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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Sep 02. 2022

기생충 (2019)

-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 그 자신도 누리고 있는 것.

감독 : 봉준호

출연 :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최우식, 박소담, 장혜진


우리나라 영화사상 최초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보았다. 그렇다 나는 이 영화를 이번에 보았다. 사람들이 난리난리 치는 것은 꺼려지기부터 하는 엔팁 특유의 반골 기질 + 봉준호 감독이 기존의 작품에서 보여줬던 '계급에 대한 비판' 이란 주제도 별로여서 보고 싶지가 않았는데 최근 코로나에 걸려 와병 생활을 하다가 이 기회에 한 번 봐볼까? 싶어서 봤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보기는 참 재미있게 보았다. 하지만 이런 잘빠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냥반이 왜 '계급'이라는 프레임에만 답답하게 갇혀있는 걸까. 참 안타깝다는 것이 나의 짧은 총평.


영화는 반지하에 사는 기택네 가족과, 평창동이나 성북동 같은 부자 동네에 사는 부자 동익의 가족이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기택(송강호)과 아내 충숙(장혜진), 장남 기우(최우식)와 막내딸 기정(박소담) 네 명의 식구는 누구 하나 직장이라는 것이 없이 피자집 박스 접는 부업으로 끼니를 때우는 정도로 살고 있다. 명문대에 다니는 기우의 친구 민혁(박서준)이 교환학생으로 떠나면서 자신이 하던 과외 아르바이트를 기우에게 넘기면서 두 가족이 만나게 된다. 

장르가 드라마 장르가 아니라 블랙 코미디이기 때문에 현실적이라기보다 매우 과장되어 있다. 나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언더그라운드>가 떠올랐는데, 블랙코미디라는 것도 그렇고, 언더그라운드 = 지하에서의 생활을 그렸다는 점에서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블랙 코미디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 <언더그라운드>나,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 맨>이나 이 영화 <기생충>도 영화 자체를 잘 만들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블랙 코미디 특유의 '과장' 때문에 되려 그들이 꼬집고자 하는 '현실의 문제'가 퇴색된다. 솔직히 기택네 가족 같은 가족이 어디에 있을까? 신체 건강하고, 사람들을 그렇게 속아 넘길 정도로 머리도 돌아가고, 운전에, 집안일에 돈 벌 수 있는 기술도 있는데 왜? 왜? 피자박스를 접는 부업을 하느냐는 말이다. 

이에 대응하는 동익네 집은 능력 있는 영 앤 리치 (대대로 부자인지 자수성가인지는 모르겠다) 박동익(이선균) 사장과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아내 연교(조여정), 고2 큰 딸 다혜와 초3 아들 다송 네 명의 식구가 살고 있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지었던 건축가 남궁현자 쌤이 살던 시절부터 집안일을 맡아서 했던 문광(이정은)을 포함 5명이 살고 있다. 



기우는 동익네 집을 방문하고 연교를 만난 이후, 민혁이 말했던 '심플'이라는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연교는 잘 믿고, 잘 속는 사람이었던 것. 다송에게 그림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한껏 띄워놓고, 기우는 동생 기정을 유명한 미술 선생 제시카로 속여 집에 들여놓는다. 다송의 미술쌤이 된 기정은 다시 자신의 속옷을 벗어 동익의 차에 버려놓고 내림으로 동익의 운전기사를 아빠 기택으로 바꿔 놓는다. 이제 엄마 충숙만 입성하면 되는데, 그 집에는 이미 문광이라는 터줏대감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 다행히 문광에게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알레르기를 결핵인 것 마냥 속여 충숙 역시 동익의 집에 발을 들인다. 여기까지 보면 기택네 가족이 일방적으로 '기생충'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동익과 연교가 하는 대화를 우연히 기택네 가족들이 듣게 되는데 동익이 기택에게 특유의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고. 이 대사 하나로 동익이 '가난한 이들'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가 드러남으로써 지금까지 기택네가 오롯이 떠맡고 있던 기생충의 부정적 이미지를 동익네가 나누어 짊어진다. 

모든 것이 기택네가 그린 큰 그림대로 되어 가고 있던 시점에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사건 하나가 터지는데, 동익네가 다송의 생일 기념으로 캠핑을 간 사이 충숙은 기택, 기우, 기정을 동익네 집으로 불러들여 제 집 마냥 지내고 있었다. 미친 듯이 비가 내리는 밤, 예상치 못한 문광의 방문. 놓고 간 게 있어 찾아왔으니 잠깐만 들여보내 달라는 부탁에 충숙은 그녀를 들이는데 문광이 놓고 간 것이 실은 그녀의 남편 근세(박명훈)였던 것. 남궁현자가 전쟁 나면 도망가려고 만들어 놓은 지하 대피로에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는 남편 근세를 숨겨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비가 너무 와서 캠핑장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어 동익네 가족이 돌아온다는 전화를 받고, 설상가상으로 문광에게 이 넷이 가족이라는 것을 들켜서 문광과 기택네는 서로를 협박하며 몸싸움을 하게 된다. 넷과 둘의 싸움은 불 보듯 뻔한 것. 서로 결코 양보할 수 없고, 어렵게 얻은 직장(?)을 빼앗길 수 없는 기택네는 싸움 도중 문광을 죽이게 된다. 



이런 사건들 때문에 기택네가 피하기도 전에 동익 가족이 돌아오고, 그들은 어쩔 수 없어 거실의 커다란 테이블 밑에 몸을 숨기게 된다. 동익과 연교가 테이블 맞은편 소파에 눕자 (아들 다송이 정원에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고 있었으므로 아들을 보살피기 위해) 테이블 아래 네 명은 숨 죽인 채 어떻게든 빠져나갈 기회만 노리는데, 다행히 다송이 아빠 동익을 호출하자 그 틈을 타 기택, 기우, 기정은 우산 하나 없이 장대비를 뚫고 뛰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집에 와 보니 비가 너무 와서 반지하인 기택네 집은 물이 들어와 난리가 난 것. 

연교는 캠핑이 취소되어 아쉬워하는 다송을 위해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열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오면 좋겠다는 연교의 말에 기택, 기정, 기우도 초대된다. 제시카(기정)가 다송을 향해 케이크를 들고 오면 숨어있던 동익과 기택이 (다송이 인디언을 좋아해 인디언처럼 변장한 상태) 제시카를 기습하는 척하면 다송이 용감하게 나타나 제시카를 구해주는 역할극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숨어서 계획을 얘기하고 있는 그때에 자꾸만 기택이 선을 넘는 발언을 하는 것이다. 급기야 정색하는 동익. 



그런데 기우는 사람들이 모두 파티에 정신이 팔려 있는 틈을 타 싹을 자르기 위해 민혁이 준 수석을 가지고 근세를 죽이려고 지하로 내려간다. 하지만 당하는 것은 기우, 근세는 칼을 들고 밖으로 나오지만 아무도 근세가 나온 줄 모른다. 기정이 케이크를 들고 다송에게 다가가고, 근세가 기정을 칼로 찌르고, 기정이 찔린 것을 보고 충숙이 달려들고, 기택은 기정의 상처를 손으로 누르고, 제시카가 칼에 찔리는 모습을 보고 다송은 정신을 잃고, 충숙은 근세와 싸우다가 그의 옆구리를 꼬치 칼로 찌른다. 이 와중에도 동익은 자기 아들을 병원에 데려가지 위해 차 키를 내놓으라고 기택에게 소리를 지르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 키를 그에게 던지지만, 충숙과 근세의 싸움 때문에 차 키가 근세 몸 밑에 깔리는데, 동익이 키를 꺼내면서 얼굴이 바들바들 떨리며 코를 움켜쥐며 '냄새'라고 하는 모습을 보자 기택은 근세가 들고 나왔던 칼을 들고 동익을 찌른다.

기우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지만 기정은 죽는다. 기우와 충숙은 재판을 받고 죗값을 치른다. 다만 그 사건 이후 실종되어버린 기택의 행방이 묘연할 뿐이다. 기택은 근세가 살고 있던 지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근세가 모스 부호로 외부에 신호를 보냈던 것을 기억한 기택은 언젠가 기우나 충숙이 봐주지 않을까 하며 플래시 불빛을 이용해 자신이 이 집 지하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린다. 기우는 아버지 기택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난 후, 돈을 많이 벌어 그 집을 사겠다고 약속하는 편지를 쓴다.




영화는 기택과 동익의 집으로 상징되는 소위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선명하게 대비하여 보여준다. 어느 한 편에 서서 편드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이 영화가 매우 혁명 지향적으로 보인다. '계급'이 존재하는 것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므로. 

그런데 본질적으로 '계급'은 왜 존재하는가? 봉건시대를 지나 제도적 신분 사회는 사라졌지만 인간의 역사에는 항상 계급이 존재했다. 물론 지금도 존재한다. 그러면 왜 계급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대는 그야말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물질만능주의 시대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미디어에서 외모로 사람을 놀리고, 등급을 매기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준다. 아이들의 꿈이 '건물주'가 된 세상에 살고 있다. 많은 돈으로 사고 싶은 것 사고, 가고 싶은 데 가면서 사는 인생이 가장 멋진 인생이 되어버린 것이다. sns는 '나 이런 거 먹었어. 나 이런 데 갔어. 나 이만큼 능력 있어'를 뽐낼 수 있는 학예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살면서 왜 이런 사회를 욕하는 것일까. 


왜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이 인기가 있고, 그런 사람들이 연예인이 되어서 돈을 많이 버는 걸까? 이유는 단순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은 무엇이 아름다운지 순간적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것에 마음을 준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돈만은 부자들은 쉽게 악인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에 맞서는 가난하고 착한 이들의 외모는 그 악한 부자를 홀릴 만큼이나 위력적이다. 외모가 그만큼 힘이 있다는 말이다. 외모만큼 계급이 나누어지는 것이 없다. 그러면 잘난 외모를 타고 난 사람들도 부자 부모를 갖고 태어난 이들처럼 타도의 대상이 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재능은 어떠한가. 머리가 좋은 사람과 덜 좋은 사람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예술적인 재능이나 신체적인 재능도 마찬가지이다. 아예 태어나면서부터 남보다 다른 월등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도 타도의 대상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자, 그럼 '의지'의 영역으로 들어가 보자.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의지를 가지고 태어나는가? 김연아 같은 의지는 하늘이 내린 의지이다. mbti만 봐도 알 수 있다. 애초에 의지가 강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노력을 얼마만큼 할 수 있느냐도 재능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든 봉준호 감독, 또 주연 배우 송강호 배우를 생각해 보자. 봉준호 감독을 특급 감독, 명감독이라고 부르는 게 무리가 있는가? 송강호를 특급 배우, 국민 배우라고 부르는 게 이상한가? 그렇지 않다. 확실히 감독들 사이에도 실력으로 만들어지는 계급이 존재하고, 배우의 세계도 똑같다. 봉준호와 송강호가 받는 개런티가 다른 감독이나 배우들과 같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봉준호 감독이 자신이 갖고 있는 재능과 후천적 노력으로 지금의 입지를 얻게 된 것을 누구도 욕하지 않고, 욕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역시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는 피라미드 꼭대기 층에 속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같이 작품 하자고 하면 배우들이 줄을 설 것이고, 그만큼 봉 감독은 자신이 원하는 배우들과 일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투자를 받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봉준호 감독이기 때문에 투자를 받는 것이 쉬운 것이다. 그가 누리는 것들은 그가 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누리고 있는 것이다. 영화감독이라고 다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어 있고, 잘난 것에 매력을 느끼게 되어 있다. 그래서 계급이 생긴다. 그리고 이 계급을 공고히 하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 층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위로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이 피라미드는 견고함을 잃지 않는다. 나도 올라가야지 하는 것이지, 이 피라미드가 사라지길 바라지 않는다. 평등을 바라는 사람들은 위의 것을 바라보면서 같아지기를 바란다. 결코 내가 있는 곳보다 아래쪽으로 같아지길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이 본능대로만 살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인간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계급이라는 게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동물과 매한가지로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죄책감 없이 가지고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내가 어디에 속해 있든지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수가 있다. 봉 감독이 이룬 커리어를 존중하고, 존경하되 봉 감독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므로 그를 숭배할 필요는 없다. 계급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보다는, 어디에 속해있든지 친구가 될 수 있는 사회. 자의적으로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선천적으로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이라면 좀 더 의식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내가 가진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가진 것을 나누면서 영혼을 가진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희열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에너지를 쏟는 게 아니라, 인간과 인생에 대한 본질적인 통찰이 있어 진정성 있는 인간다움이 있는 삶을 추구하면 좋겠다. 또 내가 가진 것에 자족하면 좋겠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질투할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가진 좋은 것들에 감사하고 그것을 갈고닦으면서 정직하게 내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물론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무척이나 이상적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사회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는 인간 본성에 의해 자연스레 생겨나는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나 스스로가 어떤 계급에 속해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런 이상 사회가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를 나는 바란다.




내가 이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가지고 사람들과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 먼저 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좋다면 어떤 부분이 좋고, 아쉽다면 어떤 부분이 아쉬운지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 

예술가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추상적인 생각을 감각적으로 만들어 내보이는 사람이다. 봉준호 감독은 그런 의미에서는 매우 능력 있는 예술가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아주 잘 표현해 냈으니까. 

표현의 측면에서 보면 <기생충>은 흠잡을 데가 없다. 하지만 그래서 더 안타까운 부분도 있다. 이렇게 잘 빠진 영화를 만들 수 있는데, 좀 다른 주제를 가지고 접근해 보면 어떨까 싶다.

최근 박찬욱 감독도 대중과의 조우를 위해 <헤어진 결심>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나는 박 감독의 그런 행보가 무척 반갑다. 그래서 나 역시 그 영화를 재밌게 잘 봤다.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도 이런 식의 변화를 보여주기를, 영화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바라본다.


좀 더 따뜻하고, 우리가 할 수 있고, 그렇게 나아가길 바라는 방향의 영화를 만들어 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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