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
이것은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먼저 알아둘 것은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이 말이 무색하게, 영화는 줄곧 연애하는 두 남녀의 모습만을 비춘다. 그러나, 결말에 가서 우리는 이 영화가 ‘사랑’에 관한 것이 아님을 알 수있다.
감사 편지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톰은, 사장의 새 비서인 썸머에게한 눈에 반한다. 톰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한다. 썸머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는 일은 그녀에게 의미 없는 일이다. 그렇게 톰이 설렘과 좌절을 반복하던 중, 술김에 그의 친구가 썸머에게 톰의 짝사랑을 폭로한다. 다음날, 썸머는 톰에게 입을 맞춘다.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날도 둘은 같이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며 손을 잡고 입을 맞춘다. 그 과정에서, 썸머는 누누이 톰에게 이것이 진지한 관계가 아님을 강조한다. 그와 썸머는 친구일 뿐이다. 그래도 톰은 썸머가 마냥 좋다. 굳이 연인관계를 규정지을 필요는 없다고 되뇌이며, 관계를 이어나간다. 톰과 그녀는 연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썸머는 톰에게 이별을 고한다. 톰이 그녀를 연인으로 생각한다는 태도를 보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톰에게 썸머는 운명이다. 그는 이별을 덤덤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사귀는 동안 자신이 간과했던 것을 되짚어보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것은 없다. 그는 충실한 남자친구였다. 썸머에게 톰은, 운명이 아니다. 그녀는 톰을 연인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그녀에게 톰은 그저 친구일 뿐이었다. 톰은 이를 인정하지 못해 괴롭다.
오해하지 말자. 사랑은 운명이라는 거대한 단어와 동의어가 아니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여기 존재한다. 내가 운명이라 생각했던 상대는 정작 나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반대의 상황도 얼마든지 발생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톰을 운명이라 생각하지 않노라 말했던 썸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한다. 그리고 톰이 예전에 말했던 ‘운명의 상대’라는 말을 이제는 이해했음을 고백한다. 썸머는 톰의 행복을 바라며 다시 떠난다. 당연히 톰은 어이가 없다. 그는 이제 운명을, 그리고 필연을 믿지 않는다. 500일은 그녀를 만나고 헤어지면서 더 이상 타인을 과대평가하지 않게 되는, 관계의 환상에서 벗어나게 되는 기간이다. 그리고 다시 1일, 톰은 호감이 가는 여자인 아텀(autumn)을 만난다. 그녀는 운명이 아니다. 여름 다음에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계절인 가을일 뿐이다.
이 영화는 ‘썸머’를 경험해봤던 모든 이에게 씁쓸한 사실만을 안겨준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관계를 받아들이는 두 개인의 이야기일뿐이다.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상대를 만난다. 상대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생각한다. 운명을 규정짓기 위해 연인이라는 관계를 만든다. 그리고 그 역할놀이에 충실한다. 이별 뒤, 그 역할에 충실했던 쪽이 마음이 더 아프다. 그 혹은 그녀라는 이름의 천장이 허물어져 고통스럽다. 운명이라는 거대한 대기 안에 존재했던 그 혹은 그녀라는 세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였다. 연인이라는 팻말을 목에건 두 사람이 있을 뿐이다. 사랑만 이런 것은 아니다.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애정결핍이며, 관심을 쏟고 받을 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관계를 부풀리지는 말아야 한다. 내가 만든 관계에 상처 받지 말자는 이야기이다. 이는 ‘나를 사랑하자’와 같이 뻔한 말과는 다르다. 순간의 감정에 빠져, 우리는 종종 관계를 마음대로 규정한다. 그리고 상대가 예상 범위에서 벗어나면, 톰과 같이 고통스러워한다. 내가 착각한 관계로 고통 받지 않기 위해, 우리는 상대를 과대평가하지도 과소평가 하지도 말아야 한다. 운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타인은 나와 다르다. 막상 새로운 관계의 설렘을 느끼고 나면 잊게 되는 이 말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