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혼(再婚)
누구누구 집 막내아들이 어린 남매를 둔 홀아비가 되었다는 소문은 동네 샘터의 이야깃거리가 됐다
이웃 동네에 다섯 살 된 딸을 둔 과부가 있었다.
과부는 고향이 개성이지만 서울 외갓집에 살다가 전쟁이 나고 삼팔선이 생겨 본가로 돌아가지 못했다. 외가에서 주선해서 시집을 보냈다. 그 시절 드물게 대학까지 졸업한 남자였다. 하지만 전기기술자였던 남편이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곱고 참한 며느리를 시댁에서 많이 아꼈다.
과부의 이웃집에 아버지의 이종 누이가 시집을 가서 살고 있었다.
누이와 과부는 왕래하며 지냈으니 자연스럽게 이종 오빠 이야기도 했을 것이다.
과부는 지나가는 말로 “내가 남매 키워주면 좋겠네.” 한 모양이다.
아버지는 과부집 근처 논으로 농사일을 하러 왔다 갔다 하며 멀찍이서 과부 얼굴을 봤다고 했다.
이종누이는 바로 중신을 서러 두 집을 왔다 갔다가 했다.
홀아비인 아버지 집에서 적극적으로 결혼을 원했다.
하지만 과부의 시댁에서는 강하게 반대했다.
오죽하면 며느리를 시집보내지 않으려고 둘째 아들과 결혼시킬 예정이라고까지 했다나.
그런데 과부와 홀아비 사이에 이미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첫눈에 반했는지 결혼은 성사되었다.
과부는 어린 딸을 시댁에 두고 남매를 가진 홀아비에게 시집을 왔다.
사리 분별이 확실하고 지혜로운 아내를 얻어 재혼한 아버지는 여덟 남매를 더 얻었지만
셋은 어린 나이에 잃고 다섯만 키워냈다.
아내는 의붓자식과 친자식을 차별하지 않고 키웠다.
똑똑하고 살림도 똑 부러지게 잘 했지만 살가운 여인은 아니었다. 시댁에 두고 온 친딸이 성장해 엄마를 찾아왔지만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했다.
자식들 모두 잔정 없는 엄마로 기억했다.
결혼 후 서울, 인천등 여기저기 전전하다가 전쟁 중에 집이 불타서 떠났던 동네 근처에 자리 잡았다.
농사지을 땅이 없으니 이런저런 사업을 하다가 누에를 키워 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는 양잠을 했다.
아버지는 타지로 판매하러 다니고 어머니는 집에서 가내수공업을 관리했다.
어머니는 의류제조 사업체를 운영했던 외갓집에서 관리업무를 했던 경험이 있었다.
딸, 조카딸, 동네 처녀를 고용해서 꾸려갔다.
나름 사업이니 부침이 있었을 게다.
확장을 만류하는 어머니말을 듣지 않고 무리했고, 큰 손해를 봤다. 석유파동까지 겹치면서 여파가 컸다.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아버지는 장사한다고 외지로 더 떠돌았다.
그 와중에 새로운 여자를 만나 바람을 피웠다.
어머니는 눈치를 챘고 아버지는 관계를 정리했다.
잠깐이라고는 하지만 어머니는 충격이 컸다. 정신 줄을 놓을 때가 많았다.
그즈음 물놀이 하고 놀던 어린 딸까지 사고로 잃었다.
황망한 와중에 죽은 딸의 사망신고를 하지 못했고, 막내딸의 출생신고도 하지 못했다.
덕분인지 때문인지 막내딸은 두 살 많은 죽은 언니의 호적으로 살게 되었다.
어머니가 머리가 아플 때마다 먹던 약이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 하얀 종이로 삼각형 모양으로 포장된 가루약은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까지 집안 여기저기 서랍에서 뒹굴었다.
병원에 갔지만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태라며 집으로 돌려보냈다.
어머니는 세상을 떴다. 첫째 아들이 스물세 살, 막내딸이 막 두 돌이 지난 때였다.
아버지의 두 번째 결혼생활은 이십 년도 채우지 못하고 끝났다.
아버지는 또다시 40대 후반에 일곱 남매를 둔 홀아비가 되었다.
아버지 바라보고 딸도 시댁에 두고 온 여인이었다.
부잣집 소리 듣던 시댁을 나와 없는 살림 꾸려나가느라 고생 많이 한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의 가슴에 못을 박은 아버지는 정말 나쁜 남자였다.
부부 문제니 자식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부모의 행동이 어린 자식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쉽게 용납되거나 이해되지 않는다.
나의 생모 이야기이기도 하다.
겨우 두 돌이 지난 나이에 돌아가셨으니 아무런 기억이 없고, 아버지와 같이 앉자 찍은 약혼 사진 속 모습만 알고 있을 뿐이다.
역시 제사 때 보았던 지방(紙榜)에 적힌 ‘顯妣孺人漢山李氏神位’가 익숙했다.
두 번째 엄마, 두 번째 어머니, 생모, 한산 이 씨 어머니, 이ㅇㅇ어머니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종종 들려주던 어머니 이야기는 칭찬 일색이었다. 추운 겨울에 있던 제사때 마다 아버지는 제주(祭主)로서 정성을 다했다.
아버지는 두 번째 부인 제사도 평생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