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독립했다. 옷가지와 신발 등 넘쳐나던 물건들이 사라지자 집이 넓어진 느낌이었다. 빈공간은 곧 채워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좋아하는 화분들을 하나 둘 씩 베란다에서 실내로 들여왔다. 남편은 식물들이 많은데도 화원에 가면 하나라도 사서 들고 나왔다. 그렇게 해서 꾸며진 베란다는 다양한 꽃들이 피어나니 보기는 좋았다. 가꾸기에만 열심이고 정리는 그에 못 미쳤다. 바닥은 흙과 떨어진 잎들로 지저분했다.
남향인 딸의 방은 남편의 서재가 되었다. 남편은 거실 베란다에 있던 학자스민의 향기가 좋다며 방 베란다로 옮겨 놓았다. 방 안의 동그란 나무 화분대 위에는 커다란 홍콩야자 화분을 올려놓았다. 남편이 출근한 다음에 그 방에서 책을 읽다가 숨이 막혔다. 베란다에서 퍼지는 향기는 강하게 방으로 스며들었다. 방안의 화분은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데다 자잘한 꽃가루가 떨어져 신경이 쓰였다.
강아지도 공간을 빼앗겼다. 남편은 햇빛이 잘 드는 거실 한편에 커다란 만리향 화분을 갖다 놓았다. 강아지는 식물의 넓게 퍼진 잎들이 부담스러웠는지 근처에 있는 방석에 가지 않았다. 평소에 좋아하던 자리를 두고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확보해야할 공간이 있고 자기 자리가 있다. 방과 거실로 들어온 큰 화분들은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보람일자리에 참여해 50플러스 센터에서 학습지원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5060세대들을 위한 다양한 강좌의 강사들을 돕는 업무를 맡았다. 연 초부터 활동했던 몇 분들과 달리 중간에 충원된 상태여서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처음에 ‘쪽염색’ 수업에 들어가 수강생들의 맨 뒤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담당직원이 오더니 수강생들과 떨어져 보조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한발 물러나서 출석 체크를 하고 교재를 나누어 주거나 필요한 도구를 챙겨야했다. 수업 내용을 파악하고 사진을 찍었다가 기록으로 남겼다. 30여 년 동안 교직에 있을 때 나의 자리는 교단 앞이었다. 명퇴를 하고 다양한 것들을 배우러 다닐 때는 수강생 자리에 앉았다. 학습지원단이 된 후에는 한발 물러서서 수업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보조하는 자리에 있다. 시간과 상황에 따라 자리는 변해갔다.
화분 정리를 했다. 일단 방과 거실의 덩치가 큰 화분의 잎들을 솎아냈다. 미용실에서 머리숱을 치듯이 잘라내니까 부피가 줄었다. 학자스민은 원래 있던 큰 베란다로 내놓았다. 그곳에서 마음껏 향기를 발산하도록 했다. 방에 있던 홍콩야자는 방 베란다 자리로 내놓았다. 방안에서 한껏 잎을 펼치고 공간을 확보해 나가던 화분은 크기가 줄어서 얌전하게 자리를 잡았다. 강아지 자리를 점령했던 만리향 화분도 가지를 많이 쳐내고 원래 있던 큰 베란다 창문 쪽으로 옮겨놓았다. 화분을 자세히 살펴보며 가지를 치고 시든 잎들도 떼어내다 보니 애정이 갔다. 한참 더 자라려는데 가지를 자르니 미안하기도 했다. 적당히 정리해주는 것도 필요하다 싶었다. 가지 끝에서 새 잎들이 솟아나는데 예전에 나 있던 잎들은 아래쪽에서 힘없이 뚝뚝 떨어졌다. 한창 무성했던 잎들은 자신의 시간을 뒤로하고 새로운 잎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누렇게 빛바래서 말라가는 잎들을 떼어주며 수고했다고 혼잣말도 해본다. 이러다가 나도 화분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베란다를 치우고 쓸고 정리하다보니 마음도 개운해졌다.
남편이 퇴근을 했다. 남편은 은행을 명퇴하고 쉬다가 4년여 동안 시각 장애인 콜택시 운전을 했다. 학교 보안관에 지원한 적도 있는데 선발이 안 되었다. 지금은 은행 업무와 유사한 일을 기간제로 근무하고 있다.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고 있다. 남편은 화분이 밖으로 옮겨진지 몰랐다가 저녁을 먹은 후에 발견했다. 뭐라고 반응하든 각자 있어야할 자리가 따로 있다고 말할 터였다. 남편은 어떻게 무거운 화분을 들었냐고만 했다. 제자리를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힘든지 모르게 번쩍 들어다 날랐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