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타파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스스로의 선택일까. 그렇지 않다. ‘늑대소년’이 갑자기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개인의 취향은 각자에게 새겨진 역사다.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 어떤 단어를 택하든, 경험해온 이데올로기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다.
“영남지역의 패권주의”
“호남지역의 피해의식”
이런 표현을 거침없이 쓰는 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 그렇게 새겨졌기에 가능하다. 시작부터 구조화하고 세월로 미장한 프레임을 넘어서기는 힘에 부친다. 때문에 나이 들수록 보수적인 것은 자연스럽다. “요즘 애들은…”하며 혀끝을 차는 버릇은 어느새 말꼬리에 붙어 있게 마련이다.
편견이란 강적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쉬운 선택이다.
‘친일과 독립운동, 어느 편에 설 것인가’ 같은 무거운 역사적 고뇌는 여기 없다. 부지불식간 몸에 스미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무비판적으로 선입견을 따르는 것. 쌓아온 편견에 복종하는 행위. 두툼한 고정관념의 유리벽 안에서 세상과 타인을 향해 지적질하는 오만함. 그런 얼굴이 언뜻 비칠 때면 거울을 보기 민망하다. 죽을 때까지 ‘꼰대’이고 싶지 않다.
매거진 제목을 고민하다 ‘경건한 문사철’ 로 정했다. ‘경건’은 경제와 건강의 앞 글자를 땄다. ‘문사철’은 인문학을 대표하는 문학, 역사, 철학을 줄여 많이 사용되는 약어라 함께 썼다. 경제와 건강은 전문 분야고 문사철은 겨우 몇 걸음 뗐다. 그간 ‘익힌 것’과 ‘익혀갈 것’에 대해 공유하려는 순수한(?) 취지로 제목을 정했다. 아니다. 사실 다른 의도를 숨겨뒀다.
체육교육과를 졸업했고 많은 시간을 짐 GYM과 운동장에서 보냈다. 덕분에 중간 사이즈의 반팔을 입으면 팔뚝이 도드라진다. 부러워하는 시선은 늘 혼자가 아니다. 먹물과는 거리가 멀 것이란 선입견이 뒤따른다. 전혀 예민하지 않은 이가 확연히 느낄 정도로 빈번한 일이다.
PB를 가르친다. 자산이 있다면 어떻게 굴릴지, 없다면 어떻게 이룰지 알려주고 관리하는 게 그들의 역할이다. 힘 깨나 쓰게 생긴 사람이 거시경제에 대해 강의하는 것은 어색한 풍경이다. 그런 시선이 불편해 전문서적을 놓지 않은 덕에 보유한 자격증을 세려면 양 손이 필요하다.
고객의 자산을 늘려 재정적 자립을 단축시키는 일이다 보니 주된 강의의 대상은 ‘돈’이다. 노골적으로 돈에 대해-합법적으로 증식하는 것- 얘기하는 것은 왠지 인문학과는 거리가 느껴진다. 철학을 논하려면 ‘새우깡에 깡소주’를 마시며 가난을 곱씹어야 할 것 같다. ‘문사철은 빈곤한 삶’이란 불편한 패러다임은 누구의 작품일까. 누구에게 유리할까.
기실 역사 속에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일하지 않고 살았다. 과연 생존의 문제를 안고 흔들림 없이 철학을 논할 수 있는 걸까. 후원자의 기대에 반하는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예술가가 몇이나 존재했던가. 지원해주는 기관을 비판하는 글쟁이가 존속할 수 있을까.
인문학을 접하며 이치를 깨닫고 구조화된 프레임을 부수는 것은 기득권 층에게 불편한 일이다. 불합리한 부분에 대해 근거 있는 비판을 하는 것은 사사건건 어른의 말에 불복하고,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버릇없는 아이’로 읽힌다.
결국 생존할 수 있어야 불필요한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의도하지 않은 청빈은 미덕이 아니다. 본받고 싶은 인격을 가진 어른이라면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다수에게 이롭다. 탁자 위에 올려진 공론화한 물욕은 그 밑에 숨겨진 지저분한 성욕보다 건전하다.
경제적 자립, 건강한 육체, 인문학. 서로의 거리는 멀지 않다. 함께해야 괜한 미혹을 없애는 의지가 된다. 문학, 역사, 예술, 철학, 과학… 입문만 하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긴 과정마다 발견되는 행복을 누리려면 기초체력과 기본 재력은 필수다. 다양한 자양분이 더 큰 경제력을 주거나 건전한 몸짓으로 유도하기도 한다.
‘경건한 문사철’을 고루 탐닉하자. 경제, 건강, 인문학. 어느 것 하나 소홀해지지 않도록 편견의 프레임을 걷어내고 내 안에 머물러있는 ‘꼰대’에게 돌을 던지자.
그렇게 골리앗을 쓰러뜨리자.
*삽화: '워니'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