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혼(三婚)
결혼할 나이가 된 장성한 아들부터 젖먹이 막내딸까지 있는 홀아비동생을 누나가 설득했다.
-전에 만나던 여자 있다면서 데려오면 안 되겠냐?
-여기 와서 살림할 여자가 못 됩니다.
불같은 사랑에 빠져 만난 여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업이 힘들어지고 장사 때문에 외지를 다닐 때 본처와 사이도 삐그덕거렸을 것이다. 그때 잠깐 기댔던, 본처와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딱히 대안이 없었는지, 집안 상황이 급했는지 그 여인을 데려왔다.
새로 온 여인은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살림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2남 2녀 중 장녀였다. 동생 셋은 소위 말하는 능력 있는 자식들이었다. 마도로스, 대기업 임원, 영화관 대표 사모였다.
친정부모에게 맏딸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부산에서 살림을 해 본 적 없는, 귀하게 자란 무난한 여인이었다. 어린 남매를 둔 과부였다. 자식도 친정엄마가 도맡아 키워주다시피 했다.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식구 많은 시골 살림이 아니었다면, 도시 남자 만나서 작은 살림을 하며 살았다면 무리 없이 살았을 여인이었다.
자기 자식은 친정에 두고 시집을 와서 의붓자식을 키웠다.
하지만 아버지의 불륜 상대였던 여자를 자식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엄마가 마음고생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자식들이 새로 들어온 계모를 곱게 볼 수가 없었다.
거부하는 마음을 돌리려면 뭔가 필요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지혜롭지도 약지도, 살림을 잘하지도 못했고, 음식 솜씨가 좋지도 않았다.
명석하고 현명했던 돌아가신 엄마와 비교하면 너무나 모자라는 여인이었다.
누군가는 “돌아가신 이ㅇㅇ 어머니와 비교하면 그 엄마는 바보였어, 바보.”라고 말할 정도였다.
시골 생활이 처음이니 미숙한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
들어온 과정을 생각하면 이해받는 것이 더 이상했을지도 모른다.
사고 싶은 것은 사야 하고, 먹고 싶은 것은 먹어야 하는 평범한 도시 여자는 손이 야물지 못했다. 방앗간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살림은 더 커졌고, 기대에 한참 못 미친 아내를 아버지는 견디지 못했다. 다툼이 잦아졌고 집안 분위기는 점점 무거워졌다.
10여 년을 같이 살았지만, 정이 깊어지기는커녕 멀어졌다. 결국 아버지는 새로운 여인을 만났다. 아버지는 이혼을 요구했지만, 새엄마는 거부했다.
아버지는 그때 읍내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나를 핑계 삼았다. 새엄마에게 읍내 나가서 막내딸 밥해 주며 지내라고 설득해 별거를 시작했다. 왜 버리는 여인에게 막내딸을 딸려 보냈는지 원.
가족 중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어쩌면 침묵으로 동의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두 여인을 집과 읍내에 두고 살게 되었다.
동네에서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집이었다.
엄마와 나는 5년 정도 읍내에서 살았다. 항상 아버지를 기다리는 모습이 이상하기도 하고 싫었다. 엄마는 자주 부산에 있는 친정에 가서 지냈다.
내가 고3이던 가을, 엄마는 친정에서 잔기침이 멈추지 않아 병원에 갔는데 암이라는 말을 들었다.
발견이 늦어 신장에서 시작된 암이 폐까지 전이되어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대학입시 공부를 병원에서 했다. 입시가 끝난 뒤에는 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등교하는 대신 병간호를 했다.
병원을 오가는 길목에 교회가 있었다. 뾰족한 종탑을 올려다보며 믿지도 않는 신에게 '하느님 계시다면 착하게 살 테니 엄마 좀 낫게 해 주세요'라며 어색해서 소리도 못 내고 처음으로 기도 아닌 기도를 해봤다.
엄마는 항암 치료도 몇 번 받지 못하고 그 해를 못 넘기고 돌아가셨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공중전화로 알렸다. 낮에 병원에 다녀갔던 아버지는 예상치 못한 소식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의 놀란 외마디 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장례식에 새엄마의 여동생, 친딸이 참석했다. 친딸은 상주 역할을 했다. 속상하고 답답했던 이모는 울면서 "아프고 어차피 고생할 것 차라리 잘 죽었다."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은 비수처럼 내 가슴에 꽂혀서 지금까지 남아있다.
죽음은 슬프고 안타까운 줄로만 알았는데, 잘 죽은 죽음도 있구나 싶었다.
주변이 편안해지는 죽음도 있구나.
장례를 치르고 선산에 모시는 대신 화장을 한 후 강에 뿌렸다.
아버지는 결혼 후 소생이 없던 아내의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정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부산 엄마, 강ㅇㅇ엄마라고 불렀다.
세 살부터 키웠으니 나에게는 엄마였다.
하지만 나머지 남매는 물론 아버지도 인정하지 않는 여인이었다.
나는 엄마에 대한 인식이 생길 때부터 새엄마라는 사실을 알았고, 집안에서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챘다.
철이 들면서 7남매 마음속에 엄마가 각자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엄마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존재였다. 언니, 오빠와 같이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과거 일을 자꾸 캐묻던 막내사위에게 아버지가 ‘미친 짓이었다’고까지 말했던 가장 후회하는 결혼은 이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