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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잠 Mar 04. 2019

ㅌㅅ후 제주도의 한 달 #11

12일 ~ 13일 차 -  가장 분명한 길

 오랜만에 맡는 맑은 공기. (는 잠시)

 서울에서 이미 익숙해진, 해가 뜨면 미세먼지가 창궐하고 공기가 맑으면 비가 오는 패턴이었다. 제주에서도 공기가 맑다는 것은 비가 온다는 뜻이었다. 원래 오늘은 서귀포에서 배를 타고 마라도에 가서 "무한도전"의 추억을 되새기며 짜장면을 먹을까 했지만, 비도 오는 데 힘들게 가봐야 우울해질 것 같아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10일 차까지는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갈까 했지만, 왠지 오늘은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았고, 이 기간 동안 할 것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어젯밤에 지난 며칠 동안 밤 잠을 방해했던 고양이 울음소리의 근원을 찾아냈다.

우리 집 뒷베란다에서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

난 분명 아무것도 한 적이 없는데 4마리나 (큰 검 은애 하나, 큰 갈색 둘, 조그마한 연갈색 하나) 우리 집 뒷베란다에서 저렇게 올라와서 밥 달라고 울고 있었다니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혹시나 이 집 호스트 님이 캣맘이셨을까나. 어찌 됐든 고양이를 강아지보다 좋아하면서도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 고양이 카페조차 가지 못하는 나로서는 상당히 기분 좋은 광경이었다. 제주도에서 현지 친구는 못 사귀더라도 현지 고양이라도 사귈 수 있을까.

 

 이 친구들이 나를 애타게 찾는 이유는 밥 말고는 없을 테니 일단 급한 대로 식방을 찢어서 줘 보았다. 저 창문을 닫기가 무섭게 양손에 하나씩, 입에 하나 물더니 그릇을 금세 비웠다. 오래 굶었던 걸까 싶어서 이번엔 좀 부드럽게 물에 적셔서 창가에 내놓았다. 배가 좀 찬 것인지 처음 그릇에 비해 열정이 덜 했지만 두 번째 그릇 또한 오늘 아침에 보니 깔끔하게 비워냈다.


 비가 오는 오늘 밤에는 한 마리만 와서 애처롭게 울어대고 있었다. 식빵 조금을 쥐어 보냈는데 어제의 자기 친구들을 데려올지 모르겠다. 경계심 많은 길냥이들이지만 제주도를 떠날 때면 한번쯤은 만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 미세먼지로 인한 비상 저감조치 재난문자였다.

서울도 아니고 제주도에서 이런 문자를 받을 줄이야. 제주도에서는 사상 처음인 조치란다.

이거 무슨 미래를 계획하기 전에 인류의 존망을 먼저 걱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작년까지만 해도 베이징, 상하이의 도심 스모그를 보면서 으 저게 뭐야 했던 장면이 제주도의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코 앞에 있는 오름이 한라산 정상 마냥 꼭대기가 흐릿하게 보인다니.


 흐릿한 시야가 마치 내 앞 날과 같다. 그랬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퇴사하고 제주도에서 힐링! 의 마음보다는 이 힐링이 끝나면..? 서울로 가면..? 하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크게 3가지다.

 1. 다시 대기업 (그러나 전에 다니던 곳과는 확연히 다른,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소신 지원)

 2. 공기업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평생소원...ㅎ)

 3. 다시 스타트업 (혹은 그 비슷한 중소기업)


 대기업 1년의 경험으로 상당히 많은 대기업의 로망이 깨진 상태라서, 처음 취업 준비할 때와 같이 직무 관련 없이 마구잡이로 넣는 지원은 피할 예정이다. 처음부터 여기는 됐으면 좋겠다 싶었던 3군데 정도.

 공기업은 당연히 누가 봐도 되면 너무나 좋을 회사다. 안정적이고, 워라밸도 좋고, 부모님도 좋아하시고. 그렇지만, 아직도 쓴 맛을 못 본 건지 정신을 못 차린 건지, 공기업은 뭔가 낭만이 없는 느낌이다.

 사실 이 모든 말들은 다 "이 회사"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어필하기 위한 변명이다. 애초에 취업을 생각할 때부터 내 최우선은 스타트업이었다. 그 이유는 크게 2가지였다.


1. 나는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오래된 조직 문화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2. 내 노력이 성과에 반영되는, 가시적인 피드백이 있는 업무를 하고 싶었다. (보람 혹은 성취감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대학교 3학년 때 휴학하고 시작한 스타트업 인턴으로 인해 그 꿈은 현실에 잠시 접어두게 됐다. 스타트업 스타트업 노래 부르기 전에 대기업도 한 번 해보고 나에게 무엇이 맞는지 파악하는 것이 맞겠다고 잠시 한 발 뺀 것이다. 스타트업 업무 현실이 내 생각과 많이 다르기도 했고, 착착 대기업에 붙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도 몰래 현실에 잠깐 눈 돌린 것도 있겠다.




 대학교 시절, 한창 영상 제작에 푹 빠져있을 때 여러 영상들을 보며 연출에 대한 영감을 얻으려고 한 적이 있다. (고 하고 재밌어서 그냥 푹 봤더랬다.) 웹드라마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 '72초 TV'라는 것을 접했고, 방송국과 자본의 소유라고 생각했던 영상 콘텐츠가 이렇게 번뜩이는 아이디어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새로운 영역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 다양한 웹드라마들을 보기 시작했고, '전지적 짝사랑 시점'이라는 웹드라마에 푹 빠졌다. 짧아서 그런지 대사 하나하나에 들어간 작가들의 고민이 좋았고, 지루하지 않게 장면 하나하나에 들어간 효과며 연출이 감동스러웠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매력적인 배우들이 마치 내 주위에 있는 사람 같아서 한 명 한 명에게 애정이 갔다. 그때 처음으로 '아 이렇게 잘 만들어진 영상에 나도 참여를 했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내가 이 영상이 더 완성도 있어지는데 도움이 됐다면 얼마나 보람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약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득문득 나를 괴롭혔다. 나는 이 생각을 떨치거나 혹은 이 생각에 온전히 몰입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주에 와서, 이제 나는 어쩌면 배수의 진을 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4년 넘게 떨치지 못한 이 생각을 계속 가지고 갈 순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이 생각이 옳은 생각인지 혹은 젊은 날 한 때의 치기 어린 생각인지 알아내고 다음 길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래서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생각해봐야 이 걸 생각하면 이게 맞고 저걸 생각하면 저게 맞다면, 가장 분명한 것을 하기로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콘텐츠를 만든 '그 회사'에서 일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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