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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잠 Mar 02. 2019

ㅌㅅ 후 제주도의 한 달 #10

11일 차 - 미세먼지로 인한 강제 칩거와 강제 성찰

 미세먼지 '매우 나쁨'

 어제 받은 미세먼지의 충격으로 오늘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미세먼지 농도를 체크했다. 그 정도 바다를 건너는 것으로는 미세먼지를 떨치기는 역부족이었는지, 제주도도 육지와 똑같이 미세먼지로부터 고통받고 있었다. 혹시로 하는 마음으로, 창문을 열어 보았지만 수평선조차 흐릿할 만큼 미세먼지는 자욱했다. 5년 정도만 지나도 하늘색은 우리가 하는 하늘색이 아닐지 모른다.


 '푸른 밤'으로 유명한 제주도에서 언제까지 미세먼지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인지 하는 마음에 일기예보를 검색했다. 다행히도 오늘 밤부터 내일 밤까지 비가 내일 예정이고, 그 비는 당분간이라도 미세먼지를 씻어 줄 것이다. 내일이면 12일 차, 12일 동안 비가 3번 오니 4일에 한 번. 지금까지 우산을 안 사고 버티고 있었는데 우산을 슬슬 장만해야 하나 싶다.




 어쨌든 모레면 상쾌한 제주를 되찾는다는 희망을 품고, 오늘은 날이 이리되었으니 반강제적으로 칩거하기로 했다. 어제 정한 아지트 1순위의 식당 겸 카페가 여전히 휴업 중인 것을 확인하고, 오션뷰만 빼면 완벽한 카페에서 핸드 드립 커피를 테이크 아웃했다. 테이크 아웃한 커피를 마시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S**에 다니고 있는 대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동기로부터 전화가 왔다. 가만히 있어도 2주에 한 번쯤이면 술 먹자고 든 힘들다고 든 연락이 오는 친구라 슬슬 전화가 올 때다 싶었다.

 퇴사하고 제주도에 있는 것을 뻔히 아는 친구라 이번에도 회사에 뭔가 힘든 일이 있구나 싶었다. 이 친구를 보면서 회사는 공평하다는 것을 느꼈다. 나를 포함해 내 주위에 취직한 누구보다도 신입사원임에도 돈을 많이 벌지만,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엄청나게 오래 일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바쁘면 빨래도 2주에 한번 몰아서 근처 코인 런더리에서 한다던가. 

 이번에 이 친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갤럭시 S10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는 아이폰 Xs, Xr로 고통받더니.. 이건 무슨 새 폰 나올 때마다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다 보면 이 친구는 항상 내 퇴사 결정이 매우 잘한 것이며 부럽다고 한다. 이 친구의 이런 말에는 본인은 그런 용기가 없어서 못한 것이 아니라, 아무리 힘들어도 퇴사하는 건 너무 큰 리스크라는 계산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친구의 말에는 아무런 악의가 없기 때문에, 가끔씩 이 친구와 대화하다 보면 현실에 대한 적절한 긴장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긴장감이 무색하게도, 집에 돌아와 운동을 하고 아점을 먹고 손 글씨를 교정하고 있노라니 잠이 쏟아졌다. (손 글씨라는 건 원래 갑자기 훅 좋아지는 건가..? 나아질 기미가 없다.) 잠깐 내적 갈등이 들었지만, 쿨하게 낮잠을 청했고, 알람 없는 낮잠은 끝날 줄 몰랐다.

 햇빛이 노래질 때쯤 일어난 나는 일일 최소 할 일을 마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하루 할 일이라기엔 민망할 정도로 적은 일들이지만 이 정도라도 해야 잠들 죄책감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2.3층을 통째로 터서 월정리해변이 훤히 보이는 'MOU MOON' (머문)

 11일 차 주제 함덕이 지겨워진 나는 이번엔 약간 거리가 있는 월정리 해변으로 떠났다. 거리가 있다지만 방문객이 있을 때마다 방문해서 벌써 3번째 긴 했다. 그때 잠깐 들렸던 'MOU MOON'으로 들어왔다. (이 글은 여기서 쓰고 있다.) 저번에 왔을 때는 내부 인테리어나 뷰가 엄청 좋아서 분명 관광객들로 북적일 것이라 생각해서 아지트 후보에서 지웠는데, 그때도 오늘도 생각보다 사람이 없고 조용하다. 문제는 그때도 오늘도 둘 다 비가 오고 있었다는 것인데.. 날씨가 좋을 때 한번 와서 크게 시끄럽지 않으면 아지트로 삼아도 괜찮을 듯하다.

 

 1 달이라지만 2월이 낀 탓에 조금 짧은 28박 29일 중 11일 차. 아직 절반도 오지 않았지만 조금 이른 중간점검을 해보았다. 

 1. 할 줄 알게 된 요리 2가지.. (된장찌개, 군만두와 스테이크는 사실 요리라기엔 너무 간단하니 둘이 합쳐 1개로 치겠다.)

 2. 나아질 기미가 없는 손글씨..

 3. 가져온 책 7권 중 1권 완독..

 4. 비운 술 병 '한라산'으로만 8병..

 5. 브런치 작가 등단 및 글 10개 발행! (구독자 수 4명! 감사합니다!)

 6. 처음 기획 예산 300만 원 위 태위태.. (300만 원까지 65만 원 사용 가능)


 음.. 생각지 못하게 초반부에 방문객이 많았다는 것을 변명이라면 변명으로 해보겠다. 앞으로의 약 18일은 대부분 혼자니까 훨씬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살아야겠지...!

 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산 문제가 꽤나 발목을 잡는다. 어차피 퇴사했고 당분간은 백수라면 모아 놓은 돈은 까먹을 수밖에 없는데 이게 예상보다 쓰기가 너무너무 아깝다. 조금이라도 아낄까 하는 마음과 사치까지만 아니라면 나를 위해 크게 신경 쓰지 말자는 마음이 순간순간 부딪히고 있다.

 어쨌든 상당히 좋지 않은 중간 결과임은 틀림없기 때문에, 반성해야겠다.




 회사를 다니면서 배운 가장 큰 2가지는, 책임감과 우선순위였다.


 회사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라면서 나를 떠받들어 주던 연수가 끝나고 처음 현업으로 떨어졌던 그 첫 날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무엇이든 혼자 찾아내고 알아내야 하는. 어떻게 해서 알아내서 그 일을 해내고 나면 너무 아무것도 아니라서 성취감보다는 오히려 자괴감이 드는. 그건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불친절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으레, 이 인원으로 이 일들을 해내고 회사에 이런 수치의 보고를 하려면 이렇게 일을 해야 했다. 그래도 몇 개월 동안 암흑과 같은 굴레 ("전에 한 거 찾아봤어? 왜 찾아보지도 않고 물어봐?" -> "이런 건 물어보고 해야지 왜 너 마음대로 해?")를 겪고 나자, 좋게 포장하자면 책임감이라는 것을 갖게 된 것 같다. 그저 내가 맡은 일을 끝까지 하는 자세가 아니라, 거기서 무엇이 부족한지,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는지 까지 생각하는 능동적인 책임감을 말이다. 물론 배운 것과 앞으로 계속해나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겠지만.


 직무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하던 영화 배급업 중 해외 세일즈 업무는 그 하루 안에서도 시간 단위로 데드라인이 몰려왔다. 아침에 출근하면 지난밤에 해외 곳곳에서 온 메일들을 체크하고, 어제 내가 다 못한 일과 합쳐서 목록을 쭉 세우고, 우선순위를 세워서 처리를 해야 데드라인을 넘기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업무적으로는 단순히 더 급한 일, 덜 급한 일 줄 세우는 것이었지만, 이게 습관이 되자 생활하는 데 있어서도 우선순위를 명시적으로 딱 생각하게 됐다. 이 순간의 우선순위, 제주 1달 살이의 우선순위,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우선순위. 아침에 30분이면 세우던 하루 업무 우선순위와는 다르게 이런 우선순위는 항목을 정하고 줄을 세우는 데만도 얼마나 걸릴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업무처럼 이 항목들에도 내가 인지하지 못한 데드라인이 있을 테니, 다만 이 한 달 동안 데드라인이 지나기 전에 우선순위를 확실히 세우길 바랄 뿐이다.


아직 책을 읽지 못했는데, 카페가 운영시간이 끝났단다. 

내일도 비가 올 테고, 비가 오면 여기는 내일도 한적하겠지. 

특정 카페 홍보는 아니에요. 그저 제가 머물 곳이 필요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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