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삶을 가볍게

잊히지 않는, 영화 속 이미지들

by 쏘쿨쏘영

어떤 이미지가 평생 잊히지 않는 경우가 있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접하게 된 영화나 소설의 경우, 머릿속에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아주 오랫동안 잔상이 남는다.

생각하면 아련해지는 내 젊은 날의 한 시절처럼.


아래 소개할 영화들은 족히 10번 이상은 보았을 정도로 내가 사랑하는 영화들이다.

취향의 차이가 있겠지만 촉촉한 감성이 필요할 때, 혹은 아름다운 로맨스가 그리울 때, 그냥 울고 싶을 때, 또는 아름다운 영상미의 영화가 그리울 때 이 영화들을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추천해 본다.

나의 뇌리에 남은 결정적 장면들 위주로 소개하겠다.


• ‘오만과 편견’

‘Embarrassing Position.’ 당혹스러운 위치. 영미 문학계에서 영국 소설가 제인 오스틴을 일컫는 말로, 낭만주의도 아니고 반 낭만주의도 아닌,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간성과 인물들의 관계에 대한 탁월한 묘사를 시골 중산층의 이야기를 통해 담아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듯이 섬세한 필체로,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잔잔한 스토리에 세밀한 인물 묘사들을 더해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든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로 재해석되어 꾸준히 사랑받는 소설 ‘오만과 편견.’ 그 수없이 많은 ‘오만과 편견’ 영상들 중에서 내가 애정 하는 영화는 2006년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 버전의 ‘오만과 편견’이다. 수십 번도 넘게 본 것 같다.


‘이 사랑스러운 영화를 어떻게 소개할까?’ 하는 생각에 두근두근해질 정도로 보기만 해도 행복한 로맨스 영화.


비루한 삶의 쳇바퀴를 열심히 돌리다 지쳐 우울해질 때,

나는 꼭 이 영화를 본다.

마음을 치유하는 나만의 비타민, 자양강장제 같은 소중한 영화.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이 아름답고 귀엽고 섬세하지만, 그중 압권은 엔딩 장면이다.


영국 어느 시골 마을의 새벽, 어슴푸레 안개가 초원 위를 아직 감싸고 있을 때, 뒤늦게 깨닫게 된 사랑의 감정으로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던 리지는 새벽 산책에 나선다.


그리고 저 멀리 리지와 마찬가지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한 남자, 미스터 다아시(Mr. Darcy)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마치 환영처럼.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마침내 가까이 다가선 두 사람. 이마를 맞대어 서로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마음을 확인한다. 두 사람 뒤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그들을 비추며 영화는 끝난다. 그 아름다운 장면과 그들의 사랑하는 감정을 글로 고스란히 전달해 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이다.


마음이 마른 장작처럼 바싹 메말라 간다고 느낄 때, 무언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함이 당신을 덮칠 때, 이 영화를 봐주셨으면 좋겠다. 비록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아직 사랑은 존재한다고 믿고 싶을 때, 눈빛 하나로도 사랑의 감정을 담아내는 여자와 남자의 섬세한 시선을 보고 싶을 때 이 영화를 추천한다.


잔잔하고 격조 있는 피아노 음악과 심플하면서도 아름다운 레이스 의상들을 보고 즐길 수 있는 것은 영화가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 ‘천장지구’

홍콩영화 추억의 걸작 중 하나이다.

멜로, 로맨스, 누아르, 액션 모두가 들어 있는, 20세기 홍콩 누아르 영화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비장미가 있는 영화로 나는 추억한다.

배우 유덕화, 오천련의 아름다운 청춘 시절을 볼 수 있어 더 아련해진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홍콩 반환의 불안과 서글픔을 그대로 담고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제삿날, 아화 (유덕화)는 옥상으로 올라가 무심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머니를 추모한다.

제사 지방에 불을 붙여 태우며 하늘로 날려 보낸다.

남겨진 재가 바닥을 뒹굴 때, 옥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하이네켄 맥주를 한입 가득 들이켜 허공으로 내뿜는 아화. 그리고 불태워져 떠다니는 지방 종이들.

허공으로 내뿜어진 맥주 입자들이 네온사인 불빛에 반짝이며 허무한 눈빛의 아화를 감싼다.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는 그의 외로움과 불안, 허무함, 비전 없는 인생을 한 장면으로 보여주는 강렬한 이미지다.


또 하나의 결정적 장면은 피 묻은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아화와 조조(오천련) 커플이 오토바이를 타고 홍콩 거리를 질주하는 장면이다.

선홍빛 피에 물든 순백색 드레스가 그들의 순수하고 절박한 사랑을 비주얼적으로 강렬하게 보여준다.

무모했던 사랑의 서사, 미래가 보이지 않는 홍콩 젊은이들의 방황과 격정이 느껴진다.

순수한 사랑의 비극적인 엔딩이 더욱 처연하게 다가왔던 영화이다.

첫사랑 로맨스를 이렇게나 절박하게 보여주는 영화는 흔치 않은 것 같다. 그들이 나눈 순수하고 영혼 충만한 사랑이 부러워진다.


• ‘중경삼림’

또다시 홍콩영화냐고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은 언제나 나에겐 No.1 홍콩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홍콩에 꼭 가보고 싶어 졌고, 영화 속 배경인 충킹맨션과 에스컬레이터 계단에서 페이(왕정문)처럼 포즈를 취하고 사진도 많이 찍어 봤다.


‘중경삼림’의 정서는 이별로 인한 상실과 그리움이다.

물론, 왕가위 감독의 다른 영화 ‘화양연화’보다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사랑이 떠나가고 새로운 인연이 찾아오고…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심장 떨리게 만드는 로맨틱한 장면들과 배우들의 멋진 비주얼이 잘 어울렸던 영화.

좋은 여운이 오랫동안 이어진다.

비타민처럼 상쾌한 로맨스 영화를 보고 싶을 때, 아름다운 연출과 기분 좋은 음악들로 눈과 귀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이별과 만남의 영화, ‘중경삼림’을 추천한다.

비록 지금의 홍콩은 ‘중경삼림’ 속의 홍콩과는 사회적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아쉽지만, 언제나 나의 기억 속 홍콩은 ‘중경삼림’처럼 로맨틱한 여운이 있는 도시이다.


왕가위 감독의 또 다른 명작을 보고 싶은 분들께 ‘화양연화’를 추천한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추억할 수 있을, 깊은 사랑을 나눴던 두 남녀의 이야기.

아련함과 안타까움의 정서.

두 배우의 매혹적인 비주얼과 분위기가 압권이다.

아름답고 아련한 사랑 이야기. 별말 없이도 감정이 온전히 전해지는 눈빛과 표정들.

넋을 놓고 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