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신'이라는 말의 뜻을 알고 싶다면.
감독 : 소유붕
출연 : 왕카이, 장로일, 임심여
감독 : 니시타니 히로시
출연 : 후쿠야마 마사하루, 츠츠미 신이치, 시바사키 코우
히가시노 게이고의 인기 소설을 영화로 만든 2017년 중국판 <용의자 X적 헌신>과 2009년 일본판 <용의자 X의 헌신>을 보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소설을 쓰는 세계적인 작가다. 워낙 다작을 하기도 하고, 술술 읽히는 쉬운 글을 쓰는 분이라 나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꽤 여러 권 읽었다. 그중에서도 이 작품이 <악의>와 함께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까지 포함하면 3개) 그만큼 소설의 구조가 탄탄하고 재미있다. 끝에 가서 진실이 드러날 때는 정말 '와, 이 아저씨 상상력 어디까지?'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책을 재밌게 읽고, 나는 우리나라의 방은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용의자 X>를 보았다. 책에서는 유가와와 이시가미가 대학 동기로 나오는데 유가와는 물리학도, 이시가미는 수학 전공이지만 두 사람 모두 남다른 지능을 가진 천재이다. 그래서 하나의 살인 사건을 두고 서로 두뇌싸움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자 백미인데, 방은진 감독은 유가와 역할을 삭제하고 대신 이 사건의 담당 형사를 이시가미의 적수로 설정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래서 애석하게도 한국판, 일본판, 중국판 세 편 중에서는 한국 버전이 가장 아쉽다.
중국판 <용의자 X적 헌신>-한자 的(적)이 중국어로 '~의'의 뜻을 갖고 있다-은 2017년에 만들어졌는데 유가와 역할을 맡은 (중국판 이름은 '탕촨'이다) 배우 왕카이를 좋아해서, 그가 연기한 유가와가 보고 싶어서 보았고, 일본판에서도 유가와를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맡았기 때문에 두 배우 다 좋아해서 이어서 두 작품을 다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역시 '오리지널'만 한 게 없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이 제일이고 그다음에 일본판 버전이 잘 만들어졌다. <용의자 X>는 기본 설정을 무리하게 변경한 것에 커다란 패착이 있고, 중국판은 '만들어진 느낌'이 일본판보다 강하다. (일본판이 더 자연스럽다) 이시가미가 왜 '살인'까지 했는지가 중요한데 그 부분을 짚은 것도 일본판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이시가미와 하나오카 야스코는 서로 옆집에 산다. 야스코는 중학생 딸을 홀로 키우면서 도시락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야스코는 결혼을 한 번 했는데 이혼하고 전남편이 찾을 수 없는 곳에 숨어서 산다. 그만큼 그 전남편이라는 작자가 개차반이라는 얘기다. 사실 야스코는 술집에서 일했었다. 거기에서 모은 돈으로 도시락 가게도 차린 것이고. 전남편 도미가시 신지는 일도 하지 않고 여인숙에 살면서 도박이나 하며 사는 인생이다. 돈이 떨어졌으니 호구 삼기 좋은 전부인 야스코를 찾는다. 그녀가 일하던 술집에 가서 도시락 가게를 차렸다는 정보를 얻어 그녀를 찾아내고 퇴근하는 그녀의 뒤를 밟아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다시 합치자며 야스코를 괴롭히는 신지. 야스코의 딸 미사토(신지의 딸은 아니다)가 귀가하면서 일은 복잡해진다. 엄마를 괴롭히는 신지의 뒤통수를 스노우볼로 내리친 것. 화가 난 신지가 미사토를 구타하고 야스코는 딸을 구하기 위해 코타츠의 전선으로 그의 목을 감아 조른다. 저항하는 그를 저지하기 위해 미사토가 신지의 팔을 잡고 신지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순식간에 하나오카 집안에 시체가 한 구 누워있게 된 것이다. 옆집에서 평소에는 나지 않던 우당탕 소리가 들리니 이시가미는 그 집 초인종을 누른다. 그리고 자수하겠다는 야스코를 말리며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한다.
이틀 후 강가에서 얼굴이 심하게 훼손되고 손발의 지문까지 불로 지져 지워진 시체 한 구가 발견된다. 태워지다 만 옷이 옆 드럼통에서 발견되고, 바로 옆에서 자전거 한 대도 발견된다. 옷에서는 여인숙 열쇠가, 자전거에서는 한 사람의 지문이 역시 발견된다. 그래서 얼굴도 알아볼 수 없고 지문도 채취할 수 없는 시체의 신원이 '도미가시 신지'로 빨리 밝혀진다. 그리고 피해자의 전부인인 하나오카 야스코가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 수사의 대상이 된다.
피해자의 사망 시간을 전후로 경찰은 용의자의 행적을 물어보지만 야스코의 알리바이가 너무나 완벽하다. 경찰이 물어보는 시간에 야스코와 미사토는 정말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았고 쇼핑을 했다. 그것을 증명해줄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야스코가 정말 범인이 아니라는 말인가.
이 사건의 담당 형사 우츠미 카오루는 수사하면서 여러 번 유가와의 도움을 받았었다. 이번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런데 야스코의 집에 갔다가 이시가미와 마주치고 그와 몇 마디를 나눈 후, 그의 우편물을 보고 그가 유가와의 대학 동기라는 것을 알게 된 카오루가 그 사실을 유가와에게 말하고, 유가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이시가미가 하나오카의 옆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유가와는 이시가미를 찾아가서 어려운 증명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하고 하룻밤을 그의 집에서 보내며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헤어진다. 그리고 그를 다시 찾아가 만나고 하나오카의 도시락 가게에 가서 그녀를 직접 본 후에는 이 사건에 이시가미가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오카는 미인이었고, 유가와가 아는 이시가미의 입에서 전혀 나올 수 없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유가와. 너는 여전히 젊구나.'
그럼에도 야스코가 신지를 죽였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이시가미는 유가와가 이 사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안 후, 두 사람은 서로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대화한다. 신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야스코가 일하던 가게의 사장이 야스코를 찾아와 자신이 너의 남편이 되어주겠다는 뜻을 내비친다. 이시가미는 다른 남자를 만나는 야스코를 지켜보고, 둘이 만나는 사진을 찍어서 협박한다. 그 남자와 만나지 말라고. 또 유가와와 등산을 하면서 폭설에도 산행을 강행함으로 그를 위험에 빠뜨린다. 그렇지만 그를 구해준다.
얼마 후 이시가미는 도미가시 신지를 죽인 사람이 자신이라며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한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유가와는(카오루가 이시가미의 학교를 찾아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함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하 문제입니다. 약간의 함정만 만들었을 뿐이에요.' 이 말을 전해 들은 유가와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야스코의 죄를 뒤집어쓰려는 이시가미가 불쌍해 야스코에게 찾아가 알게 된 모든 사실을 이야기한다. 야스코의 알리바이가 깨지지 않은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강가에서 발견된 시체는 도미가시 신지가 아니라는 것. 이시가미는 신지와 신체 조건이 비슷한 노숙자 한 명에게 돈을 주고 (그는 노숙자들이 모여 사는 강가 다리 아래를 매일 지나쳐 야스코의 도시락 가게에 간다) 신지가 묵었던 여인숙에서 밤이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내라고 한 후(그의 머리카락이나 지문 등을 남기게 하기 위해) 그를 강가로 데려가 줄로 목을 감아 죽이고 얼굴을 훼손하고 손발의 지문을 태운다. 그리고 노숙자에게 입혔던 신지의 옷을 태우다 말고, 새 자전거를 하나 훔쳐 노숙자가 그것을 타고 오게 만들어서 자전거에 지문을 남긴다. 그러니까 죽은 신지는 그날 토막 내 강에 던져 처리한 후, 신지처럼 보일만한 노숙자를 그다음 날 살인한 후, 그를 신지처럼 보이게 해서 야스코 모녀에게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런데 유가와가 나타난 후 이 친구(유가와)는 반드시 진상을 밝혀낼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는 야스코의 스토커로 위장해 그녀를 괴롭히는 전남편을 죽였다고 자백한다. 어차피 죄를 뒤집어쓸 거, 왜 다른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느냐. 그것은 계속되는 심문에 진실을 토로하게 될지도 모르기에, 거짓 알리바이는 얼마든지 들통날 위험이 있기에 자신이 진짜 살인자가 되어서 야스코 모녀도 그 자신도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피해자 부검 후, 살해 시간이 나왔고, 이 노숙자는 신지가 죽은 다음날 죽었기 때문에 야스코 모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들이 묻는 시간에 정말 했던 일들을 말하면 되었던 것이다)
이시가미는 왜 이렇게까지 야스코 모녀에게 헌신하는가.
사실, 이시가미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깊은 절망에 묻혀 자살을 시도했었다. 막 목을 매려고 할 때 이시가미 집의 초인종이 울렸고, 그는 목에 감았던 줄을 빼놓고 문을 연다. 그리고 야스코와 미사토가 활짝 웃으며 이사 왔다며 선물을 주면서 인사를 하는 그 모습에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간 것이다. 이후에도 도시락을 사러 가면 웃으면서 살뜰하게 안부를 물어주는 야스코와 혼자 걷고 있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 인사해주는 미사토 덕에 이시가미는 삶의 의욕을 느낀다. 그녀들을 정말 사랑하게 되고, 그녀들이 준 생명을 그들을 위해 바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헌신 :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것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개념을 펼쳐 놓고 생각한다면 이시가미의 선택이 과연 '사랑인가?' 하고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우발적으로 신지를 죽이고 망연자실한 모녀 앞에 이시가미가 나타났을 때, 야스코는 바로 신고하고 자수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미사토가 엄마가 감옥 가면 나도 따라갈 거라면서 (미사토가 신지의 팔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살해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엄마 없이 혼자 못 산다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난다. 그리고 이시가미는 알고 있었다. 이 살인이 우발적이라는 것을. 이 모녀는 좋은 사람들이고, 이렇게까지 난리가 났을 때는 반드시 상대방의 잘못이 먼저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시가미는 자신이 있다. 이 사건을 완벽하게 무마할 자신이. 이 모녀가 지금처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게 할 방법이 자신의 머리 안에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삶을 준 이 모녀를 위해 드디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 짧은 시간 안에 그는 그 자신이 살인자가 되는 것이 이 모녀를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야스코와 미사토의 행복뿐이다.
유가와는 왜 자신의 친구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고, 그의 상황이 너무나 안타까워 소리 내어 운다. '그 좋은 머리를 왜 이렇게밖에 못쓰니!'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자수한 후 이시가미 앞에 나타난 야스코를 보고 이시가미는 오열한다. '왜, 왜! 그랬어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잘 되는 것, 그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반드시 생각하게 되고, 또 그것을 추구하게 된다. (그렇지 않은 만남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시작은 상대방이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 그것부터다.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이시가미는 야스코와 미사토를 사랑했다. 매일 도시락 가게에 들르고, 누군가의 젊음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들을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들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사랑을 표현하지도 구걸하지도 둘의 삶에 끼어들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내 생각엔 야스코와 미사토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그 삶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기에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 같다. 자신의 사랑이 두 사람에게 필요해 보이지 않으니 굳이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을 생각한다. '두 사람이 함께 계속 살 수 있는 것' 그들이 원하는 그것을 주기 위해 그는 헌신한다.
사실, 사랑의 깊이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나는 잘 들지 않는다. 드라마에서는 흔히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사랑하게 될 때 첫사랑인 경우를 제외하고 이전에 사랑했던 사람과 어떻게 다른지를 드러냄으로 이 사랑의 운명성, 특별함을 표현한다.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랑에 깊고 얕음이 있을까? 그다지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계속 만난다면 왜 그런 것인가?
사랑은 사실 자신의 성숙도와 가장 관계가 깊다. 물론 상대방의 성숙도와도 관계가 깊다. 누군가를 처음 좋아하게 될 때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매력에 끌릴 테지만 사랑이 유지되고 깊어지는 데에는 각자의 내면의 성숙도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다.
이시가미가 야스코 모녀에게 받은 사랑은 '생명'과 같았다. 갑자기 다른 삶이 되었다. 물론 그들은 의도하지도 의식하지도 않았지만 이시가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시가미는 받은 것을 갚는다. 그것은 자기 자신만이 아는 것이다. 아무도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확실하게 받은 자신은 그녀들의 불행 앞에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 안에 있다.' 나에게 없는 것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못하는 것을 줄 수는 없다. 이시가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그 할 수 있음의 모든 것을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내어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사랑이다.
나는 그래서 폐쇄적이고 우울해 보이는 이 남자가 사실은 무척 성숙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받기 위해 준 것이 아니고, 이미 받은 것을 갚기 위해 준 것이고, 흉내만 낸 것이 아니라 모든 걸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은 진실하고, 그의 선택과 행동으로 증명이 된다.
이 모든 것 안에 그의 사랑과 희생과 헌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야스코도 사랑으로 반응한다.(남녀 사이의 애정만이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이 한 일을 모른 척하지 않는 것이다. 그의 헌신을 받고 입 닦지 않는 것이다. 그를 찾아가 그의 얼굴을 보고, 나를 위해 왜 그렇게까지 했느냐고 질문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죄의 값을 치르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물론 이 남자의 사랑 때문에 죄 없는 한 사람이 희생되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고 범죄행위이다. 그가 저지른 일에 합당한 죗값을 반드시 치러야 한다. 우발적이든 그렇지 않든, 일어난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가장 빠르고 뒤탈 없는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기에 야스코가 신고하겠다고 할 때 그렇게 하게 두고 대신 미사토를 잘 돌보았으면 가장 깔끔하게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시가미가 잘할 수 있는 것은 평범하게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다. 그의 두뇌는 문제를 해결하고 증명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다. 그는 그에게 익숙하고 그가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는 고등학교 수학교사인데 학교에서도 '함정'을 파서 시험문제를 내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사람이 평소에 무엇에 익숙하고, 어떤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있는지도 우리의 선택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익숙한 것은 선악을 구별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커다란 구멍이 있음에도 이시가미의 마음만큼은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영화)을 로맨스로 분류하고 싶다. 그리고 사랑의 다른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헌신'이라고 믿는다. 서로에게 끌리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넘어서서 나의 몸과 마음을 바쳐, 너를 위하는 것이 곧 우리를 위함임을 알고 있는 힘을 다하는 것.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것이야말로 사랑인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