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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루트 Jul 06. 2024

1. 나의 진로 이야기

대2병 극복부터 고시, 창업, 대학원까지, '바꿔도 괜찮아.'




1-1)


대학교에 전자공학과로 입학했다.


고등학교 때 의공학자를 꿈꿨다.


물리학, 천문학, 화학.. 이 아닌 의공학을 꿈꾸게 된 계기는 바로

'뇌를 바꾼 공학, 공학을 바꾼 뇌'라는 책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꾸준히 치매어르신이 계신 센터에서 봉사를 해오면서, 느꼈던 뿌듯함

그리고 위 책에서 봤던 문구들, 관련 연구 영상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 또는 질병으로 인해, 마비로 인해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기술로 입을 움직여 말하지 않고도 뇌의 활동을 읽어, 가족과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준다.'


 

출처: 한양대학교 전기, 생체공학부 홈페이지



이 부분이 그간의 봉사를 할 때 느꼈던 감정이 합쳐지며 이공계 학생이던 한 고등학생이 '의공학을 해야겠다'라고 마음먹게 된 순간이었다.






1-2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대학교 2학년,

열정과 새로움으로  가득 찼던 1학년을 보내고 2학년 1학기가 되었을 때,

고등학교 때 꿈꿨던 진로와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급격히 난이도가 높아진 전자공학과의 공부량,

선배들과의 이야기,


'의공학' 하나를 목표로 전자공학과로 향했던 나는 '대기업의 연구개발직' 만을 목표로 하고 있는 수많은 선배들을 보며 내가 원했던 방향이 이곳이 맞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서, 혼란의 시기에 영향을 주었던 타 학과 선배가 한 명 있었다.

그 선배는 수학과에서 전자공학과로 전과, 전과 후 군대 복학 후 애니메이션에 대한 꿈을 키우며

캐나다로 떠나 일과 같이 애니메이션 스쿨을 다녔던 선배였다.




교내의 한 멘토링 프로그램에서 이 선배를 처음 만났는데,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안정적'인 진로루트를 탈피해, 해외에서 공부를 하고, 꿈을 그리고 있는 반짝반짝한 모습을 처음 본 나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전공과는 떨어진 '3d 애니메이션'이라는 분야를 멘토링 과외를 통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때 나눴던 이야기들은 하나하나 나를 곱씹게 했다.




'내가 원했던 나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

'내가 원하는 앞으로의 나의 모습은 무엇일까, '

'나는 왜  의공학에 끌렸을까. 나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


여러 생각을 하며, 2학년 1학기를 보냈다.


그리고 2학년 2학기 등록을 하게 되었다.

2학기 개강 첫 주,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된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든 나는 바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들, 고등학교 때의 내 생각들, 내가 휴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를 긴 장문의 메시지로 작성해 부모님께 전송했다.


첫 휴학, 그리고 주변에서는 본 적이 없는 공대생의 2학년 2학기 휴학.


심장이 매우 떨렸지만 지금 내가 '방향을 전환, 중요한 고민을 해봐야 할 시기'라고 판단하였기에 망설임 없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첫 휴학


그렇게 나의 첫 휴학이 시작되었다.


 



2-1)


처음으로 커리큘럼을 벗어난 생활,

첫 휴학 기간은 말 그대로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기분이었다.


초등학생일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나는 항상 목표가 있는 사람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플래너



하고 싶은 게 확실했으며, 항상 내 꿈을 주변에 당당하게 말하고, 행동했다.

약사, 과학자, 의공학자, 등...

당시 성적도 내가 하고 싶은 분야를 가기에는 부족한 적이 없었으니, 얼마나 희망찼겠는가.


그러던 내가, 처음으로 대학공부에 어려움을 느끼고,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에는 '희망진로'를 한번 정해두면, 그 진로는 희망진로란에만 적어두고 학교 공부만 했으면 되었기에 고민이 없었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희망진로에 맞는 전공 공부를 해야 하며, '미래'시점이 아닌 성인, 지금인 '현재' 시점으로 행동하고 결정해야 한다.



나의 진로를 찾기 위해, 내가 첫 휴학 후 했던 첫 행동은 바로 '봉사'였다.

내가 봉사를 하며 했던 생각, 느꼈던 감정, 의공학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뜨거움'을 느낀 이유.


다시 봉사를 한다면, 내 원동력이 뭔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끌리는 봉사들을 몽땅 신청하기 시작했다.

노동인권영화제 서포터즈 봉사, 어르신 성평등 프로그램 활동 보조, 국립중앙박물관 박람회 운영지원 봉사, 대한민국 csr 경영대상 사무보조 봉사...



20년 휴학시절




봉사 하나하나가 쌓여 내가 되었고, 하지만 많은 봉사 후에도 아직 확실히 잡히는 기준은 없었다.





2-2

그때의 나는 교내 진로 프로그램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진로워크숍에서 기억나는 활동은 바로 '가치관 경매'이다.


'가치관 경매'란, 경매에서 자신이 가치가 높다고 하는 상품에 높은 가격을 부르는 것처럼,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내가 가진 10만 원이라는 한정된 금액을 잘 분배하고 선택해, '가치'에 경매하는 활동이었다.


'가치관 경매'에 나왔던 가치들은 다음과 같았다.


'안정성'

'보수'

'일과 삶의 균형'

'즐거움'

'소속감'

'자기 계발'

'도전성'

'영향력'

'사회적 기여'

'성취'

'사회적 인정'

'자율성'


출처: 주식회사 끽다



나는 이 경매에서, '사회적 기여'와 '도전성'을 따냈던 것 같다.

인기가 많았던 '안정성', '보수'같은 경우에는 10만 원 전 재산을 제시한 학생들이 많았지만, 나는 사회적 기여와 도전성에 제시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내가 가진 10만 원을 4만 원, 6만 원으로 분배해 경매에 참여했다. 결과는 둘 다 따낼 수 있었다.


여러 봉사를 했음에도 모호했던 나의 생각들이, 점점 수렴되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의공학 책을 읽고 뜨거운, '하고 싶다'는 느낌을 느꼈던 이유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기 때문' 이였구나. 한 사람의 문제를 , 어려움을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 때문이었구나


그렇다면, '도움'만 줄 수 있다면, '다른 분야로 가도 괜찮겠다.

내 적성에 맞고,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로 가보자.'





3-1)


 내 원동력의 기준이 잡히고,

다음 연도 1월이 다가왔다.

1월은, '전과 신청'을 할 수 있는 일 년의 유일한 달이다.



그때의 나는, '전과'라는 첫 20대의 큰 결정을 앞두고 불안에 휩쓸리고 있었다.

불안하고 정리되지 않는 마음,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 지금까지 이공계 학생으로 지내왔는데 문과, 미대,, 등 다른 분야로 가도 될까 하는 고민.

특히 취업이 가장 잘 된다는 '전자공학과'를 버리고 다른 분야로 갔을 때, 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주변의 반응은 어떨까 하는 불안들.


그때의 나는, 매일 구글 검색창에 '공대에서 문과', '공대 포기', '공대 적성'을 반복해서 검색하며 모든 글을 읽어 볼 정도로, 다른 사람들의 사례가 절실했다.

내가 하는 고민과 선택이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싶었고, 공대를 포기하고 다른 길로 향해도 괜찮다는 사례를,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그때의 어린 나는 몰랐지만, 그 후에 수험에 진입하고, 여러 강연들, 여러 사람들을 거치며 그때 했던 고민은 당연한 고민이었으며, 정말 다양한 분야로 진출한 선배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불안이 그 자체였던 20 시절


그때의 나는 '방황'이라는 단어가 딱 맞다고 할 정도로 아르바이트를 가서도 정리되지 않는 여러 생각들에 의지하고 있던 다른 아르바이트생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이 나기도 했었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러 날을 보내고,

전과 신청 기간이 다가왔다.


그래서 그때, 고등학생 때의 나를 , 수학과 과학보다 영어와 국어를 잘하던 나를 믿으며, 내 원동력을 믿으며, 여러 분야를 배울 수 있는 '경영학과'로 전과를 하게 되었다.





불안했던 전과 전 기간과는 다르게, 선택을 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던 던 같다.

그리고 경영학과에서 한 학기를 보내니, 또 나에게 원하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평선, 지평선


해변에서 바다의 수평선만을 바라볼 때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어 무섭기만 하지만

실제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보면, 내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섬들이 보이는 것처럼

나는 경영학과에서 '노무사'라는 새로운 진로를 발견했다.

노동문제로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영향', 자격 취득 후에도 노무사 사무실, 사기업, 공기업, 프리랜서 등 여러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자율성과 도전성',

내가 원하는 진로에 딱 맞는 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두 번째 휴학 후 공인노무사 수험 학원, 고시반, 도서관 만을 반복하며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3-2

매일 8시간 이상의 공부, 희박한 최종 합격률, 활기찬 캠퍼스와는 다른 수험가의 분위기, 투입한 시간과 비용을 합격으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책임감,

무겁게 생각하면 한참 무거워지는 수험생활이었지만,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기쁨, '합격 후 그 진로를 걸을 때의 내 모습', 을 생각하니 힘든 수험생활도 하루하루 감사하고 행복했던 것 같다.


버스에서도 판례 외우던 시절



하지만 삶은 항상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는 최선을 다했지만, 시험 결과는 불합격이었고,


1년 후에 치른 두 번째 시험에서도 불합격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첫 시험 응시 때에는, '불합격'이라는 글자를 받고 속상해하고 , 슬퍼했지만 두 번째 결과에는 그렇지 않았다.

두 번째 시험 한 달 전부터 빨리 끝내고 싶다, 끝나면 후련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공부장 한편에 그런 메모가 가득했고, 실제 두 번째 시험을 끝내고 시험장을 나올 때도 후련한 마음만 남았던 것 같다.

그렇게 두 번째 결과가 나오고, '내가 다른 분야에서 성공해야겠다' 하는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내 두 번째 희망직업, 노무사 이야기가 끝나게 되었다.





4-1)


지금의 내 주된 관심사는 '언론'과 '창업'이다.

대학교 2학년, 흔히 말하는 '대2병'부터 항상 고민이 생기면 서점으로 향했고, 지금까지 적어도 70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은가'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왔다.

철학과 교양을 신청해 들을 정도로, '사람과 삶', '언어와 생각, 기록, 말'에 대한 생각이 많았다.


박물관에 가서도, 과거의 기록물과 유물을 보면서도, '내 삶이 한정적이라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을까.' , '나는 어떤 기록을 남기고 떠날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러던 중 한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한 아나운서가 자신의 진로를 '아나운서'로 선택하게 된 계기였는데,


" 살아있는 동안에는 목소리를 내고, 죽어서는 글로써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

그럼 난 영원히 남아있는 사람이 되겠다.

강연하고 책 쓰는 게 꿈이었어, 내 꿈은 동사인거지.

그거를 제일 잘할 수 있는 게 뭘까를 찾다가 찾다가,

아나운서가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고,

적당한 인지도와 함께 말을 계속 연습할 수 있고,

신뢰도가 좀 있는 직업이잖아.

신뢰도를 얻을 수 있으면 내 글과 말도 많이 들리지 않을까, 아나운서가 돼야겠다. "


이 말을 들으며, 내가 박물관에 방문했을 때 했던 생각들이 생각나며, 이와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읽었던 많은 책들의 저자, 띠지에 적혀있던 저자들의 이력이

'라디오 pd', '기자', '편집자' 등 언론 분야에 많이 위치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걸 깨달은 후로, 이제 책뿐만이 아닌 언론분야의 현직자들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2

그 후, 4학년 1학기 중간고사 기간에도 공부와 더불어 강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pd', '사회부 기자', '창업가'의 강연을 다녔는데,


사회부 기자님의 강연을 들으며, 처음으로 '내가 영화를 만든다면 주인공은 저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정도로 단순 사건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실제 현장을 깊숙이 들어가 취재하고, 상대방의 감정과 상황에 공감하며, 검거, 후원 등 실제 문제해결로까지 이어지게 만드는. 그런 기자님이었다.



기자님의 강연을 들으며, 여러 기자님의 에피소드를 들으며, 누군가는 '저렇게 피곤하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가끔 회의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다시 직업을 선택해도 기자를 할거'라는, 직업과 자신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는 기자님의  모습은 너무나 멋졌다.


그리고 많은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는, 한두 시간의 강연만으로 듣는 사람을 팬으로 만들어버리는, 기자님의 모습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가 저 분야로 간다면, 나 같은 사람이 저 분야에서 일을 한다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언론분야의 꿈을 구체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5-1)


그리고 창업, 창업에 대한 꿈은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

대학교 때 들었던 창업 관련 특강,

경영학부 학생으로서 들었던 여러 수업들, 기업가정신과 마케팅, 성공 사례들


'무에서 유'를 만들고,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자신의 상품, 브랜드를 만들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영향을 끼치는 직업.


특히 내가 존경하는 한 '공연다이닝' 대표님이 있는데,

김 대표님은 제주도 출신으로, 주변에는 해녀였던 지인들이 많았고, '해외 수산물에 비해 낮은 가격으로 해녀의 수산물 가격이 책정되는 점, 해녀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해녀의 가치를 먼저 회복하자, 이야기, 삶을 보여주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버려진 수산물 경매장을 '공연장'으로, '다이닝 공간'으로 탄생시켰다.



제주 '해녀의 부엌' 공연 다이닝



-외국인들은 해녀를 보며, '살아있는 인어공주'를 떠올렸다.

-방문한 사람들은 공연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감정을 되돌아보고 치유할 수 있었다.

-20대부터 90대까지의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모여 공연을 구성한다.

-90세인 해녀분은 평생 받아보지 못했던 박수를 관객으로부터 처음 받고 눈물을 흘린다.



"나 해녀로 사는 거 잘도 부끄러워났수다.

겐디 해녀의 부엌만낭 잘도 행복하우다. "


'나'의 삶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 모든 걸 뭉쳐 비즈니스 모델을 탄생시키고, 지역의 선순환을 만들어내는 대표님의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5-2

각자는 모두 자신의 삶에서의 주인공이다.

내가 항상 명심하고 있는 생각이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면,

위에서 말한 언론분야와 더불어서 또 다른 하나는 창업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지금은 언론과 창업에 관심이 많은 한 사람이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 'connecting the dots.'가 있다.

스티븐잡스가 한 강연에서 한 말인데, 모든 경험은 후에 보면 연결된다는 것이다.

나도 많은 경험을 거치면서, 나의 많은 'dots'가 연결되는 순간을 많이 느꼈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게 무엇이던, 내가 '끌림'을 느꼈다면 , '하고싶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쪽으로 나아가보려고 한다.


connecting the dots


4년 전 나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

네가 그토록 찾던 여러 분야의 사람들은 네가 대학 밖으로 나가서 돌아다니기에 따라 무수히 만날 수 있고,

네가 하는 선택과 경험은 하나도 헛된 것이 없으며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모여 네가 된다고.

그리고 나를 더 믿고 굳게 나아가라고, 네 기준이 있다면 어느 분야던 상관없다고,



대2병이 온 대학생들, 또는 진로고민을, 삶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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