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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잠 Feb 28. 2019

ㅌㅅ 후 제주도의 한 달 #6

7일 차 - 정체성 혼란

제주도에 온 지 1주일.

 다시 공항에 왔다. 집에서 약 30분 거리의 공항이지만 1주일 만에 3번이나 공항을 온 것은 또 다른 방문객을 맞이하기 위함이다. 이제는 네비 없이도 공항까지 올 수 있을 것 같다.  

 처음 제주도 한 달 살이를 계획할 때, 한 달 동안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한 약간의 무서움도 있었다. 기세 등등하게 떠나지만 한 2주쯤 지났을 때 너무 심심하고 외로워서 서울을 가고 싶어 지면 어떡하지에 대한.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동네방네 제주도 살이를 알리고 다녔다. 사실 그냥 이 2월 20일 3월 20일 기간에 제주도를 정말 올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었다. 

 완벽한 오산이었던 거다. 집과 차가 해결된다는 이득 때문인 건지, 많은 이들이 방문 의사를 비쳤고, 오겠다는 것을 오지 말라고 하기도 좀 그래서 어물쩍 대다 보니 기세 좋게 비행기를 예매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렇게 오늘은 동아리 후배인 이 친구가 왔다. 혼자 있고 싶은데 왜 자꾸 오냐는 것은 아니고, 물론 오면 또 즐겁게 놀다 갈 터인데, 다만 그냥 점점 주객이 전도되는 느낌? 


 4살이나 어린 이 후배는 내가 전역하고 나서 시작한 동아리 활동을 통해 급격히 친해졌고, 동아리가 끝나고 이 친구가 군대를 갔을 때도 휴가 때마다 꾸준히 만나면서 친분을 유지해왔다. 다음 주 개강을 앞두고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 잡으러 제주를 찾은 것 같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친구는 내 또래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들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고마운 동생이다.


 제주도에 오는 것은 비행기 연착과의 싸움이다. 실 비행시간이야 40분 ~ 1시간으로 잠깐 존다 싶으면 도착하지만, 편수가 몰려서 인지 운이 안 좋으면 그 비행시간만큼 연착되는 경우가 많다. 4시쯤 도착했을 이 친구도 4시 30분에야 짐을 찾을 수 있었다. 공항이 일정 시간에 수용할 수 있는 편수는 제한되어 있을 것이고, 그 편수만큼 운행일정을 편성했을 텐데, 왜 자꾸 연착이 되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힘겹게 차에 태우고, 2박 3일 일정을 물었다. 아직은 방문객을 데리고 제주도는 여기가 좋아! 이게 맛있어! 하면서 데리고 다닐만한 내공이 없기 때문에, 그저 방문객의 계획에 따라 이리저리 같이 관광하고 다닐 예정이다. 그렇지만 당황스럽게도 이 친구는 아무 일정이 없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스타일이랄까. 어디로 갈지 몰라 일단 집 쪽으로 차를 몰다가, 제일 만만한 함덕 해변에 들렸다. 그리고 또 제일 만만한 제주 향토음식인 고기국수를 먹였다. 고기 국수는 국수면서도 제법 풍족하게 배가 부르기 때문에 관광지 음식치고 가성비가 상당히 좋다.

 제주도에서 그간 한 것들을 말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 장엄한 스케일의 방탈출 이야기가 길어졌다. 나름 이런 류를 좋아하는 이 후배는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어차피 계획 없던 우리는 오늘 밤에 바로 하기로 했다. 다만 이미 한번 해본 나로서는 무지 지루한 시간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학교 커뮤니티를 활용해 즉흥 방탈출을 떠날 사람들을 모집했다.

 참 고맙게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고,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들의 제주 여행 계획에 도움을 준 것 같다. 꼭 제주도에 오면 이 방탈출을 해보시길..! 물론 2시간 후의 방탈출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못 구했지만.. 사실 제주도에 여행 왔다고 해도 누가 제주도까지 와서 학교 커뮤니티를 보고 있겠는가.

 

 동반자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미 이 방탈출에 꽂혀버린 동생을 위해 나는 다시 제주관광대학교에 방문했고, 운영하고 있는 원어민 교수와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2번이나 하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란다. 다행히도 동생은 내가 처음 했을 때처럼 즐거워했고, 2시간 30분 만에 탈출했다. 동생은 감격한 듯했지만, 나는 앞으로 방문하는 사람들한테는 이 방탈출 이야기를 웬만하면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미 밤 12시가 넘어버린 시간, 그래도 그냥 잠들 수 없어 집에서 몇십 병씩 쟁여 둔 한라 토닉을 마셨다. 부지런히 내일의 계획을 세우고, 깔끔하게 잠을 청했다.

 

 점점 내가 제주도에 손님으로 온 것인지, 방문객들을 안내하는 호스트가 된 것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 간다. 이 와중에도 불안감은 조금씩 커져간다. 속세를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설치해둔 취업 관련 어플에서 취업 공고가 계속 울린다. 상반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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