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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하 Mar 07. 2016

길을 잃고 방황하는

러덜리스

  나만의 기억으로 오래 남아있는 영화가 있다. 그런 영화는 배우의 열연이나 치밀한 줄거리만으로 구성되지는 않는다. 사실, 그런 것들이 좋은 영화의 전부라면 아마 나만이 몇 번이고 기억을 곱씹어보지는 않을 것이다. 내용이 덜떨어지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날의 분위기와 나의 상태와 맞물려 한참 동안 기억에 머물러 있는 영화도 있는 법이다. '러덜리스'가 딱 그런 영화였다. 보고 또 봐도 왜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꼭 꺼내서 그 때의 감정을 반추하게 되는 그런 영화. 

 '러덜리스'는  혼돈과 불안에 관한 영화다. '샘'은 잘나가는 광고 기획자이자 멋진 아버지이다. 그런데, 아들이 학교에서 총기사고를 일으키고 죽는다. 혼자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걸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누군가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피해자 가족들의 원망섞인 울음과 자신의 아들을 여태껏 이해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그는 처참하게 무너진다. 그리고 아들을 위로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게 감정의 혼돈과 파고를 겪으며,  그는 요트에서 노숙생활을 하고 페인트칠로 하루하루를 먹고 사는 이로 전락한다. 

 그렇게 죽은 듯 살다가, 그는 전 아내를 통해 아들이 생전에 녹음해두었던 곡들을 받는다. 그리고 그 곡들을 조심스레 꺼내 부르다 언젠가 술집에서 그 중 하나를 부르게 되고, 그 노래에 반한 '쿠앤틴'의 오랜 설득에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그 밴드의 이름이 '러덜리스'이다. 그렇게 그의 혼돈과 불안은 잠깐 멈춘다. 당장 그가 부르고 있는 노래가 아들의 것이라는 사실도 잠시 잊은 채로. 밴드는 인기를 얻고, 그의 입에 미소가 서서히 번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것도 잠깐이다. 밴드 멤버들이 여태껏 자신들이 연주해온 곡들이 총기사고를 일으킨 그의 아들이 만든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밴드는 해체되고, 샘은 다시 수면 밑의 삶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에서, 그는 아들의 묘비에 찾아가 흐느끼고 여태껏 자신을 감싸고 있던 혼란을 받아들인다. 여태껏 살인범인 아들을 위로해야할지 선택조차 하지 못했던 그가, 이제서야 아들을 껴안으며 엉엉 운다.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자신이 처음 노래를 불렀던 그 술집에서 지금부터 자신이 부를 곡이 총기사고를 일으킨 아들의 것임을 미리 고백한다. 그리고 모든 혼란과 불안을  받아들인 채 덤덤히 노래를 부른다. 

 내가 이 영화를 봤던 건 8월의 어느 날이었다. 영화를 보고 밖으로 나왔더니 햇볕은 눈이 부신데, 공기는 습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무거웠다. 그리고 내가 그 때 느끼고 있던 감정들 또한 온통 무거운 것들 뿐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20대의 시작이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해볼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는 각종 재료들로 만든 수저들로 파헤쳐진지 오래였고,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소망은 벽에 붙여놓은 껌 은박지 마냥 긁으면 긁을수록 벗거졌다. 누군가와 헤어진 뒤 생겼던 감정의 기복은 몇 달 째 요동치는 중이었다. 모든 것이 신기루 마냥 공허하고 흔들렸다. 

  '러덜리스'는 그런 혼돈과 불안을 받아들이는 계기였다. 그리고 삶을 관망할 수 있는 단순한 진리를 던져주었다. 자신의 아들이 여럿을 죽인 살인범일지라도 내 아들이니 위로는 해야겠는데, 또 피해자들을 생각하니 아들이 원망스럽고, 그런 아들의 아버지인 나도 죄가 있는 것 같고.....와 같이 모든 것들이 뒤엉켜 있는 상태에서,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은 그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마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유연함에 있다는 것 말이다. 매일이 즐겁고 행복할 수는 없기에, 좋은 것을 가지면 나쁜 것 또한 가져야 한다는 황금률을 새삼스레 알았다. 

 그때부터 웬만한 일에는 심장이 뛰도록 벅차거나 미치도록 괴롭지 않았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더 이상 무언가에 대한 막연한 낙관이나 부정은 하지 않게 됐다. 주위의 모든 것들은 뒤섞이면서 침전과 부유를 반복했다. 가져야 할 것과 껴안아야 할 것들은 떠올랐고, 버려야 할 것과 밀쳐내야 할 것은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가끔 그런 것들이 다시 뒤섞여 그 날 처럼 온통 습하고 무거운 것들로 가득찬 것만 같은 때도 있지만, 이내 그 어수선함은 정리되고 각자 자기의 위치를 찾아갔다. 그렇게, 지금은 별 일 없이 잘 산다.  

 글을 쓰면서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영화를 한 번 더 돌려봤다. 샘이 마지막 장면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여전히 아리고 저릿하다. 그가 부르는 'Sing along'은 다음 구절로 끝난다. 'What is lost can be replaced. What is gone is not forgotten. I wish you were here to sing along. My son.' 잃고, 사라지는 것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혼돈의 일부다. 어떻게든 그것들은 나름대로 우리 곁에 늘 존재한다. 이건 '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 그렇다. 어지럽고,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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