고르고 싶었고, 예전에 봤을 때 여운이 남았던 기억이 있어 이번에 다시 보았다. 다시 보니 그렇게 촘촘하게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었고,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영상이 참 아름답고, 설정을 끌고 가는 것이 큰 무리가 없어 그래도 잘 보았다. 20년 전의 전지현과 이정재라는 두 배우가 참 풋풋하게 예뻤고, 아쉬운 것은 연기도 풋풋했다는 것. 이현승 감독이 연기 디렉션만 좀 더 신경 썼으면 훨씬 퀄리티가 올라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일단, 이 영화는 2년이라는 시간 차를 두고 같은 집에서 다른 시간대에 살았던 남녀가 집 앞 우체통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서히 사랑하게 된다는 판타지 설정을 포맷으로 갖고 있다. 시간을 초월해 사랑을 나눈다는 설정도 유니크한 것은 아니지만 '2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이 영화를 유니크하게 만드는 독특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만나지 않은 상태이지만 만남에 대한 '가능성'은 꽤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날 수만 있다면 연인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성현(이정재)의 입장에서는 98년이라는 자신의 시간 안에 '편지'로서도 은주(전지현)가 분명히 존재하고, 은주가 말해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따라 98년을 살고 있는 은주를 만날 수도 있는 것이라 감정의 혼란을 느낄 수 있는 여지가 있고, 98년의 은주는 성현을 알 수가 없고, 2000년의 은주는 오직 편지를 통해서만 성현을 만날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두 사람과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을 애달프게 하는 것이다.


시월애11.jpeg
시월애10.jpeg
시월애8.jpeg


처음에는 장난으로만 여겼던 '펜팔'이,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내게 일어난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는 두 사람의 마음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우리 두 사람'에게만 일어난 '판타지'는 '네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사랑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건너뛰게 만든다. 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는 것만으로 이미 사랑은 시작된다. 은주는 2000년을 살면서 느끼는 고민과 슬픔을 성현에게 털어놓고, 성현은 그녀를 달래고 위로하면서 현재의 우울감으로부터 벗어난다. 너를 알지 못했다면 평생에 해보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을 일들을 해보고(그것이 실상은 별 게 아니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이 날 위해 2년 전에 맡겨 둔 와인을 맛본다.


시월애6.jpeg
시월애5.jpeg


그녀가 말해준 정확한 시간과 장소에 그녀를 보기 위해서 달려가지만 그녀가 자신을 알아볼 리 없다. 2000년의 시간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성현이 나타나지 않자 은주는 크게 낙심한다.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없는 성현도 왜 자신이 그녀를 만나러 가지 않았을까 까닭을 모른 채 우울해진다. 만나자고는 했지만 사랑을 고백한 사이는 아니기에 은주는 섭섭하면서도 그 섭섭함을 다른 곳에 투사한다. 옛 연인을 우연히 만난 후, 그가 자신을 떠나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다며 그 사람이 떠나지 않게 도와달라고 성현에게 부탁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가 엇갈리는 포인트를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때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좀 더 섬세하게 표현했으면 어땠을까, 조금 아쉽다. 둘의 심리를 조금만 더 농밀하게 표현했으면 참 좋았을 것 같다.


시월애7.jpeg
시월애4.jpeg
시월애3.jpeg


은주의 부탁을 받고, 은주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후에 성현은 이제 은주와의 이별을 결심한다. 그녀의 청을 들어주고 자신은 그녀를 향한 사랑을 멈추기로 한 것이다. 성현의 이별 통보를 받은 은주는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2000년의 시간에서 성현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가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그가 이미 죽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은주와 그녀의 연인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장소로 가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왜 성현이 약속을 해놓고 나타나지 않았은지 이유를 알게 된 은주는 2년 전, 그가 사고를 당하는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미친 듯이 일 마레(둘이 살던 집) 앞 우체통에 쪽지를 적어 넣는다. '그곳에 가지 말아요!' 이 편지를 성현이 사고 전 확인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그가 죽지 않기만을 바라며 은주는 펑펑 눈물을 흘릴 뿐이다.


시월애2.jpeg
시월애1.jpeg

그리고 영화는 은주가 우체통에 편지를 넣기 전의 시간으로, 일 마레에서 떠나오는 시점으로 둘을 돌려놓는다. 살아 있는 성현이 은주 앞에 나타난다. 은주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를 손에 들고서.


"누구세요?"

"지금부터 아주 긴 이야기를 시작할 텐데 믿어줄 수 있어요?"




이 사랑은 '같은 공간'을 공유한 두 사람이 '다른 시간대'에서 만나면서 시작된다. '만남'이란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이 전제되어야 하기에 누군가는 '만남'을 위해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 성현은 이 만남을 위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심지어 사랑하는 대상조차 날 알지 못하는 2년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은주는 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나누었던 소중한 기억들을 잃어야 했다. 모든 것을 알면서 묵묵히 기다렸던 남자와 아무것도 모른 채 타인에게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여자가 이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마주 보며 서 있다. 은주가 성현의 말을 믿을지는, 성현이 은주를 끈기를 가지고 설득해갈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보는 우리들은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 있다는 것만으로 이 사랑을 낙관하게 된다.


나는 '앎'을 사랑과 동격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신형철의 책 제목처럼 '정확하게 알고자 하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믿는다. 그러나 사랑이 시작되는 방식은 참 다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영화도 그렇고, 이전에 소개한 <비포 선라이즈>도 그렇고, 마지막에 소개할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도 그렇다. 연인이 될 때 꼭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이나, '소개팅' 같은 것으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영화의 은주와 성현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게 될 수도 있고, 그 특별한 경험 자체가 사랑이라는 낭만성과 직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하다는 것은 남들에게 없는 것이 '있는 것'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없는 것이 있는 대신, 있어야 할 것이 없을 수 있다. '특별'에는 '결핍'을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아직 너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 특별함이 널 생각할 때의 나를 설레게 한다. 그래서 어쩌면 이미 시작되었을 그 사랑이 우리의 결핍을 이해하고, 견뎌내며 사랑의 본질에 다가서게 만든다.


사랑이 초월할 수 있는 있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겠는가. 현실을 사는 우리의 약함이 초월을 막는 것이지, 사랑 그 자체는 어떤 것이든 '초월할 힘'이 있다고 믿는다.


나를 알지 못하지만 날 사랑했던 너를 사랑하며 기다리는 일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keyword
이전 04화비포 선라이즈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