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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을 느끼며 걷는 길

강화 나들길, 광성보에서 초지진

by 박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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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진에서 초지진까지 강화나들길



연말연시에 사람들은 인사를 나눈다. 하루 차이지만 해가 바뀐 다는 것은 마무리와 또 다른 시작의 커다란 분기점을 통과하는 것이기에 되도록 좋은 말을 주고받는다. 복 많이 받으라는 의례적인 문자 들 중에서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 있었다. 나태주 시인의 ‘새해인사’를 인용한 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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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 다섯 개나

공짜로 받았지 뭡니까

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

그리고

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은

덤으로 받았지 뭡니까

이제. 또다시 삼백예순 다섯 개의

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 입니다

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덤으로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잘살면 되는 일입니다

그 위에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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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크게 달라질 것을 기대하거나 대단한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살자는 의미로 다가왔다. ‘해님과 달님이 공짜’라는 표현에서 중요하고 가까운 것의 가치가 실감나게 다가왔다. 새해에는 햇빛을 더 많이 접하고 느껴야겠다는 다짐도 들었다.

하루의 시간대마다 햇빛의 느낌이 다르다. 정신이 맑아지는 새벽의 빛, 생기 가득한 오전의 빛, 열정적인 정오의 빛, 부드럽게 한풀 꺾인 오후의 빛, 아쉬움으로 물드는 노을 빛. 하루 종일 해의 움직임과 빛의 변화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직장 생활 하는 동안에는 실내에 얽매여있는 것이 아쉬웠다. 퇴직 후에는 원할 때 훌쩍 떠나서 마음껏 햇빛을 느끼며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양한 것을 베우고 여러 동아리에 가입하다보니 스스로 만든 제약으로 마냥 자유롭지 않았다. 수지 홉킨스의 책에 나오는 ‘더 킷 리스트(duck it list)’라는 표현은 ‘살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의미한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인 ’버킷리스트‘의 반대 개념으로 비우기에 해당된다. 새해에는 강박적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며 쫓기기 보다는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며 여유롭게 햇빛을 더 느끼고 싶다.

아파트 중간층에 살아도 겨울에는 해가 앞 동 건물에 가려져 햇빛을 늦게 맞이한다. 해가 솟아올라 베란다와 거실에 어느 정도 빛을 비추다가 기울어가면 다른 건물 뒤로 사라진다. 아파트촌의 산책코스도 항상 햇빛이 비추는 곳은 드물다. 하루 종일 해를 느끼며 걷고 싶을 때는 강화도가 떠오른다.

김포골드라인을 타고 구래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탔다. 초지대교 정류장에서 하차해 환승 장소와 배차간격을 검색했다. 시간이 지연될 것 같아 택시를 타고 광성보로 갔다. 강화 나들길 2코스의 일부인 광성보에서 초지진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광성보(廣城堡)는 강화 해안의 5진 7보의 하나로 1658년(효종9)에 설치되었다. 보(堡)는 일정한규모를 가진 부대의 단위이고 지휘소, 병사의 주둔지, 창고 등을 포함했던 곳이다. 광성보의 정문 안해루(按海樓) 천정에는 화려한 황금용이 그려져 있었다. 안해루 옆 광성돈대 안에서는 대포(홍이포), 소포, 프랑스군이 쓰던 불랑기를 볼 수 있었다. 돈대(墩臺)는 경사면을 절토하거나 성토하여 얻어진 계단 모양의 평탄지를 옹벽으로 받친 방위시설이다.

안해루 옆으로 난 오르막길 양편에 키 큰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고개를 젖혀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면 짙푸른 잎들 사이로 오전의 태양이 언뜻 언뜻 존재를 드러내며 맑은 빛을 쏟아냈다.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길 끝에 보이는 신미양요 무명용사비와 쌍충비각은 아픈 사연을 품고 있다. 1871년 미국이 통상을 요구하여 함대를 이끌고 침공했다. 지휘관 어재연과 그가 이끄는 군사들은 백병전(창, 총검 등으로 싸우는 전투)을 전개하며 맞섰으나 참패했다. 쌍충비의 1기는 강화군민이 건립한 순절비고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 형제의 순절비다. 처절한 전투가 있었던 손돌목 돈대 앞에는 당시를 기록한 사진들이 있었다. 미국 콜로라도 함상 위에서 미군 병사 두 명이 노획한 조선의 수자기(帥字旗)(대장의 군기) 앞에서 총을 들고 서있었다. 조선군의 시체들을 찍은 사진은 처참했다. 손돌목 돈대 주변의 비탈에 휘어진 소나무 너머로 흐르는 물이 보였다. 천천히, 하지만 물은 쉼 없이 흘렀다. 시간도 흘러 후손들은 조선군들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광성포대를 거쳐 물소리에 이끌려 용두(龍頭)돈대 방향으로 갔다. 바다를 향해 용의 머리처럼 길게 난 길을 따라 걷다가 성곽 너머로 물살을 바라봤다. 가까이서 보니 물의 흐름은 빠르고 거셌다. 유리한 위치에 천연요새인 돈대가 있었음에도 신기술로 무장한 외부 침략에 속절없이 당해야했던 과거의 역사가 안타깝게 다가왔다. 성곽을 조금 벗어나니 둔덕 너머 갯벌 어귀에 수많은 새들이 바다를 향해 줄지어 서 있었다. 몇 마리는 바닷물에서 유유히 오가고 있었다. 겨울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작은 섬앞의 수면 위로 햇살이 부서졌다.

나뭇가지에 달린 나들길 표시 리본을 길잡이 삼아 숲길로 올라갔다. 내리막길을 지나자 왼편으로 바다가 펼쳐졌다. 갯벌은 다양한 형태와 무늬와 분위기를 만들며 은빛으로 반짝였다. 갯벌은 정화작용을 하며 '자연의 콩팥'이라 불린다고 한다. 2000년도에 강화갯벌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서 보존한다니 다행이다. 걷다보니 도로 옆길도 나왔고 찻길에서 떨어진 길로 다시 접어들기도 했다. 논에는 겨울 철새들이 낱알을 찾는지 무리지어 오가고 있었다.

덕진진에서 한 숨 쉬어가며 언덕에서 바다를 행해 줄지어 설치된 포대를 바라봤다. 신미양요(1871)때 미국함대와 48시간 동안 치열하게 맞서면서 파괴된 것을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포대마다 당시의 형태를 띈 대포가 설치되었다. 외세와 맞서 나라를 지키려는 간절한 의지가 느껴지는 포대들이다. 덕진돈대의 오른편으로 멀리 초지대교가 보였다. 바다와 땅의 경계에는 지난 가을 무성했을 갈대들이 잎이 마른채로 여전히 군락을 이루어 무리지어 서있었다.

초지진을 향해 걸으면 숲길을 지나 다시 왼편으로 갯벌이 이어졌다. 고요하지만 생명력으로 가득찬 갯벌이다. 움직임이 없는 듯 하지만 반짝이는 물살들이 쉼 없이 졸졸 흘렀다. 너른 논을 지나 초지대교 못미처 초지진(草芝鎭)에 도착했다. 초지진은 안산에 있던 수군기지를 효종7년(1656)에 옮겨 설치했다. 1871년 6월 10 일 미군은 2시간 동안 맹렬한 함포사격을 가하여 조선군을 파괴시킨 후 상륙해서 오후 4시경에 초지돈대에 전투 없이 상륙했다고 한다. 고종12년(1875) 운요호사건 때 상륙을 시도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운요호사건을 이후 우리나라는 주권 상실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병력이 약해지면서 운요호 사건 때 큰 저항 없이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가 안타깝다. 초지진 옆 소나무에는 1870년대 전투 중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포탄의 흔적이 남아있다. 당시의 처절함이 느껴졌다.

갑곶돈대에서 초지진에 이르는 강화나들길 2코스는 ’호국돈대길‘이라고 불린다. 2코스의 일부인 광성보에서 초지진까지의 길을 걸으며 외세에 맞서던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산과 바다, 논과 갯벌을 바라보고 탁 트인 공간에서 해의 움직임을 느끼며 걸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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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돈대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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