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女) 4

사실혼(事實婚)

by 일신우일신

아버지가 부산 엄마와 별거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다른 여인은 있다는 조짐이 있었다.

아버지는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부부싸움 끝에 무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집안 분위기는 흉흉해졌다.

어느 날 아버지가 결단을 내린 모양이다.


첫째 오빠에게

“집안 살림도 제대로 되질 않고, 바꿔야지 도저히 지금 엄마랑 못 살겠다. 그런데 최소한 장남인 네가 가서 인사하고 모셔 와야겠다.”라고 말했다.

오빠는 별다른 반대 없이 아버지의 새로운 여인을 찾아갔다. 이미 딴살림을 차린 집은 신혼집 같더라나.

흔쾌히 절을 하고 집으로 들어와 달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결혼해서 서울에 살고 있는 첫째 언니한테도 찾아가 서로 소개했다.

둘째 언니는 한창 결혼 준비 중이었다. 형부는 처음 인사를 하러 처가에 갔을 때 만난 장모는 부산 엄마였지만 결혼식장에는 새로운 장모가 들어왔다. 둘째 언니에게 평생 흉이 되었다.


둘째, 셋째 오빠는 철원에서 군 복무 중이었다. 어느 날, 군에 면회를 올 아버지가 아닌데 갑자기 면회를 왔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같은 연대 정도에 소속되어 있었는지 같은 면회소를 사용했다.


오빠 둘은 외박을 신청해서 나갔고 숙소에 가니 아버지가 웬 여인과 있었다.

“절을 해라. 새엄마 될 사람이다.”

별다른 거부 없이 절을 했다. 집에 있는 새엄마에게 별다른 죄책감이 없었다.

그렇게 오빠 둘은 군 복무 중에 집의 안주인이 바뀌었다.


미성년이었던 셋째 언니와 나에게는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하지만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집에서 첫 대면이 있었다.

아버지가 친정에 다니러 가는 부산 엄마와 나를 읍내까지 오토바이로 태우고 가는데, 동네길에서 강아지가 갑자기 튀어나와 피하려다 사고가 났다.

심각한 부상은 없었다. 나의 부산행은 취소되었지만 부산 엄마는 그대로 친정에 가기 위해 읍내로 나갔다. 하지만 찰과상을 입은 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되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쫓아내듯 친정으로 보냈다.

그날 오후에 집에 웬 여자가 왔다.

세수한 후에 바르던 화장품이 어찌나 많던지 나는 한참을 구경했다. 집에 있던-고등학교 졸업을 한 후였는지, 방학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셋째 오빠가 "아줌마! 혹시 딸 있어요?"라고 물어볼 정도로 세련되고 예쁜 도시 여자였다.


새로 들어온 아버지의 여인을 서울 어머니, 표ㅇㅇ 어머니라고 불렀다.

난 주중에는 읍내에서 지냈고 주말에는 집에 왔다. 집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금요일 저녁이면 아버지가 집으로 오라고 세 살던 주인집으로 전화를 했다.


어느 날 동네 가겟방으로 심부름을 가는데 뒤에서 "엄마도 먹게 아이스크림 사 와."라는 말이 들렸다.

대문으로 뛰어가던 내가 멈추고 뒤돌아 서서 정지화면처럼 쳐다본 적이 있다.

"엄마"라는 말이 어찌나 어색한지 내가 얼마나 민망한 상황을 연출했는지 생각하지도 못한 채 한참을 서 있었다.

나에게는 읍내에서 함께 사는 새엄마가 있었다.

진심으로 서울어머니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와 같이 사는 여인으로는 인정했다.


집에 들어올 때는 본처가 있어서 혼인신고를 하지 못했지만, 본처가 사망한 후에도 왜 그런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서울 어머니는 추석, 설 명절과 전남편의 제삿날은 본인의 본가로 갔다.

명절에만 집안 안주인이 없는 것은 며느리와 딸을 힘들게 했다. 음식 준비를 며느리와 딸이 해야 했고 명절 끝에 혼자 있는 아버지 식사 준비가 항상 문젯거리가 되었다. 중학교 때부터 의례히 내가 남아 아버지 밥을 챙겼다.


서울 어머니는 아버지가 원하는 바를 제대로 맞춰주며 금슬 좋게 살았다. 자기 처세라고 해야나, 의붓자식들에게 자기 위치를 스스로 세우며 살았다.

아버지와 함께 셋째부터 일곱째까지 출가시켰고, 자식이 모두 나간 뒤 혼자 남은 아버지 옆에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아버지는 서울 어머니와 가장 오랜 기간, 30여 년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서울 어머니는 암 판정을 받고 길지 않은 시간 투병을 하다가 아버지 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며 전 자식에게 연락했고, 아들 한 명이 찾아오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던,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서울 어머니의 과거사였다.

명절마다 찾아가던 집은 본처 소생의 아들 집이었다. 그 집의 작은 부인이었다. 본인 소생은 없었고, 본처 자식을 잠깐씩 맡아 키운 게 전부였다.

후처도 아닌 작은 부인을 아버지가 없는데도 명절과 제삿날에 기꺼이 맞아들인 그 집도 ‘참 사연 많은 집이구나.’ 싶었다.


아버지도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한 상황에서 장례를 치르게 됐다.

아버지는 정성껏 장례 치르고 선산에 모시라고 첫째 오빠에게 당부했다.

하지만 첫째 오빠는 소생도 없고,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아버지 부인을 선산에 모시고 싶어 하지 않았다.

화장한 후 아버지를 위해 준비한 가묘 옆 나무 밑에 묻었다. 성묘 갈 때마다 술 한잔이라도 올렸다.

또다시 아내를 잃은 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왜 안 죽어진다니.”라며 한탄했다.


참으로 처복이 없는 아버지였다.

처복 없는 아버지를 뒀으니 나도 엄마복이 정말 없다.

그래도 아버지는 여복이라도 있다고 말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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