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오, 멜로! 04화

비포 선라이즈 (1995)

- 사랑은 은유와 직설 사이, 꿈과 현실 그 사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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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리처드 링클레이터

출연 :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내가 사랑하는 멜로 영화 네 번째 작품은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1995년 작품 <비포 선라이즈>이다. 비포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비포 시리즈와, <보이 후드> 같은 작품을 통해 '시간'이라는 매개체를 가지고 삶의 영속성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전한다. 살아가는 사람들, 삶 속에서 굴곡이 있어도 여전히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좋은가보다)

이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어떤 '만남'이 인생을 만들어가는 최초의 지점이다. 이 만남 전후로 두 사람의 인생의 역사가 다르게 쓰인다. 우리에게도 만남은 있었다. 수많은 만남 중에 어떤 만남이 지금의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을까 함께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링클레이터 감독이 이렇게나 영화를 잘 만드는 사람이었구나. 옛날부터 잘 만들었구나. 생각했다. <보이후드> 같은 마스터피스를 만들어냈으니 실력을 의심할 이유는 없지만 20년 전에도 이미 '완성의 단계'에 이르렀구나 싶어서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의 영화는 재미있고, 예술적이고, 본 후에도 계속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우리가 '낭만'이라고 부를 만한 거의 모든 것의 집합체이다. 낭만으로 가득 차서 내가 지금 보는 것이 영화라는 것을 알면서도 '꿈만 같다'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무엇보다 나는 이 영화의 진행 방식이 정말 탁월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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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실 진부한 설정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렇게 미적이며 시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니. 같은 재료로도 셰프의 취향과 능력에 따라 완전히 다른 요리가 되듯,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손에서 이 진부함이 보석으로 변하는 마술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시작은 이렇다. 미국 뉴욕에 사는 제시(에단 호크)와 프랑스 파리에 사는 셀린(줄리 델피)은 기차에서 100% 우연히 만난다. 시끄럽게 싸우는 부부가 없었다면 마주치지도 않았을 텐데, 그들 옆에 앉았던 셀린이 자리를 제시 옆자리로 옮기면서 그렇게 둘은 처음 만나게 된다. 예쁜 여자애(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의 젊은 시절 미모가 너무 눈부셔서 그것만으로도 감상적이 된다)가 책을 들고 자기 옆 좌석에 앉으니까 마침 화젯거리도 있겠다, 제시가 먼저 말을 걸게 되는 것이고. 셀린은 헝가리에 사시는 할머니를 뵙고 파리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제시는 비엔나에게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제시의 제안으로 휴게실에서 대화를 하는데, 대화가 잘 통해서라기보다, 상대방이 하는 말이 서로에게 매력으로 다가온다. 비엔나에 도착해 내리려다 말고 제시는 셀린에게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탈 때까지 함께 지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고 잠깐 고민을 했지만 셀린은 그러자고 하며 그와 함께 기차에서 내린다.

이후로는 비엔나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 것, 어떤 장소에서 나누는 대화들로 교차하며 영화가 진행된다. 여행지에서 만나서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은유와 상징과 시가 흘러나오고, 어떤 장소에서 그 장소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그 장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느끼면서 자신의 이야기, 그러니까 각자의 정보를 자연스레 나눈다. 정작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 "지금 만나는 사람 있어?"는 거의 마지막에야 튀어나온다. 그리고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얘기도 남은 시간보다 보낸 시간이 더 많아진 후에야 하게 된다.

직장인이면서 아마추어 연극배우인 사람들, 손금쟁이, 노숙자 시인 등의 입을 통해 둘의 마음과 앞으로 될 일들에 대해 시적으로 예언하고, 전망대, 레코드샵, 바, 묘지, 공원 등에서 셀린과 제시는 자신의 과거를,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고백한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한 호감도 깊어지고, 이렇게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내기엔 너무 아쉬운 인연이라는 것을 두 사람 모두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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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노숙자 시인이 두 사람이 던져 준 '밀크셰이크'라는 단어를 넣어서 즉석에서 써낸 시가 너무 아름다워 옮겨본다.


백일몽과 같은 망상

리무진 같은 속눈썹

오, 그대 예쁜 얼굴로

내 포도주잔에 눈물을 흘려주오.

저 큰 눈을 보라

그대는 내게 어떤 의미인지 보라

달콤한 케이크와 밀크셰이크

나는 망상의 천사

나는 환상의 퍼레이드

내 생각을 그대가 알아주길

더 이상의 추측은 사라지길

나의 과거를 그대는 모르네

우리 미래를 우리는 모르네

강물의 나뭇가지처럼

인생에 정체되어

조류에 휘말려

하류로 흘러가네

난 그대를, 그대는 나를 운반하리

그것이 마땅하니

그대는 날 모르는가

지금쯤 날 알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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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면서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마술'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보여줌으로 다른 세계로 순간 이동시키는 마술처럼. 우리가 꿈꾸는 것과 현존하는 우리 사이에 사랑은 있다. 누군가에게 반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르게 보이고 그것들이 의미가 되고,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내가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언이 된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과 지금 그것을 소원하고 있는 나 사이에. 현실과 현실을 빗댄 은유 사이에, 실체라고 말하기엔 환상 같은 분위기와 그 분위기 안에서 바꿀 수 없는 사실인 나의 과거를 말하는 우리 사이에 사랑은 있다. 환상과 낭만만으로도, 현실만으로도 사랑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사랑은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다.




영화임에도 우리는 이 만남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적잖이 위로를 받는다. 약속은 했지만 그 약속을 지킬 것인가를 여기에서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서로 약속을 지키고 함께 할 수 있기를, 보는 우리가 바라면서 영화밖에 있는 우리도 꿈꾸게 하는 것이다.

너를 만나고 '그랬으면'으로 시작된 생각은 '그럴 것이다'로 어느 순간 바뀌어 있고 그 망상이 사실을 아름답게 각색한다. 우리의 사랑이 시작되는 지점은 아마 그 어디쯤일 것이다.


<비포 선라이즈>가 보여주는 것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시작. 시작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참 아름답게 표현했다. 시작은 되었어도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유지하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시작 전후의 설렘.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꽤 행복해진다. 인생이란 결국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니. 시작하라.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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