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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잠 Mar 01. 2019

ㅌㅅ 후 제주도의 한 달 #7

8일 차 - 비는 오는 대로, 마음은 가는 대로

 한라 토닉의 달달함이 아직 입 끝에 남은 아침. 

 고양이와 빗소리에 눈이 떠졌다. 서울에서는 참 보기가 힘든 비였는데, 제주도에서는 벌써 두 번째 맞는 비다. 이미 경험했던 것이지만 비가 오는 제주는 완전히 새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비가 가지는 어쩔 수 없는 우중충함과 동시에 무언가 비장함이 감돈달까. 나에게는 빗소리만 들어도 충분한 아침이지만, 2박 3일 빠르게 즐겨야 하는 동생에게는 한 시가 아깝다.


 예상치 못한 비로 인해 어젯밤에 세웠던 계획은 모두 무산됐다. 사실 세우면서도 그다지 끌리지 않았던 계획이었기 때문에 아쉬움은 없었다. 다시 갈 곳이 없어진 우리는 우선 편안한 해장을 위해 월정리로 향했다.

해장 돈까스와 비오는 월정리 해변 (우산이 없어 나가질 못하겠다ㅠㅠ)


 조금은 그친 줄 알았던 비가 차를 주차하자마자 다시 쏟아져서 바로 앞에 있는 흑돼지 돈가스 집으로 들어갔다. 생각지 못한 고급진 플레이팅에 놀랐지만,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양에 두 번 놀랐다. 맛은 썩 괜찮으니 양이 적으신 분들은 가보시는 것도 좋겠다.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월정리 해변에는 "MOU MOOM" (머묾)이라는 아주 큰 카페가 있다. 2~3층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풍경이 일품이다. 유명 관광지만 아니라면 아지트 삼아 며칠이고 오고 싶었을 텐데.


 금방이라도 그칠 것 같던 비는 쉬이 그치지 않았고, 하늘은 오히려 더 깜깜해져 갔다. 그렇지만 차를 돌릴 순 없기에, 동생의 추억을 찾아 성산으로 향했다. 4년 전 20살을 맞아 처음 방문한 제주도에서 그는 성산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렀더랬다. 한바탕 파티 뒤 근처 게스트하우스 주인아저씨가 데려다준 버스 정류장에서 어떤 여성분을 만났고, 하루였지만 아직 기억에 남을 여행 겸 데이트를 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여행지의 로망이고 아무 의미도 없지만 성산에서 성산의 추억을 곱씹어 봤다. 


 아무리 뭘 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방문했지만 이대로는 정말 아무것도 못하고 갈 것 같은 불안감에 우리는 황급히 관광지도를 펼쳤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주도에는 카트 체험장이 정말 많다. 평소라면 무시했겠지만, 비가 온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끌렸고, 네이버로 예약하면 무려 60% 할인해준다 하여 우리는 바로 달려갔다. 슬프게도 이런 생각은 우리만 한 것인지 카트장은 매우 썰렁했고, 그 넓은 트랙을 우리 둘이서 장악했다. 3바퀴째 쯤이었나, 아무도 안 오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 커버린 탓인지 카트는 범퍼카 마냥 느릿느릿했고,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씩 내린 비에 몸이 젖어오면서 몸이 오들오들 떨리기 시작했다. 

 정신 승리를 위해 애써 웃으면서 하하하 한 번쯤 해볼 만하네 라고 서로 위로했지만, 만약 60%가 아니라 정가로 주고 탔다면 분노 조절을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차에 다시 탈 때마다 우리는 "이제 우리 뭐해?"를 너무 많이 말한 탓에, 이제 무엇을 할지 묻지 않기로 했다. 다만, 서귀포의 대형마트에서 어제 다 마셔버린 진로 토닉을 충전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고, 네비를 켜지 않은 상태로 달리다가 끌리는 곳이 있으면 중간중간 들리기로 했다. 남들이 한다면 낭만적이네 라고 할 법한 이야기지만 내 이야기가 되니 상당히 난감했다. 좋은 곳이 없으면 어떡하지? 비 오니까 여기가 다 거기인데.. 지금이라도 집이나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묵묵히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가 문득 멈춘 조그마한 항구.

그렇지만 뭐라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라며 돌아가는 길이지만 해안도로를 따라 느릿느릿 나아갔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세화리라는 곳에 있는 옥돔 마을이었던 것 같다. 시골 이름치고 힙하게 세화 1, 세화 2, 세화 3으로 나뉜 것이 끌려서 차례차례 도장깨기 하듯 마을들을 들리던 와중에 위 사진과 같은 옥돔 마을의 항구를 발견했다. 비가 살짝 그친와중에 먹구름을 품고 있는 항구가 뭔가 비장한 듯했고, 그 비장함은 우리만 느낀 것이 아닌지 여러 차량들이 여기저기 주차해 있었다. 갈매기들의 울음소리와 비바람에도 잔잔한 파도가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서귀포의 2 마트에 도착해 진열된 진로 토닉을 몽땅 싹쓸이한 우리는 다시 공황상태에 빠졌다. 시간은 벌써 오후 5시. 그렇지만 어떤 일이든 엔딩이 괜찮으면 다 괜찮아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의 오늘 엔딩은 실패할 수 없는 "흑돼지 구이"였다. 집 근처에 가기 좋은 곳은 역시나 함덕. 함덕의 나름 유래 깊은 "복자 씨 흑돼지"를 찾아갔다.


백돼지 1근, 흑돼지 1근을 시켰었는데, 무엇이 흑돼지고 백돼진지는 알 수 없다.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우리가 찾아본 10여 개의 흑돼지 구이집의 정보에 따르면 제주도 흑돼지 가격은 모두 동일하다. 흑돼지 1근에 54,000원, 백돼지 1근에 42,000원. 막 너무하네 싶을 정도로 비싸지도 않지만 결코 싸지도 않은 가격. 거기에 근고기라서 그런지 처음에 나오면 이게 한 근이라고..? 싶을 수 있다. 그렇지만 백돼지든 흑돼지든 맛은 아주 기가 막힌다. 흑돼지 1근에 김치찌개, 공깃밥을 시켰으면 아주 배불렀을 텐데, 흑돼지 1근이 사라질 때쯤 한라산 2병을 비운 우리는 또 헛된 용기를 얻어 백돼지 1근을 시켰고, 아주 호화롭게 고기로 배를 채웠다.

 제주에서 차를 렌트해서 다니다 보면, 저녁에 술을 같이 못 마시는 것이 매우 슬플 때가 있다. 대리는 나에겐 아주 생소한 문화였고, 술 취한 와중에 다른 사람이 내 차를 운전한다는 것이 무섭기도 하고 뭔가 민망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제주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가격이 매우 비싸다! "복자 씨'에서 우리 집은 겨우 2KM, 차로 3분 거리였는데도 15,000원을 받아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돼지와 한라산은 진리다.


 종합 평점: ★★★★★★


 24살과 28살의 고민은 생각보다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에 대한 고민과 각자가 가지고 있는 약간의 여유, 행동할 때 못했거나 하지 말았어야 했을 때 했던 것들에 대한 후회. 그런 답 없는 생각들에 대한 하소연을 늘어놓다 보면 결국엔 여자 이야기.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은 그저 대화만으로도 충만히 채워지고, 빠르게 흘러간다. 비록 조금은 민망할 수 있는 이야기를 꺼내놓더라도, 동생에게도 나에게도 조금씩은 마음이 편해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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