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獨)

진짜 홀아비로

by 일신우일신


서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너무 슬프고 허망해서 같이 떠나고 싶었던 아버지는 제대로 먹지 않았다.

“왜 안 죽어진다니.”라며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아버지 마음과 다르게 몸은 회복되었고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지내기 어려우니 우리 집으로 같이 올라가자고 이야기했지만, 아버지는 강경하게 거부했다. 아버지는 혼자서 잘 지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더욱이 간다면 아들네 집으로 가야지 딸네 집은 갈 곳이 아니었다. 말년에 혹시라도 혼자가 되면 절로 들어가겠다고 말하곤 하던 아버지였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아버지 인식 속에 딸은 출가외인이니 가당치 않은 말이었다.


평생 차려주는 밥만 드셨던 아버지였다. 가까이 사는 딸, 며느리가 반찬을 해서 가져다 놓고, 자주 들러 수발을 들어도 각자 생활이 있으니 같이 살던 아내처럼 챙겨 줄 수는 없었다. 혼자서 지내는 동안 식사 챙기는 일이 호락호락하지 않고 무척 외로웠을 것이다. 수면장애가 오고 가벼운 우울증이 있었다. 오래간만에 집에 가서 보니 날이 더워 초파리가 기승을 부렸고 부엌살림이 아주 가관이었다. 우리 집으로 가자고 다시 권하니 "그러마." 라며 마지못해 따랐다. 나는 당장 올라가자고 채근해서 아버지는 간단히 짐을 챙겨 우리 집으로 같이 왔다.


딸네 집에 있어도 식사는 해결되었지만 심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들 출근하고 학교 가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다. 또한 음식이 입에 안 맞으니 살짝 짜증을 냈다. "보기에는 맛있어 보이는데 왜 맛이 없다니?"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이 맛이 없었던 거였다. 알아채고 아버지 반찬은 조미료를 넣어 따로 준비하면서 음식 맛 문제는 해결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들어가길 원했다.

"의사가 항상 있고 약도 처방해 주고 좋다더라."

한 번 요양원이든 요양병원이든 가게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어려우니 최대한 나중에 가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결국 몇 달 만에 고향 근처 요양병원으로 들어갔다.


시골 폐교한 초등학교를 개조한 병원이라서 공간이 넓고 잔디운동장도 있어 산책도 하고 환경이 좋았다. 읍내에서 좀 먼 것이 아쉬운 점이었다. 아버지가 원해서 갔으니 만족도가 아주 높았다.

"왜 진작 온다고 하는데 말렸다니!"라고 말할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증 환자가 많고 말이 통하는 사람이 적어 적적하다 했지만, 그럭저럭 만족하며 잘 지냈다. 매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간호사실에 갖다주고, 주변 환자에게 간식거리를 나눠주며 요양병원생활을 활기차게 보냈다. 일곱 남매가 돌아가며 방문하니 요양병원에서 제법 자식이 자주 찾아오는 어르신이었다. 정신 온전하고 깔끔한 어르신, 점잖은 어르신으로 인기가 많았다. 가까이 사는 첫째 오빠, 첫째 언니, 셋째 오빠가 더 자주 찾아가고 돌봤다.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면 첫째 딸, 셋째 며느리가 만들어 가져다줬다.

아버지는 정말 효자, 효녀 자식을 뒀다.


아버지는 요양병원에서 지냈지만, 자식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본인 장례비용으로 마련해 두었던 적금, 서울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남은 조의금을 모아 기금을 만들었다. 요양원 비용, 기타 용돈, 병원비를 기금으로 충당했다. 나중 일이긴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고 남은 비용까지 보태 기금을 키웠다. 지금도 칠 남매가 일 년에 한 번 모든 비용을 기금으로 충당하며 1박 2일로 모임을 한다. 아버지의 손녀 손자가 어디서 모일지 더 기대하고, 가고 싶어하는 가족 모임이 되었다.


한참 후에 시골 요양병원이 지루하다며 읍내에 있는 요양원으로 옮겼다. 주변 편의점에 다니면서 간단히 쇼핑하고 먹고 싶은 간식거리를 사 먹는 재미를 즐겼다. 아버지 혼자 오롯이 보낸 몇 년간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읍내로 옮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장 기능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투석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몸의 여기저기에 이상 징후가 드러나 더 큰 병원에 입원했고 자식들은 "어쩌며..."이라는 생각에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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