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르슬라 Jun 27. 2022

추억은 방울방울 (1991)

- 내가 좋아하고 있는 것 안에 다가올 사랑이 숨어있다.

감독 : 다카하타 이사오

출연 : 이마이 미키, 야나기바 토시로, 혼나 요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지브리 애니메이션. 미야자키 하야오가 연출한 작품은 아니지만 제목부터가 오랫동안 수많은 곳에서 리메이크된 작품이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일까 궁금했었다. 우연히 지브리에 대한 얘기가 나왔고, 그 김에 한 번 봐야지 하고 보았는데 주인공 타에코의 추억과 그녀의 남다른 농촌 사랑이 연결되는 부분이 좀 어색하긴 해도 나름대로 재미있게 잘 보았다. 60년대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역시 '라떼 세대'에 속하기 때문에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애니메이션 치고는 119분, 2시간의 러닝타임이라 좀 길게 느껴지기는 한다. 그래도 '그래 옛날엔 저랬지. 그땐 저런 게 가능했었구나. 세상이 진짜 많이 변했네. 하면서 나도 추억에 방울방울 젖어들면서 봤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학교 생활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이입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였다. 


27살의 직장인 타에코가 1968(?)년, 자신의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 5학년 때를 회상하며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현재의 타에코는 보통 또래의 여자들과는 다르다. 휴가를 얻어 해외여행을 가는 대신 농촌 봉사를 떠난다. 자신이 농촌(시골)에 애착을 갖게 된 계기로 '방학 때 놀러 갈 시골'이 없었던 것 때문이 아닌가 스스로 이유를 추측해보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야마가타 역으로 그녀를 데리러 온 사람은 토시오라는 청년으로 그녀와 비슷한 또래의 귀농 총각이다. 도시에 본가가 있는 것은 아니고 야마가타에서 자라서 장성해 외지에 나가 일하다가 아버지가 계신 이곳에 내려와 농업에 새 기술, 새 방향을 접목해 활성화시키려고 애쓰는 청년이다. 분명한 뜻을 가지고 귀농했다고 해도 현실은 만만치 않고, 농촌 총각의 외로움도 사라지진 않는다. 일부러 휴가를 내 농촌을 찾는 도시 여성에게 관심이 생기는 것은 토시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타에코는 어려서부터 둔한 편에 속했다. 어떤 남자아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전해 들어야 아는 것이고, 잠깐 짝꿍이었던 다른 남자아이의 마음도 토시오와 대화하면서 그제야 깨닫게 된다. 반 여자애들이 관심 있는 것, 그렇게 생각하는 것, 유행하는 것 모두 누군가 말해줘야 알고, 주도적으로 뭔가를 만드는 게 아니라 따라가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영화를 보는 우리들, 영화 속 인물들은 토시오가 타에코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다 알지만 정작 본인인 타에코만 모르는 조금은 답답한 전개가 이어진다. 더구나 타에코는 자신의 감정에도 매우 둔한 편이어서 토시오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어떠한가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어른들은 젊은 여자애가 일부러 시간을 내 농촌에 와서 꾀도 하나도 안 부리고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맙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그래서 고맙다고 표현한 것뿐인데 타에코는 오히려 이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농촌에 와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지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니, 이 젊은 아가씨를 지켜보던 가장 어른인 할머니는 덥석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 토시오와 결혼하지 않을래? 토시오와 결혼해서 여기서 살지 않을래?"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타에코는 갑자기 몰아붙이는 할머니 때문에 혼비백산해 집을 뛰쳐나가고, 때마침 비가 억수로 내리는데 그 길을 토시오가 지나간다.(운전하면서) 하필 그를 만나게 되다니. 하지만 이렇게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차를 타지 않겠다고 고집 피우는 것이 더 이상한 일. 그녀의 그의 차에 타 옆자리에 앉는다. 



이런 상황인데도 타에코는 주절주절 자신의 이야기를 편하게 한다. 그렇지만 아직 그녀의 마음을 깨닫는 것은 아니다. 결국 어떠한 답도 주지 않은 채 타에코는 야마가타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도쿄로 돌아가는 기차를 탄다. 그런데 기차에 타니까 역에서 자신이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던 토시오를 생각하니까 마음이 이상해진다. 그러면서 야마가타에서 그와 보낸 시간들, 그와 이야기했던 것들, 그때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내가 이 남자를 다른 사람보다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깨닫는다. 



지금까지는 지나치게 둔하고 그래서 느려 터졌지만 한 번 깨닫고 나니 주저하지 않는다. 타에코는 깨닫자마자 행동으로 옮긴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서 다시 야마가타행 기차에 오른다. 자신을 데리러 온 토시오의 차에 다시 오른다. 




타에코가 5학년이었던 그때는 바나나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과일이었고, 아버지가 출장 다녀오시면서 사온 파인애플을 어떻게 먹을지 몰라 그대로 묵혀두던 때였다. 덜 익은 파인애플을 한 입 베어 물고 맛없는 과일이구나 낙인찍어버렸던 시절이었다. 딸이 연극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아버지는 함께 식탁에 있어도 읽을 신문 다 읽으시고 담배 다 피우시고 '밥' 한 마디 하면 그 앞에 따뜻한 밥공기가 올라오던 때였다. 

생리를 하는 것이 놀림이 되던 때, 남자애들이 마음껏 아이스께끼를 하던 시절..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골려먹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을 지나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지만 그녀가 가진 천성(둔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한다고 자신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아닌 것도 여전하다. (타에코는 5학년 때 모두가 꺼려하던 남자애와 짝이 되었고, 반 아이들은 그 아이를 피하고 놀리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지만 타에코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나가는 대신 기차를 타고 시골로 내려간다. 

내려온 것만으로는 부족했을 것이다. 정말로 타에코는 열심히 일을 도왔고, 힘들어도 행복했다.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왔을 것이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시골을 찾을 정도로 좋아하면서 한 번도 정착해서 살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곁에서 같이 살아갈 누군가를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도시에 있을 때 나이가 찼으니 결혼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고리타분한 얘기 하지 말라며 연애든, 맞선이든 생각이 없던 그녀가 이곳 야마가타에서 만난 남자 토시오와는 스스럼없이 대화하며 좋은 관계를 만들어간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은 100% 우연에 기대어 있다. 모든 것을 알고 계획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여행지에서 만나게 된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여행을 좋아하고, 그 여행지를 좋아하는'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그 만남이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이다. 

사내 연애도 마찬가지이다. 회사 다니는 것이 마냥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내가 그 회사를 선택했을 때는 내가 좋아하는 점이 있어서였을 것이고, 계속 다니고 있는 이유도 어떤 한 가지라도 내가 남아있을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개팅으로 만났다고 해도 그렇다. '누군가와 연애하고 싶은' 그 갈망이 만나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고, 그(그녀)의 외모, 성격, 취향 등 어느 것 하나에라도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다시 만날 생각을 하게 된다.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내가 그것을 좋아하고 있다는 뜻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만남이고, 사랑이든 '이미 내가 좋아하고 있는 것'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미 내가 좋아하고 있는 것'이 계기가 되고 미끼가 된다.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라 더 좋아하게 되고,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좋아하고 있는 것이 더 좋아진다. 


이미 내가 좋아하고 있는 것 안에 다가올 사랑이 숨어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드라이브 마이 카 (202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