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y Jun 17. 2016

나는 더 섹시한 아내를 꿈꾼다.

모성애의 발명

나는 섹시한가?


건강한 몸을 가졌다.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진행형이다. 입시체육의 혹독함을 경험했거나, 엘리트 체육의 초인적 훈련을 경험하고 은퇴한 이들이, 멋진 몸을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드문일이다. 바라기 미안한 일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무엇이든 극단적인 추구는 몸도 마음도 멍들이기 마련이다.


스스로 전공을 선택했다. 공부를 좀 하던 막내가 고3을 앞두고 체육과 진학의 뜻을 밝혔을 때, 실망한 모친은 몸져누웠다. 프랑스인처럼 쿨한 성격이시라 일주일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고, 당시 가장 비싼 스포츠 매장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질러주셨다. 대신 진행하던 모든 공부 지원은 쿨하게 끊으셨다. 재수 없는 얘기지만 성적은 여유가 있어서, 1년 동안 미친 듯이 운동만 했다. 대학에 합격했을 때 가장 기뻐한 이는 당연히 엄마였다.

살림이 어려워진 후 등록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첫 직업이 ‘트레이너’였다. 아니었다면 지금의 습관도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천성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클리셰 cliche는 가끔 그 기량을 뽐낸다.


바쁜 현대인들이 현직 트레이너와 같은 몸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권장할 일도 아니다.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그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지, 성실함나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다. 근면에 대한 칭찬을 강요할 수 없듯, 게으름에 대한 비난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폭력에 가깝다. 사랑해서, 걱정돼서 하는 말이나 행위가, 실상 상대가 아닌 본인의 욕구에 충실한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


‘모성애의 발명’이라는 책을 만났다.
평소와는 달리 아내에게 강권했다.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읽었으면 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엄마’의 본성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 이후 주어진 것이라는 내용이다. 근거가 명확하고 통찰력이 뛰어나다. 번역 또한 훌륭해서 쉽게 읽힌다. 다만 꼰대들은 많이 불편할 것이다. 정도를 가늠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결혼을 앞둔 후배들에게 해온 충고가 있다.


 가사일은 보통 허드렛일이다. 아내가 무릎꿇고 바닥을 기며 걸레질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초췌한 하녀가 아닌 그림책속의 공주이기를 바라지 마라.

맞벌이라면 가사노동, 육아, 양가에 대한 방문 및 지원 등 모든 것은 50대 50이 출발선이다. 아내보다 돈 좀 더 번다고 유세떨지마라. 꼭 밖에서 대접 못받는 인간들이 집에서 왕노릇하고 싶어한다.

결혼하면 엄마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딸을 낳는거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결혼 전날까지 딸로 살아왔고 너만 아니었음 계속 편하게 살았을 것이다. 어리광은 세상에서 오직 너의 엄마한테만 먹힌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그저 ‘평등주의자’ 일뿐이다. 평등이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똑같이 나누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에게 같은 룰을 적용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동일업무에 대한 한국 남성과 여성의 연봉차는 100대 60이다. ‘작가 정희진’의 말에 적극 동의한다. 더 이상의 말은 모두 사족이다.


그렇다면 불평등의 문제는 남성 개개인의 부족한 인식을 개선하면 해결될까?

매일 야근하고 주말도 없이 일한다. 가끔 쉬는 짧은 시간에 육아전쟁을 지원한다. 그러고도 잘 버티면 50대다. 백세까지 사는 것이 장수가 아닌 평균이다. 장기 생존이 축복이 아닌 공포인 삶을 사는 외벌이 남편에게, 오직 고통분담만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세계 1위의 저출산율을 견고히 할 뿐, 내일은 없다.


마지막 충고는 확고한 대안이 없다면 가시밭길을 걷지 말고 독신으로 살라는 것이었다. 평범한 남성들 역시 자아실현의 꿈을 버린 지 오래다. 왜 멀쩡한데 결혼하지 않느냐, 결혼했는데 왜 아이가 없느냐, 아이를 위한 최고의 선물은 둘째라는 헛소리까지. 이런 몰상식한 질문들은 정말 궁금해서 하는 것일까. 아님 ‘웰컴 투 헬 Welcome to hell’을 외치며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고 같이 죽자는 것일까.


경제, 재무 쪽 일을 하다 보니 관심 있게 본 동영상이 있다. 후원금이 전혀 아깝지 않은 언론사다.     

                                                                                                                                                          

부동산 불패 신화와 아이 안 낳는 나라

https://www.youtube.com/watch?v=-aHuWTnwPfA


저출산으로 인한 소비의 하락, 경제성장의 둔화, 부동산 폭락 등의 공포를 해결하는 것은 만들어진 모성애를 강요하거나, 커다란 건설사에 특혜를 주어 부동산 투기붐을 일으키는  리 없다. ‘증세 없는 복지의 마술’은 실현 불가능하기에 공허하다. 계층 간 문제로 사회적 난관에 부딪힐 것이고 공격적인 논쟁이 오가겠지만, 결국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구조의 개혁, 합리적인 복지에 대한 논의는 토론장에 풀어놓고 공론화해야 할 문제다. 일방적인 부자 증세를 강요하자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세법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전공자가 아니어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언론이 호도하고 덮어두는 것도 결국 시간문제일 뿐이다.


평등을 지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효용면에서 탁월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을 원하는 상위의 포식자들은 자라면서 주입된 구술성에 의해, 혹은 차고 넘치는 물질적 풍요를 소비할 길이 없어서, 나와 내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견고하게 쌓고 엄청난 비용을 지불한다. 여유가 더 있다면 가문이나 기업의 상층부까지 확장될 것이다. 이들이 부와 권력을 대물림하기 위한 재원 일부를 환원한다면 생각보다 많은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과연 어느 쪽이 효율적일까. 독점일까. 극히 일부 자산의 자발적 분배일까. 그렇게 높은 곳에서 왕처럼 외롭게 사는 삶, 남들과 출신이 다르다는 계층의식, 선민의식, 엘리트 의식에 젖어지내는 것이 영원한 행복을 약속할까? 이를 거부하고 각성한 부르주아들이 세상을 바꿔왔다고 역사는 말한다. 현대에도 멋쟁이 부르주아들은 존재한다.     ,  .


인간을 가지고 있는 지식 혹은 자산, 심지어 배경으로 평가해 줄 세우는 것은 얼마나 저열한가. 우리는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삶의 행복을 ‘의전’하는 사람의 수에 의지하는 것은 지독한 연민을 유발한다. 한두 번쯤 재미 삼아 경험해 볼 수 있겠지만 일거수일투족을 관리받고, 아침마다 배설물을 확인하는 의전까지 받는 ‘왕’의 삶이 진정 부러운가. 영화 ‘광해’의 왕, ‘베테랑’의 소시오패스가 그저 부럽기만 한가. 일탈은 평범한 일상이 지배적일 때 더 자극적이다. 매번 더 강한 것을 추구한 결과는 굳이 경험해보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다.



평생을 무용수로 살아온 아내는 출산 이후 몸의 변화를 겪었다. 고맙게도 잘 적응했다. 평생 관리해 온 몸이 10킬로 이상 복부로 집중되는 고통은 상상하기도 싫다. 그 안에 어떤 황금이 들어있다 해도, 새 생명에 대한 기대는 일시적인 아편일 뿐 고통의 근원을 없애진 못한다.

본인이 인정할지 모르겠지만, 임신 전 입던 옷이 맞지 않아 괴로워하거나 건강이 걱정될 때만 조심스럽게 운동을 권했다. 제아무리 평등을 외치는 남편이 있어도 새벽에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거나 아이를 ‘의전’하는 것은 주로 엄마의 몫이다. 생전 처음 맞이하는 중차대한 역할이 주어졌는데, 평소처럼 몸을 관리할 마음의 여유가 있을 리 없다. 맞벌이였다면 되려 소홀할 수 있는 부분도 전업 주부였기에 더 강한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모성애의 발명’ 이란 명저를 읽기 전까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정상적인 교육열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 사범대를 졸업했지만 과연 현재의 교육체계에 아이를 맡기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인지 의문이다. 한국의 교육상황에서 아이가 백점 자리 성적표를 받아오기뻐해야 할까. 좋은 대학을 가면 자랑스럽기만 할까. 되려 아무 생각 없는 건 아닌지 걱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

아이를 암기 머신으로 키우고 싶지 않다. 실제로 문자가 존재하지 않던 구술문화시대에는 거의 모든 정보를 암송하며 구전했다. 기억술은 중요한 능력이었다. 뛰어난 기억술사는 맥락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오감을 동원해 기억하기 때문에 자신의 창의적인 생각은 되려 방해가 된다. 우리는 이미 문자문화 속에 살고 있다. 현대의 기억술사는 광대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학문은 정답이 없다.


얼마 전 SNS를 떠들썩하게 만든 초등학생 아이의 우문현답.



이런 답을 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 부모의 과도한 간섭. 세세한 지도가 과연 올바른 교육일까. 깊은 신뢰와 사랑을 표현하고, 아수밖에 없는 행동을 인정하며, 답답하더라도 충분히 기다려주는 것. 그게 전부가 아닐까.

아내에 대한 마음 역시 동일하다. 일생을 무용수로 살아왔다. 엘리트 운동선수의 삶과 다름없었다. 체중관리, 연습 또 연습. 얼마나 하기 싫었을까. 결혼과 동시에 무용단을 나오겠다는 아내에게 더 해야 할 질문은 없었다. 주부를 택했고, 그 의견을 존중했다. 전업 주부인데 18개월 만에 어린이 집을 보냈다고 놀라는 이들,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둘째를 계획하지 않냐고 묻는 이들, 그들의 선의를 모르는 바 아니다. 서로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다. 다르다는 이질감은 늘 불편하지만, 그때마다 입밖에 잔소리를 드러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당신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면.


아내가 자식을 양육하는 것에 숭고함을 느끼고, 적성에 맞아 행복하다면 지속하도록 응원할 것이다. 그러나 본인의 자아실현을 오직 '엄마'라는 이름으로 펼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본인이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현인의 가르침이 절실하다. 만약 아이라면 나만 바라보고, 오직 나의 성공이 본인의 꿈인 부모는, 부담스러울 것 같다. 과도한 희생은 그릇된 기대나 일그러진 집착이라는 보상심리를 낳기도 한다. 부작용이 크다. 아이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다. 부모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 아내가 자신을 더 사랑하고 그 건전한 사랑이 아이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나를 버리고 타인을 사랑하는 삶은 성인의 영역이다.
나는 성녀와 결혼하지 않았다.
아이를 낳기 위한 대리모를 택한 것은 더욱 아니다.


이전보다 섹시한 아내를 꿈꾼다. 그녀는 이미 외적 아름다움을 회복했다. 바라는 것은 육아 이외의 부분에서도 자아를 찾는 것이다. 강요하거나 보채고 싶지 않다. 어차피 하고 싶으면 하지 않을 리 없다. 세상 모든 일은 자발성이 전제다. 한번뿐인 인생이다. 억지로 하는 어떤 것도, 모두 시간 낭비일 뿐이다. 남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동기부여는 스스로 더 섹시해지는 것이다. 육체도 정신도 더 섹시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유가 생기면 이전보다 멋진 자아를 찾아갈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찾지 않으면 또 어떠한가. 어차피 아내는 나의 갈빗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헬조선’을 뒤업지않고 꾸역꾸역 적응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다. 빡빡한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딴생각할 겨를이 없다.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하는 소수는 웃고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들었던 인문학 강의 내용에 깊이 공감했다. 변화를 원하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잉여로운 시간’이다. 자꾸 나가서 놀라고 하는 사람이 가장 진보적인 사람이다. 생각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면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


아내도, 아이도 잉여로운 삶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기 바란다.


삶의 최우선이 부모, 자식, 부부가 아닌 자기 자신이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플레이션을 이기는 투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