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혼(初婚)
내 생일은 제삿날이다.
난 집에서 생일날 미역국을 한 번도 먹어 보질 못했다. 제사 음식이 내 생일 음식이었다.
대여섯 살 때쯤일까?
“왜 이렇게 뭘 많이 해?”라고 물어봤는데
누군가 “네 생일이잖아.”라고 말했다.
난 그 말을 듣고 대문 밖에서 놀다가 지나가는 당숙모에게 "내 생일 밥 먹으러 오세요!"라고 말했다.
당숙모가 집으로 들어와 내 말을 옮겼고, 어른들이 한참을 웃었던 장면이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철이 들면서는 생일날 제사 음식을 준비했다.
한참 제사 준비할 때 진통이 시작되었고 내가 태어나서 제사는 못 지냈다고 한다.
아버지 첫번째 아내의 기일이다.
나에게는 지방(紙榜)에 적힌 ‘顯妣孺人晉州姜氏神位’ 글씨로만 인식된 첫 번째 어머니다.
첫째 오빠와 언니의 생모다.
나는 첫 번째 엄마, 첫 번째 어머니, 진주 강씨 어머니라고 섞어 불렀다.
할아버지는 조상 때부터 자리 잡고 살던 고향은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 먹고살기 힘들어서 평지로 이사를 나왔다. 맏아들은 고향을 지키게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고향이 그리웠는지 맏아들 집으로 돌아가고 셋째 아들이 할머니, 동생들과 어렵게 터를 잡고 살았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 강제 차출이 있었고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셋째 형을 대신해서 아버지는 14살에 징용을 갔다. 무려 9살이 많은 형을 대신해서 일본으로 갔다. 나이를 속이고 대신 갈 수 있을 정도로 아버지는 나이에 비해 몸이 성숙했었다.
어째서인지 아버지는 해방이 된 후 4년 후에 귀국했다고 한다.
부지런한 셋째 큰아버지는 성실히 일했고 땅도 마련하고 살만 하니 6.25가 터졌다.
아버지는 6.25 전쟁 중에 결혼했다.
치열하게 전투가 있는 전선과 달리 충청도 내륙은 조용했던 모양이다.
징용으로 일본까지 다녀왔던 아버지는 전쟁 중일 때 군대에 가면 죽는다는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병역을 피하는 목적도 있는 결혼이었다.
14남매 중 열두 번째 아들로는 막내, 22살 총각은 아홉 남매 중 맏딸, 18살 처녀와 결혼했다. 셋째 큰아버지의 중매로 이루어진 혼사였다.
하지만 인민군 소탕을 목적으로 마을이 소거되면서 할머니와 살던 집이 불에 타고 몸만 빠져나와서 알거지가 되었다. 결국 어렵게 터를 잡은 동네를 떠나 인민군이 없다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결혼하고 다음 해 아들이 태어났다. 뒤로 세 살 터울 둘째 딸도 태어났다.
하지만 아들이 다섯 살, 딸이 두 살 되던 해 ‘채독’이라고 불리던 식중독에 걸려 아내는 세상을 등졌다. 겨우 23살이었다. 지금이야 별스러운 병이 아니겠지만 전쟁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절에 불량한 위생 상태 탓에 생긴 병이다. 가난한 살림에 제대로 먹지 못한 약한 몸이 이겨내지 못했다.
결혼 생활을 6년 정도밖에 함께 하지 못하고 아내를 먼저 보냈다.
아버지는 27살, 젊은 나이에 다섯 살, 두 살 남매를 둔 홀아비가 됐다.
올해 27살인 내 아들을 보면 70여 년 전과 철듦이 다르다고 해도 아버지는 너무 젊은 나이였다.
뒤에 삶의 터전을 이리저리 옮기며 살았다.
마지막 터전을 잡은 동네에 외할머니집이 있어서 첫째 오빠, 언니는 놀러도 가고 외삼촌, 이모들과도 각별한 사이로 지냈다. 외할머니는 딸을 먼저 보낸 뒤에도 사위에게 여러 가지 집안일을 상의하며 지냈다고 한다.
첫째 오빠는 아내를 잃은 남자는 삶이 힘들다는 의미로 ‘상처(喪妻)가 망처(亡妻)’라는 말을 자주 했다.
막내와 맏이가 만나면 잘 산다는 말이 있다. 물론 근거는 없는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도 아들 중 막내와 맏딸이 결혼했으니 상처(喪妻) 하지 않았다면 평탄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역사에 ‘만약’은 없다는 그 만약을 종종 생각해 본다.
아버지는 평생 첫째 부인 제사를 모셨다.
음력 9월이라서 날짜 변동이 있지만 대개 양력 10월 가을걷이 시기라서 모든 것이 풍성한 시절이다. 그러나 시대가 어려워서 먼저 보낸 아내였다.
어렵게 살다 먼저 간 젊은 아내를 생각해서인지 제사상을 항상 푸짐하게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