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무는 팔십 몇 년을 살아오면서 아마도 몇 번 아팠을 것이다. 나무를 인신처와 식량 공급원으로 이용하려고 공격을 멈추지 않는 동물과 곤충들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도망갈 수 없으니 나무는 뾰족한 가시와 독이 있고 먹을 수 없는 나무진으로 무장해서 그들의 공격을 예방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썩어가는 식물조직에 갈 데 없이 덮여서 취약한 상태로 있어야 하는 뿌리다. 방어장치를 유지하는 비용은 내 나무가 희망찬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모아놓았던 저금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진액 한 방울을 흘릴 때마다 씨앗 하나가 열리지 못하고, 가시 하나를 만들 때마다 이파리 하나를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그해 5월은 예년에 비해 너무도 추웠고 때아닌 눈보라가 몰아닥친 후 어느 주말에 엄청난 폭설이 쏟아졌다. 침엽수는 많은 양의 눈을 감당할 수 있지만 새로 난 이파리의 무게까지 더해진 상태로는 무리였다. 처음에는 휘기만 했던 가지들이 결국 부러져버리면서 키 크고 헐벗은 본체만 남았다. 부모님은 내 나무를 베고 뿌리를 뽑아 안락사를 시켰다. 몇 달이 지난 후 전화로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눈부신 햇빛을 받고 서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은 1년 내내 눈이 오지 않는, 집에서 6,400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진 곳이었다. 나는 나무가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자마자 부고를 듣게 된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이러니 이상이었다. 내 은청비가문비는 생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내 나무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내 삶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나무의 삶이 가지는 중요한 고비를 모두 넘겼고, 최고의 시간을 누렸고, 시간에 따라 변화했다.
시간은 나, 내 나무에 대한 나의 눈, 그리고 내 나무가 자신을 보는 눈에 대한 나의 눈을 변화시켰다. 과학은 나에게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과학은 또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 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도 가르쳐줬다. 나보다 오래 살았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내 나무도 그중 하나이다.
호프 자란, <랩 걸>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의미하는 ‘자살’은 오랜 시간 많은 논쟁을 낳았다. 때로는 삶에서부터 도망치는 비겁한 선택으로 비판받기도, 때로는 깊은 고뇌 끝에 행하는 예술적 행위로 낭만화되기도 했다. 이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며 다양한 작품으로 승화돼 왔다. 특히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 마광수는 그의 시 「자살자를 위하여」에서 ‘이 땅에 태어난 행복,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의무를 말하지 말라’며 ‘자살자는 가장 자비로운 자,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책임 맡은 자, 가장 비겁하지 않은 자’라 평하며 자살의 대중적인 인식을 반박했다. 최근 20대의 세대론과 한국의 자살 문제를 결합시켜 독자들의 큰 반향을 일으킨 소설 『표백』 또한 IMF 사태 이후 기성세대의 기득권 강화 속에 10대와 20대의 착취와 절망을 자살을 통해 풀어냈다는 점에서 자살이 과연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 작품이다.
한강의 연작 소설 『채식주의자』 역시 육식을 극단적으로 거부하다 자살을 택한 영혜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자살을 작품의 주요 제재로 활용한 소설이다. 다만 여성의 자살이 남성의 자살에 비해 문학사적으로 덜 주목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재상에서도 참신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한중일 고전문학 속에서 여성의 자살은 가정을 위한 희생, 정절 보존의 수단 등 효녀, 열녀의 이미지와 자주 연결돼 이를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권장하는 기이한 현상까지 발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이전의 여타 소설과는 자살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다소 색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영혜가 채식주의자의 삶을 거쳐 어떠한 음식 섭취도 거부하는 자살 희망자가 된 것은 시대의 폭력에 맞선 순례의 길이었으며 다른 동물을 해치기 않기 위해 선택한 유일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당해온, 또 가해온 폭력은 그녀의 잘못 뿐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에 대한 분노를 자기 자신에게 쏟아내며 자기 처벌적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고기를 좋아하던 이가 어느 날 자신의 몸에 ‘입맛 떨어지게’ 끔찍이 뒤덮인 동물의 피를 본다면 어떨까.
영혜는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불면과 꿈을 통해 얻은 날카로운 감수성을 통해 자신의 삶 전반에서 더디고 무심히 자행되던 살육을 인지한다. 그리고 피가 묻은 육신을 정화하기 위해 밥도, 생각도, 말도 필요로 하지 않는, 오직 햇빛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는 ‘식물’이 되고자 한다. 모두가 애써 기억 속에 덮고 흡수해 살아가던 성장기 속에서의 폭력을 기어이 끄집어 내 그 책임을 자신의 육체에게 묻는 것이다.
미셸 푸코는 그의 책 『광기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시대를 증언하는 자는 광인이라 말한다. 시대와 권력의 힘에 자신을 맡긴 무기력한 이는 우리에게 시대를 알려줄 수 없다. 격렬히 고민하고 치열히 그 답을 찾는 자, 즉 광인만이 우리에게 시대의 모순점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영혜는 이 시대에서 ‘결국 남의 살을 먹고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생리적 폭력성을 인지하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한 광인이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라는 말로 대변되는 영혜의 비폭력에 대한 극단적인 집착은 그녀가 일생동안 겪어온 폭력의 반작용이다. 아버지의 육식 강요, 남편의 무관심, 매형의 강간, 정신병원 등으로 대표되는 가부장제의 억압과 폭력은 소설 갈등의 핵심 원인으로, 동물에게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가하는 폭력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은 보통 에코 페미니즘 소설로 분류된다. 에코 페미니즘이란 남녀평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기존 페미니즘과는 다르게 기존 사회의 인위적인 구조로부터의 탈출과 자연과의 합취를 주장하는 운동이다. 하지만 자연과의 온전한 합치가 가능키나 하냐는 듯 피 흘리며 산산히 부서진 육체의 여성이 소설의 결말에 있다는 점은 이를 에코 페미니즘보다는 페미니즘 소설에 더 가깝게 한다. 끊임없는 여성의 대상화와 그로 인한 여성의 고통을 다룬 소설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혜의 성적 매력을 계속해서 과도하게 부각한 점은 폭력의 재생산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한계로 볼 수 있지만 여러 담론을 겹쳐 제시했다는 점에서 소설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