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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Jun 24. 2022

드라이브 마이 카 (2021)

- 그럼에도 삶을 선택했다면 그것이 곧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감독 : 하마구치 류스케

출연 : 니시지마 히데토시, 미우라 토코, 오카다 마사키, 키리시마 레이카, 박유림, 진대연, 소냐 위엔, 안휘태


제74회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았다. 사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얼마 전 페친 한 분께서 이 영화를 극찬하시길래 궁금하여 보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원작이라기에 더 흥미가 생겼다. 러닝타임이 3시간으로 꽤 긴 영화임에도 중간에 일이 있어 한 번 끊고 그다음에는 끝까지 쭉 잘 보았다. 하지만 거의 끝에 다 와서는 두 주인공의 만남이나 결말이 꽤 작위적으로 느껴져서 페친님 평이나, 네이버 평점보다는 나는 좀 낮은 점수를 줘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내가 너무 무미건조한 인간이 되어버린 건가? 하는 생각도 솔직히 들고, 좀 고민도 된다. 그래서 친구 한 명에게 이 영화 좀 보고 얘기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 친구(도 꽤 무미건조한 편이라)가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참 좋았다고 말한다면 이건 나의 문제일 것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 (Drive! My Car)란 내 차를 운전해! 혹은 내 차를 운전해도 좋아.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제목은 영화의 엔딩에 잘 드러난다. (엔딩은 마음에 든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이야기는 이 차의 주인이 다른 사람에게 운전대를 넘기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이 차의 주인과 이 차를 운전하게 되는 다른 사람이 만나게 되기까지는 각자에게 아주 큰일이 있다. 가후쿠 유스케(니시지마 히데토시)가후쿠 오토(키리시마 레이카)와 20년간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아이들이 보이지 않아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부부인가 싶은데 보다 보면 딸아이가 6세에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연애하는 사람처럼 사이가 참 좋아 보이는데  그 사이로 뭔가 싸한 느낌이 드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저명한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인 가후쿠는 러시아 연극제에 초대받아 출장을 가는데, 갑작스레 일정이 변경되어 집에 돌아왔다가 아내의 불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얼마 전 자신의 연극 무대에 아내 오토- 오토는 드라마 작가이다-가 데리고 온 동료 배우와의 정사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가후쿠는 내색하지 않고 다시 나가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는데, 아내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러시아에 잘 도착했다고 말한다. 딸아이의 기일에 절에 가 추도식을 보낸 후 부부는 그 밤 뜨겁게 사랑을 나눈다. 그러면서 오토가 집필을 맡은 새 드라마의 줄거리를 얘기하는데 그 이야기는 이러하다. 


같은 반 남학생을 짝사랑하는 여고생이 그의 부모님이 출장 간 사실을 듣고 조퇴를 하고 그의 집에 들어가서 그의 방에서 그의 존재를 느끼다가 자신이 전생에 칠성장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칠성장어는 다른 물고기의 체액(피)을 빨아먹고 사는데 자신은 그런 짓은 하지 않고 바위에 딱 붙어서 죽을 때까지 결연했던 칠성장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그의 집에 갈 때마다 하나씩 자신이 왔었던 증표를 남기고 오는데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물건으로 시작해서 자신의 속옷을 벗어두고 오는 등 점점 과감해진다. 그래도 그의 방에서 자위를 하는 것만은 스스로 금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금기에서 벗어나 그의 침대 위에서 자위를 한다. 그러다가 누군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를 듣는다. 


여기까지가 남편 가후쿠가 오토에게서 들은 얘기이다. 그렇게 또 며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내다가 외출하는 가후쿠에게 '이따가 집에 오면 이야기하자, 할 이야기가 있다.'라고 오토가 말하자 그 앞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지만 불길한 느낌에 스케줄이 끝났는데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집 주면을 빙빙 돌다가 늦게 들어가는데 불 꺼진 깜깜한 집에 오토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게 아내 오토는 뇌졸중으로 사망하고, 가후쿠는 히로시마에서 있을 연극 공연을 위해 연출가로 초청을 받는다. 자기 차에 대한 애착이 있는 가후쿠는 히로시마에 도착하자 여기 있을 동안에는 운전기사를 따로 두어야 한다는 지침에 당황하지만 어쩔 수 없어 그렇게 하기로 한다. 자기 차를 남에게 맡기는 것도 별로인데 운전기사를 보니 젊은 여자 아이다. 머뭇거리는 그에게 그녀가 어린 여자애라서 못 믿는 거냐고 묻자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가후쿠는 그녀에게 운전대를 맡기는데, 마치 차를 타고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의 안정감을 갖고 운전하는 그녀를 차츰 신뢰하게 되면서 마음을 연다. 

그가 맡을 공연은 체호프의 <바냐 삼촌>이라는 연극인데 가후쿠는 이미 이 연극에서 바냐를 연기했던 경험이 있다. 오디션을 보러 온 배우들은 일본인 외에도 한국인, 대만인, 러시아인 등 국적이 다양하다. 그런데 그곳에 오토가 자신의 공연장에 데려왔었던 젊은 남자 배우 다카쓰키 고지(오카다 마사키)가 찾아오고, 오디션 끝에 가후쿠는 그에게 바냐 역을 맡긴다. 그리고 청각장애인(들리긴 하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나(박유림)가 연극에 합류하게 되면서 <바냐 삼촌>은 5개의 다른 언어로 무대를 준비한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지만 상대방이 대사를 마치면 자신의 언어로 잘 받쳐줘야 하기 때문에 연습이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연습을 통해 배우들은 언어를 넘어서서 마음과 생각을 전달하고 나눌 수 있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다카쓰키는 가후쿠와 따로 만나 자신에게 왜 '바냐' 역할을 맡겼는지, 그리고 넌지시 오토에 대한 얘기를 꺼내서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떠보지만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도 없는 일처럼 넘어갔던 중년의 남자이기에 다카쓰기의 얕은 수에 휘둘리지 않는다. 다만 다카쓰키는 꽤 충동적이고, 폭력성이 있다는 것이 영화 안에서 드러날 뿐이다. 



없는 듯 조용히 운전만 하는 와타리. 그녀는 가후쿠에게 어떤 폐도 끼치지 않으려고 하고 그에게 어떤 부탁도 하지 않는다. 와타리 미사키(미우라 토코)는 가후쿠와 편히 대화하다가 이유나의 연기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와서 봐도 좋다는 그의 말에도 밖에서 그를 기다리면서 책을 읽는다. 와타리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는 가후쿠도 알기 때문에 그녀가 있는 곳으로 배우들을 데리고 나와 그녀와 편히 연습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와타리 역시 가후쿠의 배려나 인격에 점점 마음을 열게 되고 그녀 역시 그에게 자신의 얘기를 조금씩 하게 된다. 

그녀는 홋카이도 출신으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책 밤마다 술집으로 일하러 나가는 엄마와 살았다. 엄마는 와타리가 중학생이 된 때부터 그녀에게 운전을 맡겼고, (기차역까지 가는 길에 한 잠이라도 더 자려고) 차에서 자다가 잠이 깨면(운전이 미숙하거나 거칠어) 때렸다. 그렇게 해서 와타리는 이런 능숙한 드라이버가 된 것이다. 그런데 집 뒤 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자신의 집을 덮쳐버리고 와타리 혼자 간신히 살아남게 되고, 와타리는 엄마의 차를 운전해 아래 지역으로 내려오게 된다. 돈을 벌기 위해 히로시마 버스회사에 취직을 했고, 그렇게 이 일(운전)을 하게 된 것이다. 

공윤수(진대연)는 가후쿠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고, 가후쿠는 와타리도 같이 데려간다. 그리고 윤수는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아내 유나를 소개한다. 청각장애인 이유나가 공윤수의 아내였던 것이다. 그렇게 가후쿠와 와타리는 사적인 시간을 공유하며 친구가 되어간다. 


다카쓰키와 술을 마신 후 그를 가후쿠의 차로(운전은 와타리가) 데려다주다가 두 사람은 다시 오토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가후쿠는 우리 부부에게 딸이 있었고 오래전 잃었다는 것, 그리고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덤덤히 말한다. 오토가 극본가가 되었던 계기도. 그 계기란 섹스 도중 아내 오토가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하기 시작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다카쓰키는 전생이 칠성장어였던 여고생의 이야기를 꺼내고 가후쿠는 그 이야기는 자신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후쿠가 알고 있는 이야기의 뒷부분을 다카쓰키가 알고 있었다. 다카쓰키는 가후쿠가 알고 있는 부분을 이어 자신이 알고 있는 부분까지 말한다.


자위를 하고 있던 도중 그 남학생의 집에 들어온 사람은 그 집 식구가 아닌 또 다른 침입자, 즉 빈집 털이였다고. 빈집 털이는 반라인 여고생을 보고 겁탈하려고 했고 여고생은 남학생의 볼펜으로 그의 눈을 찌르고 다른 곳도 찌르고 계속 찔러서 죽였다고. 그녀가 그날 그에게 남긴 증표는 바로 그 시체였다고. 여고생은 자신이 저지는 일을 다음날 학교에서 그에게 모두 말하려고 하지만 그 남학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등교해서 공부하고 축구하고. 며칠을 그렇게 그를 관찰하다가 그의 집까지 따라간 여학생은 그의 집 앞에 그 전에는 없었던 CCTV가 설치된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세상에는 어떤 변화가 없다는, 오직 그 남학생의 집에 CCTV 한대 설치된 것 외엔 아무 변화가 없다는 사실에,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CCTV를 향해 '내가 죽였어'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는 것. 


이 얘기를 한 후 타카쓰키는 가후쿠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후쿠씨. 내가 아는 한 오토씬 정말 멋진 여성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알고 있는 건 가후쿠씨가 알고 있는 것의 백분의 일도 안 되겠지요. 그래도 난 확신을 갖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멋진 사람과 20년간 함께 살았던 걸 가후쿠씨는 감사해야 한다. 그렇게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상대도 아무리 사랑하는 상대도 타인의 마음을 그대로 보는 건 무리죠. 자신이 괴로워질 뿐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 여하에 따라 제대로 엿볼 수는 있을 겁니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마음과 능숙하게 솔직하게 타협해 가는 것 아닐까요? 진실로 타인을 보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깊이 똑바로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연극 준비는 잘 되었고, 공연 며칠 전 다들 기분 좋게 무대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는데 경찰이 찾아와 다카쓰키를 찾는다. 며칠 전 공원에서 싸움이 있었고 다카쓰키가 때린 상대방이 병원에 입원했다가 어제 사망했다는 것이다. 다카쓰키는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매스컴은 다카쓰키의 일로 시끄럽다. (사실 그는 미성년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이 탄로 나 TV에서 퇴출되어 연극배우로 재기하고자 했었던 것이다) 연극의 주인공인 바냐가 갑자기 증발하게 되니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데 주최 측에서는 가후쿠가 바냐 역을 연기해봤으니 맡아서 하면 어떠냐고 제안하고, 가후쿠는 바냐를 연기할 때 느껴지는 고통을 감당하기 힘들어 결코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공연을 취소해야 하는 기로에서 이틀의 생각할 시간을 얻은 후 와타리에게 어딘가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한다. 와타리는 당신의 차보다 더 좋은 공간이 어디 있겠느냐며 자신이 운전을 하겠다고 한다. 그들은 와타리가 살았던 홋카이도까지 가후쿠의 차로 다녀오기로 한다. 


가후쿠는 와타리의 옆자리에 앉아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한다.


오토가 죽던 날, 외출하는 자신에게 '이야기 좀 하자'라고 말했을 때 이전과는 다른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오토가 어떤 말을 할지 두려워, 집에 돌아가지 않고 집 주변을 빙빙 돌다가 들어갔더니 오토가 쓰러져 있었다. 구급차를 불렀지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이어서 와타리가 이야기한다.


난 엄마를 죽였어요. 산사태가 났을 때 기어서 겨우 빠져나온 후 잠시 반파된 집을 바라보고 있는데 다시 토사가 밀려와 완전히 집을 덮어버렸어요. 엄마는 토사 속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어요. 왜 엄마를 구하러 들어가지 않았는지, 구조를 요청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엄마가 밉기만 한 건 아니었는데도요.


내가 너의 아버지라면 '네 잘못이 아니야''네가 죽인 게 아니야'라고 말해주고 싶어. 하지만 난 그렇게 말할 수 없어. 난 오토를 죽였고, 넌 엄마를 죽였어.


네.



부서져 눈 속에 파묻힌 와타리의 집 앞에서 그녀는 엄마에 대한 다른 기억을 이야기한다. 좋았던 것을. 그럼에도 엄마를 살리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고. 그리고 오토를 그냥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냐고 가후쿠에게 묻는다. 그리고 가후쿠는 이제야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며 울먹이며 이야기한다.


나는 제대로 상처받았어야 했어.

진실을 지나치고 말았어. 실은 깊은 상처를 받았지. 곧 미쳐버릴 정도로.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계속 못 본 척했어. 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일 수 없었어. 

그래서 난 오토를 잃은 거야. 영원히.

그걸 지금 알았어.

오토가 보고 싶어. 만나면 화를 내고 싶어. 책망하고 싶어. 계속 나한테 거짓말한 걸. 사과하고 싶어. 내가 귀를 기울이지 않은 걸. 내가 강하지 못했던 걸. 돌아와 줬으면 좋겠어. 살아줬으면 좋겠어. 한번 더 이야기하고 싶어. 오토가 보고 싶어. 하지만 이제 늦었어. 되돌릴 수 없어. 어떻게도 못해.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를 계속 기억해. 어떤 형태로든. 그게 계속되지. 나와 너는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

살아가야 해. 괜찮아. 우린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가후쿠가 바냐 역을 맡아 연극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얼마의 시간이 흘러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와타리는 한국에서 살고 있다. 마트에서 장을 보며 한국말을 꽤 능숙하게 할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주차장에서 와타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차는 바로 가후쿠의 그 빨간색 사브다. 그리고 유나와 윤수가 히로시마 집에서 기르던 개(와타리는 그 집에 방문했을 때 그 걔를 예뻐했다)가 그 차에 타고 있다.

와타리는 개의 턱을 어루만지고는 웃으면서 운전을 한다. 자신이 편히 쉴 수 있는 어딘가를 향해서.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글이 재미있고 개성 있으면서도 술술 잘 읽히는 까닭이 크지만 그것보다 더 작가의 생각, 주제의식이 내가 추구하는 바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거대담론보다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고, 그럼에도 그 안에 사람과 인생에 대한 통찰이 있기 때문에 좋다. 

영화를 본 후, 하루키의 원작 소설도 읽어보았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인 (파란색으로 표시) 다카쓰기의 대사와, 홋카이도에 도착해 울먹이며 말했던 가후쿠의 대사. 그중 전자는 소설 속 대사를 그대로 옮겼고, 후자는 영화로 각색하면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집어넣은 것이다. 


다카쓰키가 가후쿠에게 저렇게 말을 했을 때, 이미 가후쿠가 자신과 오토와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자신은 이런 여자를 아내로 두고 20년을 함께 산 이 남자가 너무 부러운데 얘기를 해 보니 이 남자가 모르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 그리고 오토의 그런 행동을 그저 받아들이면서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 말하는 걸 보니, 그런 가후쿠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남자는 정말 괜찮은 걸까? 

그래서 가후쿠는 다카쓰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이 남자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의 뒷부분을 알고 있고, 자신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으므로. 


나 자신을 할퀴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곁에 두려고 하는 행위는 반드시 부작용을 가져온다. 네가 내 곁에 있어야지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너로 인해 상처받는 것까지도 감수하는 것. 그런 맹목적인 사랑은 아이러니하게도 상대방의 마음이 멀어지게 만든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사랑이야말로 일방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동등함과 진솔함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다. 동등함과 진솔함이야말로 내가 상대방에게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사랑을 하면서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매 번 따지고 드는 것도 피곤한 일이고, 그 역시 사랑의 속성과는 먼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상처받았음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왜 그렇게 했냐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오토는 가후쿠가 그렇게 물어주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녀 역시 깊이 상처받았음을, 그것이 아물지 않았음을.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남편과 울면서 모두 털어놓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책에서는 오토가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와타리의 삶이 영화처럼 가후쿠와 같은 분량을 갖고 그려지지는 않는다. (책을 보니 각색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 나와 같은 아픔을 갖고 있었다는 설정은 솔직히 작위적이긴 하지만 극영화 안에서 이해받을 수 있는 수준이란 생각도 든다. 가후쿠가 운전대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 계기도 책과 다르고, 와타리와 히로시마에서 만나는 것도 다 영화의 설정이다. 다카쓰키를 자기 연극에 출연시키는 것도, <바냐 삼촌>의 내용이 많이 첨부되는 것도 감독이 새롭게 설정한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맛볼 수 없는 것이 책 안에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하마구치 감독이 공들여 만든 영화 속 설정이 책을 본 후 더 마음에 든다. 

가후쿠와 와타리는 각각 아내와 엄마를 죽게 만들었다는 무거운 죄책감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가후쿠는 살아있으면 자신의 딸 나이와 같은 와타리를 안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우린 살아가야 해. 우린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체호프의 <바냐 삼촌>에서도 바냐는 아직 십여 년이나 더 살아가야 하는 것에 괴로워한다. 삶이 고통스럽다. 그러나 소냐가 바냐를 뒤에서 안으면서 인생이 그렇게 모순 덩어리이고 고통이 가득하다고 해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을 회피하고 자기 마음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가후쿠는 바냐를 연기하는 것이 힘들었던 것이다. 


운전대를 맡기는 것조차 싫을 만큼 애착이 있는 자기의 차를 그는 '와타리'에게 선물한다. 와타리는 가후쿠와 유나, 윤수 부부가 가장 아끼는 것을 선물로 받아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있기에 마음에 큰 돌덩어리를 안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살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을 선택했다면 그것이 곧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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