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혹은 소설에서 재현되는 폭력에 대해 불편하다고 여긴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불쾌를 유발하지 않는 폭력의 재현이 더 의외적 사건일 듯하다는 임현 소설가의 대답을 시작으로 정치적 올바름, 폭력, 재현, 예술의 불가침성 등 여러 쟁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을 접하며 지금껏 직감과 감정의 영역이었던 불쾌감이 세계의 작동원리에 일격을 가하는 정치적 행위로 변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처럼 작품을 접하며 느껴지는 감정의 영역에 더욱 예민해져야 한다는 각성과, 달라진 독서 관람 행위의 목격은 저를 이전의 독자로 돌아갈 수 없게 합니다.
폭력을 향한 불쾌감이라고 하는 것은 1차적으로 무의식적 차원에서 폭력적 이미지를 접하고 싶지 않아하는 감각의 발현일 수 있고, 2차적으로는 작품 기저에 내재화된 여성혐오를 알아차리는 것과 같은 의식적 사유의 발현일 수도 있다.
<아저씨>, <신세계>와 같은 남성액션영화에서 나오는 마초이즘적 폭력은 원천적으로 폭력을 묘사하지만 스타일리쉬한 연출과 폭력에 응징의 쾌감을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감각적 불쾌도 거의 느껴지지 않게끔 한다.
<한공주>와 <귀향>은 고통의 스펙타클을 제시하였던 논쟁적 영화이다. 이들은 실화를 소재로 했다는 점이 중요한데, '허구적 윤색은 없으며 단지 사실을 보여줄 뿐'이라는 태도를 견지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전달하는 담론이 진실이라는 태도이다. 사회파 영화가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공감과 같은 신파를 바탕으로 국가 폭력을 보여주는 전략을 취한 것과 상통하게 이러한 태도는 영화가 보여주는 폭력적 재현에 대한 알리바이가 된다.
반면 피해자가 실재하는 현실의 폭력을 재현할 때는 조금 다르다. 흔히 폭력의 재현은 다음의 이유로 비판받는다. 관음적인 카메라 워킹의 탓으로 폭력이 가해자의 시선에서만 전개될 때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 혹은 폭력의 상세한 묘사가 대의(진실의 탐구)를 위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기존의 불평등한 권력 구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러한 재현의 경우, 폭력의 피해자가 내가 아닐지라도, 즉 당장 폭력의 위험 반원 안에 있어 심리적 불안을 느끼지 않더라도 불쾌할 것이다.
하지만 폭력의 재현을 작가 표현의 자유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놓고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극단의 논리는 경계해야 마땅하다. 정치적 올바름, 폭력 재현의 정당성을 바탕으로 한 실제의 작품 개별에 대한 평론은 타당하지만 폭력을 문학, 영화적으로 재현하는 행위 일반에 대한 비판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어떤 소설도 폭력을 재현하려는 하나의 목적 하에 예술을 만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서사를 쓰려고 하는 그 추동은 사건의 빈 고리를 상상력으로 이어갈 때 생겨난다.
폭력의 재현이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 역시 피해자의 피해를 예상한다는 점에서 피해자는 '피해자다울' 수밖에 없다는 무의식의 발현일 수 있다.
특정한 작품(들)을 거론하며 그것이 폭력을 재현하려다 폭력적 재현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비판할 수는 있어도-물론 세심한 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폭력의 재현의 재현의 폭력으로의 전도라는 일반화된 주제를 거론하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이 이상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면, 아무래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재현의 폭력에 대한 일반적 문제제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추구가 그에 대한 강박으로 전환되는 단계가 더 필요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82년생 김지영』처럼 실제 사건의 나열만으로 이뤄진 다소 게으른 폭력의 재현이 문학사적으로 중요성을 가질 수 있는가, 피해자의 입장을 배제한 서사는 윤리적인가, 텍스트의 입체성, 풍부함을 제거하고 하나의 담론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해석학적 폭력도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차치하고서 폭력이 과연 서사적으로 재현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보고 싶다.
사라 케인의 연극은 폭력에 대한 극단적인 묘사를 통해 폭력에 대한 기존의 묘사를 비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녀의 작품에서는 폭력의 재현만큼이나 재현의 폭력이 문제이다. 케인은 기존의 재현 체계 안에서 폭력이 과연 재현 가능한가라고 묻는 것처럼 보인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녀의 작품이 반복해서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폭행당한 여성의 사진 아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묘사하고 설명하는 말이 과연 그 사진 속 존재에게 저질러진 폭력을 재현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인종학살을 보도하는 글에서 과연 그러한 일이 왜 벌어졌는지에 관한 설명을 읽다보면 억지로라도 실제 사건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상상과 추론은 늘 그 폭행 자체에는 다다르지 못한다. 상상과 추론 속에서 폭력은 어떤 인과 관계로 변질된다. 그러나 폭력이 단순히 때리는 것에서, 강간으로, 더 나아가 살인으로 발전하는 과정 속에 실제로 이성적인 논리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합리적인 설명과 이성적 언어는 늘 폭력 그 자체의 체험에는 다다르지 못한다. 폭력의 체험은 이성의 바깥일 뿐만 아니라 언어의 바깥이다.
-재현의 폭력과 체험으로서의 연극: 사라 케인의 『폭파』
실제의 폭력적 사건은 충동적 정념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비합리적, 비인과적 구성일수밖에 없다. 하지만 소설은 사건과 사건 사이 빈 인과관계를 상상력을 통해 채워넣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에 폭력을 언어의 개연 체계 속으로 넣으려 하고 폭력에 인과성을 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폭력의 정동에 기승전결을 더하는 순간, 그 과정에서 순수한 폭력의 공포성은 거세당하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