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물고기』에서 작가가 가장 공을 들여 형용하는 아름다움은 자유이다 . 주인공 라일라가 억압과 강제에서 벗어난 그 모든 순간 , '도시의 윤곽은 어둠속에 잠겨들고 거대한 검은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서는 햇살과 빗줄기가 그어지며 바다의 느린 물결소리'가 들려온다 . 라일라가 자유를 향해 한 발짝씩 진일보할 때마다 작가는 그를 칭찬하듯 숨겨온 세상의 아름다움을 하나씩 보여주는 것이다 . 하지만 이 너그러움과 대조적으로 , 작가는 라일라에게 행해지는 모든 강제와 구속 , 집착에 대해서만큼은 가장 사실적이고 고통스럽게 묘사한다 . 그녀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모두 가장 원초적이고 사나운 야생의 것으로 단죄된다 .
태초부터 뿌리가 뽑힌 채 연약하게 태어나 일생 내내 도처의 덫과 그물을 피하는 포로의 삶 . 그녀의 삶은 정글에서 표류하는 물고기와 닮아있다 . 하지만 그 삶을 담담히 또 잔인하게 그려내는 방식은 오히려 라일라의 황금빛 생명력을 더 부각한다 . 차가운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사랑하려 노력하고 또 진정한 자신을 찾는 여정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
‘아름답다 ’라는 말은 주관적 형용사지만 모순되게도 우리는 모두 그 표현에 어느 정도 통용되는 기준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 . 다양하지만 동시에 편협하고 한정된 그 범주에 순수 아프리카인 라일라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 . 세상은 ‘연약한 아프리카 흑인 여자아이 ’의 이미지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 하지만 작가는 그녀를 눈부신 생명의 정수로 형상화한다 . 라일라는 특정 인종과 성별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다 . 악에 대항하는 존재이고 , 순수한 자연의 대지를 상징하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희망과 자유를 뜻한다 . 그래서 라일라는 편견의 대상보다는 모든 이가 탐을 내는 아름다운 존재로 그려지는 것이다 .
나에게 나의 춤을, 흑인답게 아름답고 옳은 춤을
소설의 첫 문장 , 즉 라일라의 시작은 이렇다 . “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 .” 이후 라일라는 랄라 아스마 , 자밀라 , 조라와 아벨을 거쳐 후리야 , 노노 , 엘 하즈 , 시몬느와 파리 생활을 한다 . 또한 미국 보스턴 , 시카코 , 캘리포니아를 유랑했으며 마침내 아프리카로 돌아와 긴 여행을 끝낸다 . 나열하기도 벅찬 이 표류 속에서 라일라는 언제나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다 . 누구와도 닮지 않은 순수한 아프리카인으로서 그녀는 사회의 의문과 편견적 시선 , 무지에 익숙해져야 했다 .
사람들은 아프리카에서 왔다는 말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제 3 세계 이주자를 향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리라 . 흑인이라는 태생적 불행 속에서 그녀는 흑인인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살아간다 . 물론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은 고귀하거나 도덕적이지 않다 . 누군가는 그녀의 삶을 옳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신파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
하지만 그녀는 그런 사회의 시선 속에서도 꿋꿋이 “못된 흑인의 춤을 , 족쇄를 깨는 춤을 , 감옥을 날려버리는 춤을 ” 달라고 노래한다 . 인종 , 민족을 이유로 원색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을 향한 일종의 복수이자 , 억눌린 분노의 표출인 것이다 . 소수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 이는 오히려 제 1 세계 , 특권적인 사회에서 보내는 무조건적인 혐오에 대한 풍자이다 . 착한 너와 근본적으로 못된 춤을 출 줄만 아는 나 . 하지만 못된 흑인의 춤은 나다운 , 흑인다운 아름답고 정당한 춤이다 . 모두가 지배하기를 멈추면 우리는 저마다의 정당성과 아름다움을 가진 인간이 된다 .
알시도르는 로빈슨 거리에 살던 라일라의 이웃으로 , 정신적으로 결핍된 장애인이지만 어린아이 같은 얼굴에 유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 그는 마약 밀매자를 잡으러온 경찰에게도 호기심으로 다가갔을 뿐이었다 . 하지만 그는 머리와 코에 피가 나 쓰러질 때까지 , 때리는 소리가 울릴 정도로 맞았다 . 그는 울면서 엄마를 찾았다 . 경찰서에서 돌아온 후 , 알시도르는 더 이상 밖에 나오지 않았다 .
라일라는 다음 노래의 제목을 묻는 기자에게 주저 없이 말한다 . “알시도르에게 사랑을 담고 .” 생명력을 잃은 알시도르는 우리 모두의 분노이자 죄책감이다 .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이고 무력함과 이기적 방조에 대한 죄책감이다 . 그리고 우리는 회의한다 .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 이는 라일라가 품 -즈귀드의 거칠고 황폐한 토양에서 던진 의문과 일치한다 . “여인네는 울고 아이들은 사라지는 이 현실에서 우리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폭력은 폭력을 낳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 라일라와 뿌리를 잃은 모두가 그 죄악과 속박의 희생자이다 . 라일라는 이 힘의 논리의 잔인함과 허망함을 안다 . 폭력의 시대엔 알시도르도 라일라도 , 힐랄 족도 , 크리우이가 족도 모두 희생자이다 . 마침내 라일라는 긴 여정의 끝에서 이 긴 논쟁의 결론을 얻는다 . “더 이상 멀리 갈 필요가 없음을 안다 . 드디어 나는 또 하나의 빌랄 족이 되어 부족의 시대에서 벗어나 사랑의 시대로 들어선다 .”
라일라는 여정 내내 두려움에 대해 언급한다 . “나는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 “더 이상 그 새하얀 거리와 새의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았다 .”, “지금까지의 경험들과 함께 무거워졌다고나 할까 . 이제는 그따위 일들이 두렵지 않았다 ”,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 내게는 세상과 대면할 용기가 있었다 .”, “이제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연주할 수 있었다 .” 그러던 그녀가 여정의 끝 ,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자유를 말할 때 ,(“이제 나는 자유로우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 그녀는 진정으로 자신을 살아간다 . 랄라 아스마가 죽었을 때 느낀 최초의 공포를 시작으로 그녀의 삶은 내내 특정 대상에서 비롯된 본능적 공포와의 투쟁이었다 . ‘두렵지 않다 ’는 그녀의 되뇜이 역설적으로 그녀의 두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 그러나 그녀는 이제 두려움을 말하지 않는다 . 그녀는 그녀의 근원에서 자유를 말한다 . 가장 듣고 싶었던 소리를 듣고 시시한 늑대들과 상어를 여유롭게 따돌리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
나는 사람들과 자동차들 사이를 빠져 다녔다. 나는 누구보다 빨랐다. 나는 본능적으로 자동차들이 달리는 것과 반대로 걷는다. 반대로 걷는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 되는 거고 그들은 우리를 두려워한다. 그들 쪽에서 비켜가야 하므로. 그들은 경적을 울려댈 것이고 늑대처럼 소리를 질러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울어가는 햇살을 얼굴에 받으며 걷는다. 햇살이 어깨와 머리 위로 내려앉을 뿐,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프란츠 파농은 “유럽에 집착하고 유럽을 흉내내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한 ,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다 ”고 선언했다 . 그 어떤 것이든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 것 .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나는 내가 아니다 ”라는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 이 사상은 라일라의 삶 전체뿐만 아니라 작품의 메시지도 함축하고 있다 . 작풍의 마지막 , 마침내 라일라는 유괴당한 어린아이도 , 삶의 풍파와 시련을 겪은 비극적 하류층도 , 정체된 존재로서의 아프리카인도 아니게 되었다 .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하려 하지 않았고 향수에 젖어 몸을 떨지도 않았다 .” 그저 자유롭고 진정한 가치를 찾으려는 생명으로 , 대지의 딸로 존재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