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일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일을 얼마나 했는지 나는 모른다.
가난해서 굶어 죽기도 하는 시절을 살았으니 대충 가늠할 뿐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시골에 살면서도 그다지 일을 하지 않았다.
밭일에 관한 기억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터울 많은 언니, 오빠는 결혼, 취업, 학업 때문에 집을 떠났다. 바로 위에 셋째 언니와 나만 남았다.
국민학교 다닐 때 쉬는 날 동네 대부분의 집 부모는 논, 밭에서 일하고 아이들은 놀았지만, 우리 집은 반대였다.
셋째 언니와 내가 밭을 맬 때 아버지는 방에서 주무셨다.
어떻게 하는지 밭 매는 요령을 알려 주고 아버지는 금방 집으로 들어갔다.
일꾼을 얻어 밭을 맬 때도 언니와 내가 함께 있었다. 아버지는 밭에 와서 진행 상황을 한 번 둘러보고 가버렸다.
아버지는 간과 신장이 나빠서 마흔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들었다. 무리를 했는지 아버지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몸이 노랗게 변하는 황달 증상을 본 기억이 있다. 며칠을 앓아누웠다.
약한 몸 탓인지 아버지는 농사꾼보다는 회사 사장님 같았다.
우리 집은 밭과 논농사를 짓고, 방앗간도 운영했지만 아버지는 관리와 감독만 하고, 일은 대부분 자식이 했다.
등교 전에, 방과 후에, 방학에, 졸업 후에, 제대 후에, 결혼하고 나 뒤에도.
논일과 방앗간 일은 아들이, 밭일은 딸이 했다.
아버지는 조금만 피곤해도 몸이 감당을 못하니 자주 쉬어야 했고, 잠을 잤다.
몸이 약한 아버지라고 해도 일하는 어린 자식 마음에는 불만이 자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물건을 정리하다가 앨범을 펼쳐보게 되었을 때, 첫째 오빠는 사진을 보다가
“이것 봐, 나 쎄 빠지게 일하는 데 아버지는 오토바이 타고 놀러 다녔어! 에잇.”라며 팽하고 돌아앉았다.
하지만 아버지 생전에 오토바이를 자가용으로 바꿔 준 사람은 첫째 오빠였다.
노란색 중고 포니가 어스름 저녁에 마당으로 들어올 때
“어라, 이게 뭐라니?”라면 놀람과 기쁨이 같이 담긴 아버지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다른 자식들은 아버지가 어려워서 슬슬 자리를 피해 다른 방으로 넘어갈 때도 첫째 오빠는 아버지 옆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남편은 항상 말한다.
“내가 본 아들 중에 첫째 형님이 제일 효자야. 그 시절에 아버지랑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아들이 얼마나 있다고.”
어려워도 첫째를 학교에 보내 공부시키는 집안이 있고, 첫째를 살림 밑천으로 삼는 집안이 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과 첫째 딸을 살림 밑천 삼았다.
어려운 시절, 안타까운 시대상이기도 하다.
언니, 오빠들 일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슴이 찡하다. 아버지는 자식이 어릴 때부터 어찌 그리 독하게 일을 시키셨는지 원. 한겨울에 고무신을 신고 오리도 넘는 곳으로 나무하러 다녀온 열 살 도 채 안 된 남매, 국민학교 등교 전에 논에 김을 매라고 시켜서 한참을 일하다가 학교 가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아 깜짝 놀라 뛰어갔는데 역시나 지각했다는 오빠들, 낫으로 꼴을 베다가 손을 다친 언니.
풀어내면 끝도 없다.
시대가 변했고, 집 환경이 변해갔기에 막내인 나는 오빠, 언니와 비교하면 일을 했다고 말하기 조차 어렵다.
하지만 주변 또래와 비교하면 밭일, 집안일을 많이 했다.
아버지와 같이 일할 때도, 아버지가 일을 하지 않을 때도 자식들은 집안일을 해냈다.
아버지 유전인자를 그대로 받아 신장과 간이 안 좋은 첫째 오빠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방에서 누워 쉬었는지 지금은 이해한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 아버지 상황을 이해한다고 해서 어릴 적 생긴 마음의 생채기가 금방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버지로서는 일을 시켜야만 집안이 돌아가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부모가 성실하게 일해서 어쩔 수 없이 옆에서 같이 일을 해도 불평이 생기는데,
자식만 일을 시킨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남매끼리 모일 때 일 많이 시키고 본인은 쉬던 아버지 흉을 보고 또 봐도 여전히 가슴에는 원망이 조금씩 남아있다.
‘일’은 아마도 아버지 좋은 모습을 가리고 있는 달걀 껍데기 중 한 가지일 것이다.
언젠가는 원망이나 불만을 전부 씻어내고 편안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