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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Aug 05. 2022

와호장룡(2000)

- 무엇을 쥐고 무엇을 놓아야 하는가.

감독 : 이안

출연 : 장쯔이, 주윤발, 양자경, 장첸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35위에 랭크된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을 보았다. 전에 TV에서(아마도 EBS) 해줄 때 보았고 그때도 참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다시 보면서 정말 너무너무 재밌었고, 진짜로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안 감독의 다른 영화 <색계>와 비교해볼 때 그가 배우를 몰아붙이는 스타일이 이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구나 했다. 이안 감독의 영화를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굉장히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찍는 분이라는 생각만 했었는데 스탠리 큐브릭 감독님이 떠오를 정도로 굉장한 완벽주의자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또 이 영화 속 양자경 배우님(수련 역)을 보면서 <센스 앤 센스빌리티>의 엠마 톰슨과 너무 비슷하다고 느꼈는데 알고 보니 <센스 앤 센스빌리티>도 이안 감독님 작품이었다는.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배우 주윤발의 연기를 다시 볼 수 있어 좋았고, 장첸 배우의 필모는 그야말로 나의 취향저격이구나 하면서 감탄했다. 그리고 2000년의 어린 장쯔이 배우님을 보면서 '대단하다' '대성할 수밖에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영화의 배경은 청나라 시대이고, 아직은 '강호'와 '인간 세상'이 구분되어 있어, 무공을 연마함으로 도를 깨닫고 자유롭게 사는 삶이 강호의 삶이라면 세상의 법과 관습 아래에서 규격화된 그러나 보다 안정적인 삶을 인간 세상의 삶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무백(주윤발)은 아직 강호에 속해있고, 수련(양자경)은 강호에서 살다가 지금은 땅에서 살고 있고, 소룡(장쯔이)은 땅에 속해 살아가고 있다. 즉 아버지가 정해준 남자와 정해준 때에 결혼해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이무백과 수련은 오랜 기간 무공을 연마하며 우정을 쌓아온 사이이다. 다만 수련의 옛 정혼자가 무백의 친구였고, 그가 죽으면서 사이가 애매해져서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표현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보낸 상태이다. 무백은 수련 중 스승님이 얘기하지도 않은, '득도'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깊은 단계에 들어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슬픔'을 느낀 후, 강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자 한다. 그런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400년이나 된 그의 검 '청명검'을 다른 사람(철 대인)에게 전해달라고 수련에게 부탁한다. 때마침 북경에 갈 일이 있어 수련은 그의 검을 들고 철 대인의 집을 방문하는데 옆 집에 사는 옥 대인은 나라의 고위 간부로 고명딸 소룡이 혼인을 앞두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철 대인의 집에 방문한 소룡을 보고 수련은 그녀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심경이 복잡하다. 



무백에겐 강호의 삶을 정리하면서도 한 가지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돌아가신 스승님의 원수를 갚는 일이다. '파란 여우'라는 살인마에게 독침을 맞고 돌아가신 스승의 복수를 아직 하지 못한 것이 그가 해야 할 마지막 미션이었다. 그런데 '파란 여우'는 바로 옥 대인의 집에서 소룡을 돌보는 하인이었다. 

그렇다. 소룡은 파란 여우의 제자였고, 가진 재능이 워낙 출중한 데다 타고난 기질 또한 막무가내인 면이 있어서 꽤 다루기 어려운 무공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아직 어린 데다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자신을 부모의 삶에 희생시킬 생각도 없었다. 철 대인의 집에 갔을 때 무백의 청명검이 그 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소룡은 검을 훔친다.  그래서 소룡이 무백과도 얽히게 되는 것이다. 

소룡과 겨뤄본 후 무백은 소룡을 제자로 삼겠다고 한다. 수련은 무백이 소룡에게 흔들릴까 봐 내심 불안하다. 소룡은 무백이 강자인 것을 알지만 호락호락하게 그의 제자가 될 생각이 없다. 사실 소룡은 과거, 아버지가 발령받은 지역으로 가는 길에 '소호'(장첸)라는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이렇게 도망치는 대신 자기 삶에 대한 계획을 정립하기 위해 다시 그를 떠난다. (소호는 그녀를 꼭 다시 찾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이렇게 떠밀려 혼인을 하는가 했지만 소룡은 계획이 있었다. 어렵게 그녀를 찾은 소호를 소룡은 밀어내지만 소호는 소룡을 포기하지 못해 혼인날 난리를 피우고, 여기서 무백과 수련이 개입하게 되면서 그를 진정시켜 일단 무당산으로 보낸다. 소룡을 찾아 청명검을 다시 찾고 그녀를 설득해 소호에게 보내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청명검을 가진 소룡은 만만치가 않다. 그만큼 청명검은 대단한 검이다. 여기저기 다니다가 닥치는 대로 싸움을 하고 수련에게 찾아온 소룡. 소룡은 수련이 자신을 이해해 주었으면, 그냥 잠시 쉬었다 가도록 내버려 두면 좋겠는데 수련은 천방지축인 소룡에게서 청명검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 무공으로 따지면 수련이 소룡보다 한 수 위이지만 청명검 때문에 소룡을 제압하기 힘들다. 결국 수련을 다치게 하는 소룡. 그때 무백이 나타나 소룡을 데리고 나간다. 그리고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그 유명한 씬, 대나무 무협 씬이 시작된다. 제 아무리 청명검을 손에 쥐었더라도 무백은 차원이 다른 무림고수이다. 무백은 조용히 그녀를 타이르려고 하지만 도대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리고 소룡이 무백의 손아귀에 잡히려는 찰나, 소룡의 스승인 파란 여우가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사라진다. 

파란 여우는 지금으로 따지면 가스라이팅의 대가다. 사실 무백과 같이 무공을 수련했던 파란 여우는 자신보다 항상 앞서는 그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백의 스승을 죽였던 것이다. 그녀는 순진한 아이 소룡을 꼬드겨 '자유'에 대해 설파한다. 너에겐 갇혀 사는 삶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너는 타고난 무공의 재능이 있다고, 너에겐 내가 꼭 필요하다고. 우리 둘이 함께라면 언제까지라도 행복할 수 있다고. 

그러면서 자기 옆에 묶어두기 위해 미향을 써서 소룡을 중독시키고, 중독된 소룡이 무백을 유혹해도 무백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무백은 수련에게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전했다) 무백이 걱정되어 찾아온 수련 앞에서 무백은 파란 여우가 쏜 독침(스승을 죽였던 것과 똑같은)에 맞아 죽는다. 죽기 직전 마지막 남은 숨을 끌어모아 그는 수련에게 다시 한번 고백한다. '너를 정말 사랑했는데 그동안 표현하지 못해 후회가 된다'라고.



수련은 소룡을 죽이는 대신 '너의 마음을 진실하게 들여다보라' 고 말하며 소룡을 무당산으로 보낸다. 그곳에서 소룡을 기다리고 있던 소호와 재회하지만 소룡은 소호의 사랑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보다 넓은 세상에서 어떠한 제약 없이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그 높은 곳에서 땅을 향해 비행한다. 




이 영화가 2000년 영화이고, 개봉 당시 본 것은 아니라고 해도 10여 년 이상은 훌쩍 지난 시간을 나는 보내왔다. 그동안 나의 마음도 생각도, 보는 눈도 많이 달라졌다. 나이가 들었다는 말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래서인지 처음 봤을 때는 장쯔이가 연기한 소룡이 무척 꼴 보기 싫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 보면서는 그렇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어리니까 저럴 수도 있지 싶었다. 그리고 영화 속 액션씬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입이 쩍 벌어졌다. '어떻게 저렇게 찍었지?' 감탄을 하면서 봤다. 영화 초반 수련이 청명검을 훔쳐 달아나는 소룡을 쫓으며 벌어지는 무협 씬, 티베트에서 말을 타고 달리며 싸우는 액션씬, 청명검을 되찾기 위해 수련의 집에서 벌어지는 소룡과 수련의 두 번째 액션씬, 그리고 무백과 소룡의 대나무 숲 액션씬. 이렇게 아름다운 무술 씬을 만든 원화평 감독도, 그걸 표현해낸 배우들도(액션 배우 포함), 이런 퀄리티로 영화를 만들어낸 이안 감독도 정말 정말 대단하다. 

영화의 내용은 어렵지 않다. 무백의 대사 속 동양철학이 살짝 보이기는 하지만 ('손을 쥐면 아무것도 없지만 손을 펴면 모든 것이 있다.') 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수련과 무백의 오랫동안 서로 사랑하면서도 표현하지 못하고 결국 이루어지지 않은 그 사랑 때문에 애잔함이 흐르면서도(이 사랑이 이루어져야 할 텐데, 영화를 보며 계속 바라게 된다) 중간중간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는 극한 경지의 무협 씬이 어우러져 너무나 재밌으면서 아름다운 영화가 만들어졌다. 영화를 보면서 '와, 이 영화 정말 대단하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를 나는 많이 봐왔지만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는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내가 만약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이 영화 '와호장룡'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나로 하여금 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를 떠올리게 한다. 주제의 측면으로는 복잡하지 않지만 영화를 표현해낸 방식이 너무나 대단해서 재개봉을 한다면 반드시 극장에 가서 보고 싶다. (극장 개봉 다시 못 본 것이 너무 아쉽다) 그만큼 많은 분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이다.




영화는 무백과 수련, 소룡이라는 세 인물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후회를 남기지 않을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무백은 평생의 삶이 후회라는 말을 남기며 숨을 거두고, 수련은 아직 삶이 남아있으나 오랫동안 사랑한 사람의 마음을 어렵게 확인했으면서도 그 없이 혼자 살아야 한다. 가장 어린 소룡에게 가장 많은 가능성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부모의 뜻을 저버렸고, 사랑하는 남자의 손도 놓았고, 반평생을 따라온 스승도 잃었다. (파란 여우는 이무백과의 싸움에서 죽는다) 아직 겪어보지 않은 것들, 가보지 않은 세상에 대한 강한 이끌림 때문에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만 그 선택에 후회가 남을지 남지 않을지는 알 수 없다. 


사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무백은 참 멋진 사람이다. 높은 수준의 무공을 연마했고, 인품도 존경받을만하고, 범인들은 상상도 못 할 득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죽기 직전 남긴 말은 '일평생이 후회이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인생이란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기에 힘쓰고, 발견한 후에는 그렇게 살아갈 때 아마도 가장 후회를 적게 남기지 않는 것. 그런 것이지 않을까. 소룡이 아직 진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한 채 소중한 것을 놓은 것은 아닌가 약간의 우려는 되지만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겠다는 그 결심과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마 무백과 수련이 걸은 길이 아닌, 가장 후회가 덜 남는 자신만의 인생의 길을 발견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꽉 쥔 손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손을 펴면 그 안에 모든 것이 있다.'


언뜻 심오한 철학처럼 들리지만 사실, '쥐고 폄'의 의미 또한 깊이 헤아려야 할 것이다. 무백이 죽으면서 수련에게 '후회한다'라고 고백한 것은 쥐었기 때문일까 폈기 때문일까. 사랑하는 여인을 품지 못한 것은 그만의 생각(친구의 여인이었던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이 고백이 우리의 우정을 망치지는 않을까)을 꽉 움켜쥐고 놓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사랑을 꽉 움켜쥔 채, 펴서 그녀에게로 날려 보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움켜쥐고 무엇을 놓아야 할 것인가. 무엇을 펼쳐 보내야 모든 것을 내 안에 소유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후회하지 않을까. 이런 고민이 '후회가 덜 남는 삶'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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