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육(育)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사이

by 일신우일신

갑자기 떠오른 어릴 때 기억의 진위가 확실하지 않아 확인해 볼 겸, 안부도 물어볼 겸 바로 위에 언니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내용을 언니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대신 언니의 일상과 아버지에 관해 기억 몇 가지를 들었다.

“좋은 기억이나 나쁜 기억도 별로 없어. 그리고 기억하고 자꾸 생각하면 뭔 소용이 있어.

일을 많이 시켜서 그렇지, 난 아버지한테 특별히 나쁜 감정이나 원망도 없어.”라는 말이 나를 붙잡았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신기하게도 일곱 남매가 모두 아버지를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지만, 특별히 미워하지도 않는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부모·자식 사이였다.

남매는 모이면 아버지 흉을 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아버지 관련 이야기를 나누며 웃기도 하지만 아버지한테 받은 설움, 나쁜 감정이 약했다.

"처가 식구들은 참 신기해. 장인어른이 해 준 것도 없는데 받은 것에 비해 장인어른한테 잘해."라고 둘째 형부는 몇 번 말했었다. 결국 아버지가 자식 복이 있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아버지가 특별히 잘해 준 것도, 정을 준 것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마음고생시켰는데 자식들은 자식 된 도리를 했고 아버지로서 공경했다.

아버지 앞에서 "싫어요, 안 해요."라는 말을 직접 하지 못했고, 싫은 내색, 짜증 내는 일도 없었다.

부모님 있는 방에서 형, 언니가 동생을 혼내거나, 동생이 형, 언니에게 대드는 일은 가당치도 않았다. 부모님이 안 보는 곳에서 모르게 싸울지언정.


너무나 당연하지만, 당연히 되지 않는 경우를 수없이 봤기 때문에 당연히 된 이유가 궁금했다.

밥상머리 교육은 기억하고 있지만 아버지만의 훈육에 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새삼스러운 것이 또 튀어나왔다.

아버지가 어떠했는지 천천히 되새겨봤다.


첫 번째 자식에게 기대가 없었고 분리가 확실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집안일, 농사일은 엄청나게 시키면서도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학교 성적표가 나오면 긴장했지만 한 번도 꾸지람은 물론 칭찬도 들은 기억이 없다. 나에게 특별히 기대하는 것이 있어 다그친다거나 기대에 못 미친다고 실망하는 표정을 본 적이 없다.

성인이 된 후 경제적 도움을 받은 적이 없고 아버지 역시 집을 위해 돈을 보내라거나, 용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결혼 후에 집수리하라고 돈을 보냈지만, 아버지는 되돌려 보냈다. 자식을 정서적으로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집을 떠나거나 성인이 된 후로는 경제적으로 철저히 독립시켰다.

처음으로 읍내가 아닌 대도시로 고등학교를 보낸 둘째 오빠한테는 기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빠에게 확인해 볼 일이다.


두 번째 차별이 없었다.

주변에서 차별받은 설움이 평생 가슴에 맺혀 수백 번을 풀어내도 끝나지 않는 사연을 많이 들었다. 상대적 박탈감처럼 힘든 감정이 있을까.

아버지가 아들 중 첫째와 딸 중 첫째를 상급학교에 보내지 않고 살림 밑천으로 삼았으니, 둘은 배우지 못한 설움이 있다. 하지만 6.25 전쟁이 끝난 직후 시대상을 생각하면 아버지 탓만 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시대에 살았으니 아들은 대학교까지 보내면서 딸은 여상(女商)을 보내는 정도는 차별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들이 귀한 집도 아니었으니 딸이라서 덜 먹이고,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구박하지 않았다.

더 예뻐하거나 미워하는 자식도, 더 챙기거나 덜 챙기는 자식이 없었다. 똑같이 잔정이 없이 대했다. 혹여 마음속에 차등이 있었는지 어떤지 드러내지 않았으니 모를 일이다.

옛말에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지만 부모도 사람인지라 분명 더 안쓰러운 자식, 더 편한 자식은 있다. 먼저 산 지혜로운 노인들은 말했다. "깨물면 유독 아픈 손가락, 드러내지는 마라."


세 번째 자신의 욕구, 감정을 자식에게 전가하지 않았다.

훈육이란 이름으로 부모의 화를 자식에게 풀어내는 경우는 허다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경우가 드물었다.

자식을 때려서 가르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시절이지만 아버지는 함부로 때리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맞은 기억이 두세 번 정도 있다. 내가 미성년일 때 아버지가 매를 들었지만, 이유가 있었으니 맞으면서 무섭고 속상했지만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잘못하면 눈물이 찔끔 날 정도 혼이 나서 아버지가 무서웠다. 평소 차분하게 말하고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혼낼 때는 무척 엄했다. 하지만 본인 감정에 휘둘려 자식을 매질하거나, 화를 내는 예가 별로 없었다.


자식에게 무심하기,

다르게 대하지 않기,

정서적 분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아버지 방식이 새삼스럽다.

무심하기를 넘어 무정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서운하지만 교육상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의도를 갖고 했는지 그냥 본인의 생활 방식이었는지 모르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현명한 교육법이었다.

미성년일 때는 끊임없이 말로 가르치지만 성인이 되면 간섭하지 않는 아버지였다.

성인이 되었을 때 무정할 정도로 심리적 탯줄을 끊어내는 부모.

지금도 이 정도 해내는 부모는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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