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오, 멜로! 03화

러브 어페어 (1994)

- 운명이 내게도 찾아왔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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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글렌 고든 카슨

출연 : 워렌 비티, 아네트 베닝


내가 사랑하는 멜로 영화, 세 번째 추천작은 글렌 고든 카슨 감독의 1994년 작품 <러브 어페어>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정주행한 영화는 아니지만 가끔 생각나면 엔딩 부분은 몇 번이고 찾아보았던 영화다. 다 알고 보는데도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 이번에 다시 보면서 '이런 내용이 있었구나' 싶었고, 여전히 참 아름답다고 느껴진, 또 울게 만든 영화다.

나는 이런 쪽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인 편이어서 누군가를 상처 주면서 '내 사랑이 최고야' 하는 '사랑 지상주의'는 배격한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 마이크 갬브릴(워렌 비티)테리 맥케이(아네트 베닝)도 각자의 약혼자가 있는 상태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라 형식만 보면 좋아할 수가 없는데도 이 영화는 참 좋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과 이후의 모습, 왜 서로를 선택했는지에 대해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마이크 갬브릴은 유명 풋볼 선수 출신으로 현재는 TV쇼 MC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 훤칠한 인물 덕에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고, 다가오는 여자 막지 않고, 떠나는 여자도 잡지 않는 자타공인 플레이보이다. 그러므로 이 남자가 방송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린 위버와 결혼함으로 한 사람에게 정착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은 세간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테리 맥케이는 음악을 좋아하고 그걸 업으로 삼고 있지만 그쪽에서는 신통치 않고, 우연한 계기로 인테리어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름다운 그녀에게도 켄 알렌이라는 유명 은행의 대표라는 약혼자가 있다. 마이크와 테리는 100% 우연히 같은 비행기를 탄 것뿐이었다. 마이크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한눈에 반한다. 반해서인지, 그녀의 말과 행동이 매력적으로 느껴져서인지 뭐가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테리도 이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잘 알고 있는데도(바람둥이에다 약혼자가 있다는 것 모두)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 남자에게 정확히 선을 그을 수 없다. 우연은 우연을 불러와 비행기 엔진 고장으로 작은 섬에 비상 착륙하게 되고, 마이크는 타히티로, 테리는 하와이로 중간 경유지를 정하고 인연이 여기에서 끝나는가 했는데 하와이행 배를 4시간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테리도 마이크가 탄 타히티행 배에 오른다. 두 사람 모두 어딜 가도 눈길을 끌기에 서로 다른 이성들이 유혹하지만 테리는 마이크만, 마이크는 테리만 신경 쓰일 뿐이다. 그럼에도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는 테리는 마이크의 손을 덥석 잡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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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는 타히티에 자신의 숙모가 살고 있다며 테리에게 몇 시간만 함께 보내보자고 한다. 그를 따라나선 테리, 타히티의 아름다운 풍광에 황홀해지고 끌리는 사람과 함께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보낼 수 있는 이 짧은 시간이 소중하다. 잠깐 뵌 그의 숙모는 자신이 놓쳤던 삶의 중요한 진리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그래서 마이크에 대한 마음도 더 깊어진다. 마이크도 마찬가지이다. 그녀가 스스럼없이 자신의 숙모와 어울리며 숙모가 연주하는 피아노곡을 따라 허밍으로 노래하는 모습이 가슴 깊이 들어온다.

숙모는 마이크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스스로도 속이며 살고 있다고 테리에게 말한다. 한 사람과 진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행복한 사람인데 그걸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행복해?"

"원하는 걸 가졌으니 그래야겠죠."

"마이크도 그렇게 말했지."

"그런데 틀렸다고 보세요?"

"그런 얘긴 안 했어. 철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인생은 소유가 전부가 아니라 지속해서 그것을 원하느냐야. 마이크나 아가씨 정도의 사람은 얻는 것은 쉬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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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티에서 보낸 시간은 마이크에게 확신을 준다. '이 사람은 다르다.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불장난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테리에게 함께 하자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테리도 마이크를 향한 마음을 접기 힘들다. 그래서 그녀는 경비행기를 타고 빨리 돌아가는 대신 이틀 더 배에서 머물자고 한다.

그러나 3일의 시간은 흘러 헤어져야만 하는 시간은 온다. 마이크가 먼저 용기를 낸다.


"모험할 생각 있어요? 만약 그럴 생각이 있다면 3개월의 시간을 줘요. 정리할 시간을."


자신의 마음은 확실하다며 용기를 주는 남자의 손을 결국 테리도 잡는다. 이 지점이 <비포 선라이즈>와 다른 부분인데, 시간의 유예를 둔다는 점에서 같으나 <비포 선라이즈>가 '6개월이 지나도 우리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을 증명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면, 테리와 마이크는 자신들의 마음에는 확신이 있는 것이다. 다시없을 사랑이고, 이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라는 것을. 다만 지금 당장은 만나기 어려우니 어떤 제약도 없이 사랑하기 위해 각자 지금까지의 삶에서 정리해야 할 것들을 정리하고 만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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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는 약혼했던 켄의 고급 아파트에서 나와 외진 곳에 작은 집을 얻고,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음악 교사로, 광고 음악의 코러스로 온전한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만 하면서 약속한 3개월 후 5월 8일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이크도 린의 관계 때문에 얻었던 수혜를 다 내려놓고 풋볼 선수였던 경력을 가지고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학의 풋볼팀 코치 일을 맡는다. 테리가 켄과 헤어지고 난 후, 누구와도 데이트를 하지 않는 것이 의아한 친구, 린과 함께 한다면 누릴 수 있는 부와 명예와 편리함을 다 포기하고서도 '사랑한다는 게 뭔지 찾았다'며 활짝 웃는 마이크. 서로와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꿔야 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다. 그들은 그 시간을 기꺼이 지나며 겪어야 할 것들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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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고대하던 5월 8일이 되었는데, 너무 들뜬 나머지 그가 기다리고 있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올려보다가 테리는 그만 교통사고가 나 걸을 수 없게 된다. 그와의 사랑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걷는 모습으로 그를 만나고 싶다. 꼭 나오겠다고 말했던 테리가 자정이 넘어서까지 나타나지 않자 마이크는 상심한다. 그렇다고 두 사람 다 린이나 켄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린과 켄 모두 마이크와 테리에게 미련을 가지고 있지만 이미 두 사람에겐 서로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 시간은 흘러서 겨울이 되었고, 크리스마스 콘서트에 마이크는 켄과 함께 앉아 있는 테리를 발견한다. 그 자리에선 가볍게 인사만 하고 나왔지만 테리를 본 이후 마이크는 마음을 잡을 수가 없다. 서로가 나오지 않아도 이유를 묻지 말고 연락하지도 말자고 약속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멀리 떠나기 전 꼭 테리에게 나오지 않은 이유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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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오지 않았냐?'는 자신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메리 크리스마스'를 말하는 그녀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는 마이크. 돌아가시기 전, 테리에게 주라며 숙모가 보낸 숄을 그녀에게 전한다. 그러면서 그걸 걸치고 타히티에 있던 그녀를 그림으로 그렸던 마이크는 불현듯 호텔 레스토랑에 줘버린 그 그림을 '어떤 여자'가 꼭 갖고 싶어 해서 주라고 얘기했던 것이 떠오른다. '돈이 많이 보이지도 않고, 그리고...'


영화에서는 그 뒤에 말은 생략하지만 그가 들었던 말이 '휠체어에 탄' 이란 말이었다는 걸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제야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집 안을 두리번거리며 그림을 찾다가 한쪽 방 안에 걸려 있는 그림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런 사고를 당해야 했던 그녀 때문에 마음이 무너진다.


"마이크,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아요."

"왜 진작 말하지 않았소?"

"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겨야 했다면 왜 하필 당신에게."

"내 잘못이었어요. 위를 올려다봤거든요. 당신이 있을 줄 알았죠. 걱정 말아요. 당신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나도 다시 걸을 수 있어요. 못할 일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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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운명'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영화 <러브 어페어>의 주인공들이 파릇한 청춘이 아니라 인생의 황금기를 지나온, 남은 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뒷받침해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상황에서 서로를 만난 것이라서 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 내게 특별하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누구에게도 충실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 남자는 이제 앞으로 이 한 사람에게 충실하고 싶다는 소원을 갖게 한 누군가를 만나고 이 느낌이 자신이 지금까지 찾으려 애썼던,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바로 그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소유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원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마이크의 숙모는 그렇게 말했다. 테리는 아마 그 말을 곱씹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소유한 것을 앞으로도 계속 지속적으로 갖기를 원하는가. '지속적으로 갖기를 원하는 것'은 켄이 아니라 '마이크'라는 것을 테리도 알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지만 세상이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테리 자신이 직접 만나고 사귄 마이크는 먼 곳에 혼자 사는 숙모를 애틋하게 여기고, 호감을 표현하나 강요하지 않고,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마음속에 낭만과 따뜻함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그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은 각자 떨어져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3개월의 시간이 증명한다. 지금껏 누려왔던 것에 대한 미련이 일체 없다. 오히려 자신이 엉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반성하고 바로 잡는다. 내 능력 안에서 나 스스로 살아갈 방법을 만들고, 그녀(그)가 내게 왔을 때 이전의 삶으로 인해 어떤 부침도 느끼지 않도록 삶을 정돈한다. 그런 것들을 힘들어하지 않고, 그 안에서 당신과 함께 할 날을 기다리며 혼자여도 행복감을 느낀다. 3개월이 지나면 영원히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들의 삶에 활력을 준다.

그녀가 나타나지 않아 상심했으나 다시 만나자고 말하며 헤어졌던 날 했던 약속을 지킨다. 연락하지 않고,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러나 또다시 우연히 그녀를 보고 나서는 이유를 알아야만 애써 정돈한 자신의 삶이 망가지지 않을 것 같다. 그녀에게 닥친 사고와 불행이 그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남자는 마음이 찢어진다. 그녀의 장애가 두 사람이 함께 하는 데에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녀 역시 못할 것이 없다고, 다시 걷게 될 거라고 말한다.




너무나 분명하게 나의 행복과 직결된 '운명의 상대'를 만났는데 지금 누군가가 내 옆에 있다면. 애석하게도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내가 당신에게 준 것이 '진실한 사랑'이 아니었기에 그 사람도 나처럼 '사랑'이라는 걸 느낄 수 있는 사람을 다시 만나길 축복하며 떠나는 것이 서로에게 가장 좋은 길이다. '사랑하는 한 사람과 함께하는 것' 우리가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에는 모두 이런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너와 함께 하는 것' 외에는 다 부수적이다. '너와 함께 하는 것'이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기에 나는 그것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기꺼이 버린다. 버리면서 홀가분해지고 낮아지면서 즐겁다. 네가 이전처럼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월급을 아껴가며 검소하게 살아야 해도, 당분간 그녀와 손 잡고 걸을 수 없어도.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너 하나로 인해 행복하다.


우리 모두는 생각지도 않은 때에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운명'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누려왔던 것들을 잃으면서도 '너 하나면 족하다'라는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한번뿐인 인생에서 기꺼이 모험을 해볼 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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