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슬>에 대한 역사 영화적 분석

by ghu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는 트라우마를........”이라는 문장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트라우마는 나를......”이라고 겨우 쓸 수 있을 뿐이다. 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런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상상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대상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걸 잊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한다. 이제 정신을 차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고. 이런 말은 지금 대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체가 될 것을, 심지어 남을 배려하는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말이다. 당신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가 그렇게 잔인하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영화 <지슬>은 제주 4.3을 다룬 역사영화다. 이 영화는 영화의 소재로서 다소 익숙치 않은 제주4.3사건을 다뤘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적 표현이 매우 뛰어났다는 점 등에서 관객과 평단의 큰 호평을 받은바 있다.

<지슬>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미 군정하의 정부가 제주도민에 대한 사살 명령을 내린 배경 속에서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빨갱이’라는 명목으로 추격하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피해 동굴로 피신하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줄거리를 역사적 사실의 묘사의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이는 줄곧 연기에 가려진 채 모호한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매우 불친절하다. 기존의 대다수 역사영화가 역사적 사건을 영화적 내러티브로 바꿀 때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선별하여 객관적 사실처럼 풀어내는 기법을 택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전통적인 리얼리즘 영화가 영화의 핵심 사건을 마치 공인된 사실처럼 묘사하고 그로인한 관객의 깨달음을 강조했다면, 이 영화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구체적 사건의 전개과정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그 빈자리에 관객의 고민을 채워 넣으려 한 영화다.
구름에 쌓인 한라산 오프닝부터 희생자의 옆에서 태우는 지방 연기로 끝나는 영화의 엔딩까지,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미군은 물론, 군인에게 명령을 내리는 정부, 모든 결정이 이루어지는 서울까지 제주 4.3의 진정한 가해자라 할 수있는 대상은 인물의 대사로도 등장하지 않는다.
글로 기록된 기존의 역사와 영화로 쓰는 역사의 영역을 철저하게 구분하고자 한 것이다. 대다수 영화가 역사적 사건의 배경과 배후부터 시대순 전개, 후세대의 인식까지 모두 체계적으로 다룸으로써 관객을 수동적인 소비자로 간주했다면 이 영화는 영화만의,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할 뿐 그 이상의 가르침을 전달하고 지식을 제공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글과 이념으로 역사를 왜곡하기보다는 다소 허술할지라도 차라리 연기로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오로지 당시 제주도민의 목소리만을 듣고 그를 통해 영화를 전개하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의 고통과 사는 이야기만을 온전히 담은 영화는 관객에게 제주 4.3을 남한의 특수한 이념갈등 문제로 인한 사건으로 인식되기보다는 더 보편적이고 동시대 동서양 모두가 겪은 국가권력의 문제로 재인식된다.


영화가 제사의 각 단계를 파트별 소제목으로 붙이고 흐트러진 제기와 지방을 초반과 후반에 등장시키며 제사의 형식에 따라 영화를 전개하는 것 또한 이 영화의 주요한 특징이다. 역사적 사건을 전달하는 기능보다는 참혹한 역사 속에서 희생당한 이들을 위로하고 살아남은 자의 도리를 다하는 제의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역사 재현의 허구성을 감추고 영화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일반적인 역사 영화의 전략을 거부한다.
오히려 오프닝부터 지속적으로 인간계보다 한 차원 높은 세계를 가정하면서 희생자들의 ‘영’에 주목하는 구성은 영화가 목표하는 바를 분명히 하고 있다. 영화는 사건을 몰랐던, 사건을 겪지 못해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사건의 중심에서 상처입고 고통 받은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한, 지극히 희생자를 위해 제작된 영화인 것이다.

이러한 영화의 특징은 관객으로 하여금 사건을 보다 담담히, 엄숙히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효과도 지닌다. 처참히 살해당한 장면의 잔인함이나 귀가 찢어질듯 한 비명소리, 이별한 가족의 신파적 감정선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관객이 조용히 사건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희생자께 재배를 드릴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지극히 한국적인 형식을 통해 영화를 연출한 점에서도 주목해 볼만하다.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익숙한 서구영화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사라는 색다른 형식을 통해 지역성을 표현하면서 보다 민족에 대한 관념에 구체적으로 접근한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적 기법으로 흑백화면을 선택한 목적 역시 현실과 거리를 두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흑백화면은 과거를 회상하기 좋은 화면구성일 수 있지만 동시에 역사를 눈앞에 사실적으로 선명히 재현하기에는 부족하다. 흑백화면 속에서 영화는 정돈되지 않은 인물들의 사변적 대사나 긴급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인물의 행동, 사건에 대한 인물들의 현실감 없는 대응방식을 담는다. 이는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무아도취적 몰입을 막고 역사의 사실적 재현을 거부하려는 영화의 목적을 가시화한 것이다.
또한 이는 기억의 특징과도 부합한다. 기억, 특히 부정적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는 모호하며 망각되기 쉽고 단발적이다. 영화는 이러한 희생자, 생존자의 기억을 인위적인 편집 없이 그대로 스토리화하면서 사건을 전개한다. 그 결과 영화의 이야기 구성은 분명한 기승전결의 구조 없이 늘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이는 이야기 사이사이에 간격을 두고 관객의 생각이 개입할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인 관객의 역할을 강조하고 그들의 반성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 전반에 깔린 엄숙함은 선과 악, 아군과 적군의 구분에 대한 허무함과 무의함을 더욱 강조하는 기능도 수행한다. 학살을 자행하는 세력인 군인을 무자비한 순수 악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그들도 국가권력의 희생자로 표현함으로써 보다 심층적 담론을 구성하는 것이다. 실제 마을 사람이 “군인이라도 다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라 한 대사나 “저 여자도 폭도입니까”라고 상사에게 대드는 군인의 모습은 그러한 의도를 직설적으로 나타내는 장치다.
특히 군인 중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지는 스무 살의 상덕과 동수는 죄 없는 사람들을 오로지 상부의 명령 때문에 죽여야 하는 딜레마에 대한 고민을 품고 있는 인물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인간애와 용기 있는 모습은 학살의 주체가 누구인지, 진정으로 비난받아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잔혹한 살인자적 성향과 천진난만함을 동시에 지닌 김 상사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근대라는 거대한 시대를 살아가느라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인물이다. 시대의 희생자로서 슬픔을 간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해자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가해자의 입체성을 주목하는 것과 더불어 영화는 무조건적으로 모든 피해자를 숭고한 희생자의 위치로 승격시키지도 않는다. 순박한 마을 청년 상표의 경우 군인에게 잡혀 죽음의 공포를 체험한 후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마을사람들이 피신한 동굴의 위치를 밀고한다. 물론 겁에 질려 벌인 일이므로 그에게 악인이라는 원색적 비난을 던질 수야 없지만 이러한 인물 설정은 영화가 피해자 모두를 단순히 아름다운 희생자 집단으로 몰개성화하여 치환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심층적 담론은 관객으로 하여금 누구도 쉽게 비난하지 못하게 만든다. 역사적 사건에 있어서 비난할 타자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사건의 원인을 그들의 내면적 악함, 본성적 야만성의 탓으로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한편 영화에서 학살에 직접적인 반기를 드는 인물은 군인 정길이다. 군모도 군복도 모두 버거워 보이는 그는 영화 후반부에서 직접 학살의 주도자인 김 상사를 단죄하게 된다. 이는 군인인 정길이 직접 군인의 행동을 제지하고 반성을 이끌어내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섣불리 사건의 주변인, 제3자가 오만하게 그들을 판단하도록 하지 않는 것이다. 학살과 그로 인한 희생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역사영화에서 죄의 판단과 용서는 민감한 쟁점일수 밖에 없다. 따라서 영화는 사건의 주체가 직접 죄를 언급하게끔 하는 것이다.

영화는 실제 제주도민을 상당수 배우로 기용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제주도민이 피신했던 동굴 큰넓궤를 배경으로 촬영했다. 또한 제주 방언을 변형 없이 사용하여 한국어 자막을 덧붙인다. 이는 영화의 사실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영화의 산만한 구성과 함께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장치이다. 낯선 언어를 통해 관객과 사건과의 거리를 의도적으로 벌리는 것이다.
제주도는 분명 같은 한민족이며 우리나라에 속한 섬이지만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위계와 거리가 존재한다. 우리는 그들을 섬사람으로 타지화하며 제주도는 섬이라는 점에서 주변부, 고립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특수한 공간이다. 제주4.3이 한국전쟁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사건이며 역사적으로도 큰 고통을 안겨줬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근대사에 비해 관심을 받지 못한 이유 역시 이런 맥락에 있을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감추기보다는 그대로 드러낸다. 이것이 자막으로 나오는 한국어, 아니 서울말이 불편한 이유일 것이다. 영화는 역사를 대하는 대중의 편협한, 자기중심적 시선을 그대로 문제시한다. 영화에서의 제주 방언이 다른 미디어에서의 방언 활용과 다소 다른 측면을 보인다는 점도 이러한 해석의 근거다. 흔히 지방의 방언은 미디어 속에서 일종의 고정관념으로서 해학성, 비문명이나 향토성을 강조하기 위한 언어적 유희로 사용된다. 하지만 영화 속의 방언은 방언이 주는 정서에 집중하지 않은 담백한 제주어 그대로의 언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기존에 관객이 지역 방언의 효과로 기대하는 과장된 방언의 재미를 의도적으로 제거한 것이다.


영화는 부제인 ‘끝나지 않은 세월’에 걸맞게 과거의 완료성, 변화불가능성을 강조하기보다는 현재에도 살아 숨쉬는 미완된 과거를 강조한다. 이는 불완전한 제사를 통해 가시화되는데 오프닝과 엔딩에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흐트러진 제기와 희생자의 옆에서 나부끼는 지방은 제사가 정식으로 예를 차려 진행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예다. 7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희생자들을 위로하려 준비한 위령제는 아직 그 모습을 온전히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미완의 역사는 현재와 소통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담론화를 통한 적극적인 성찰과 반성이 가능하다. 영화가 다루지 못한 거시적 측면에는 어떤 사실이 존재하는지, 사라진 것 가운데 알아야 할 또 다른 것은 무엇이 있는지 스스로 자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희생자의 이야기를 현대 속에서 풀어내는 것은 트라우마적 기억과 정면으로 맞서는 행위이다. 과거를 과거 속에 묶어두고 ‘말하지 못하는 역사’로 가둬두기보다는 영화를 통해 내러티브적 기억으로 풀어내고 사회적 담론을 구성함으로써 개인의 아픈 기억을 공동체의 책임과 역사로 바꾸는 것이다.

이는 결국 영화 제목 ‘지슬’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제주어로 감자를 뜻하는 지슬은 본딧말로 '지실'(地實), 즉 땅에서 나오는 열매라는 의미를 가진다. 영화 속에서 지슬의 의미를 묻는 말에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죽은 엄마의 곁에서 우는 어린 아이가 지슬이라 답했다. 이 땅의 모두는 아픈 역사를 모태삼아 태어난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관통해 땅으로부터 자라난 후손들이고 영화는 이러한 메시지를 통해 제주4.3은 결국 우리 모두의 역사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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