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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지워지지 않는 밀도 높은 시간여행

풀등이 드러나는 대이작도

by 박경화

대이작도 풀등

핸드폰 사진을 정리했다. 해를 넘긴 기록들이 작은 기기 안에 차고 넘쳤다. 새로운 것을 채우기 위해 하나씩 지우다보니 불필요했던 것들이 많았다.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 사진도 있었다. 굽이져 흐르는 계곡물이나 햇살 반짝이는 파도 영상들도 용량이 커서 지우기 바빴다. 정보를 얻으려고 찍어둔 신문기사들도 가차 없이 사라졌다. 굳이 한 장소에서 비슷한 장면을 여러 개 찍었어야했나 싶기도 했다. 무조건 남겨서 다시 보자는 생각은 욕심으로 여겨졌다. 잠시 멈추고 쉽게 지울 수 없는 사진이 남은 것은 그나마 여러 번 셔터를 눌렀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더 충실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후회와 수시로 정리하는 습관이 부족했다는 아쉬움도 남았다.

붙잡고 싶었던 순간들도 빨리 자나가기를 바랐던 시간들도 모두 흘러갔다. 시간은 흐른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견해도 있다.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고 규정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어디서든 동일하게 과거와 현재, 미래의 순서로 벌어진다고 생각하는 시간에 대한 상식들이 틀렸다고 말한다. 사물이 아닌 사건으로 이루어진 세상과 인간의 문법에만 존재하는 시간이라는 변수가 없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시간을 의식하고 끌려가는 일상에서 잠시 멈추고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보게 했다. 시간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에 따라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사실에는 공감했다. 반복되고 변화가 없는 상황이라면 시간은 금방 지나가고 긴장하고 변화가 많으면 시간은 더디게 흐른다. 대이작도여행을 하며 시간의 수치와 밀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서 떠나는 섬은 언제든지 갈 수 있다 여겼지만 선뜻 나서기 어려웠다. 9월 초, 대이작도를 여러 번 다녀온 여행작가님이 인솔하는 일정에 합류했다. 대이작도, 풀등.. 들어본 듯 하면서도 섬의 분위기도 짐작이 안 간 채 8시 30분에 배를 탔다. 페리호는 자월도와 소이작도를 거쳐 1시간 20여분 걸려 대이작도에 도착했다. 둑에는 필름 형태의 타일을 테두리 삼아 '섬마을선생님 촬영지'라는 글씨와 영화장면들이 새겨져 있었다. 수많은 섬 들 중에 대이작도가 섬마을로 선정되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섬 입구에 빨간 색 대형 보트가 대기하고 있었다. 풀등이 나타나는 시간대를 맞추기 위해 서둘러 떠나야했다. 일행들은 11명이 정원인 보트를 타고 구명조끼를 착용했다. 뱃전에 부딪히는 물살을 맞으며 가면서 바다 한가운데 떠있다는 풀등은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풀등은 '풀치'라고도 불렸다는데 '갈치의 새끼'라는 뜻이 있다. 풀등의 기다란 형태가 갈치와 유사해서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다. 풀은 모래의 의미도 있어 '모래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10여분 지나자 눈앞에 서서히 풀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풀등은 완전히 드러나면 길이 7km, 폭이1km로 100만 제곱미터에 이른다. 선장은 주의사항으로 구명조끼를 계속 착용할 것과 빠질 우려가 있으니 바다 가까이 가지 말 것을 강조했다. 주어진 시간은 10시5분에서 35분 까지 30분이었다. 드넓은 풀등 위를 맨발로 걸었다. 동행들도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여럿이 있으면서도 대자연속에서 바람소리를 들으며 온전히 혼자인 것 같은 비현실적인 순간이었다. 바다 위를 걷는 듯 푹푹 들어가는 모래의 감촉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생기고 변하고 사라지지만 풀등 위에서는 더욱 확연히 실감났다. 정해진 시간에 드러난 바다 위 모래언덕은 다양한 무늬를 보여주고 작은 게들은 구멍을 파서 몽글몽글 모래알갱이들을 만들어내지만 밀물이 밀려오면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절박한 심정으로 주어진 시간에 그 순간을 느끼고 기억에 새겼다.

식사를 하고 갯티길을 걸었다.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정겨운 부둣가를 지나 데크로드를 거쳐 숲길로 접어들었다. 소나무 사이로 멀리 보이는 바다위로 물에 잠겨가는 풀등이 보였다. 바다 한가운데 얇은 띠 형태가 보였다. 잠시 후면 완전히 모습을 감출 터였다. 풀등에서 경험한 시간이 아득하게 여겨졌다. 마을을 지나 최고령 암석을 보고 작은풀안해수욕장을 거쳐 삼신할미약수터를 둘러봤다. 4시 20분배를 타고 인천연안여객터미널로 돌아오며 눈을 감고 대이작도의 풍경을 떠올려보았다. 여러 이미지 중에서 기억에 뚜렷이 남는 것은 풀등에서 본 작은 조개의 움직임이었다. 주어진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껏 제 갈 길을 가며 곧 사라질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대이작도여행 중에 풀등에서 주어진 30분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밀도 높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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