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싱가포르-메이커에게 물어 보라

13)

by 최희철

13) 싱가포르- 메이커에게 물어 보라


싱가포르는 북위 1도, 적도에 가까워 숨 쉴 때마다 코 속으로 열기가 밀려왔다. 처음엔 불에 댄 듯 뜨거워 놀랄 정도였다. 허나 눅눅한 습기는 없었다. 따갑다 못해 구워질 것만 같은 더위뿐이었다. 그래서 더워도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게 좋고 땡볕이라도 그늘 밑으로 가면 살만했다. 게다가 밤에는 모기 때문에 목까지 덮을 수 있는 긴 옷이 더 필요했다. 그곳에 서식하는 모기란 놈들은 우리만 골라서 무는 것 같았다. 말레이족 사람들은 웃통을 벗고 있어도 괜찮은데 우리는 꽁꽁 싸매도 어김없이 여러 군데를 물렸으니 말이다.

K808호의 에어컨 시스템에 이상이 있었다. 하꼬다데는 추운 곳이라 에어컨을 작동하지 않아 몰랐는데, 배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에어컨을 켜면서 알게 된 문제였다. 그건 찬바람이 너무 강하게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타이완까지 내려왔는데도 너무 추워서 실내에서는 방한복을 입고 있어야 했다. 에어컨으로 유명한 ‘century’제품이었다. 주방 앞에 커다란 에어컨 본체가 있는 에어컨 실이 있었고 거기서 찬바람을 만들어 각각의 방으로 보내주는 구조였다. 하지만 에어컨을 켜게 되면 방의 온도가 5℃로 내려가 너무 추워서 살 수가 없었다. 선장은 기관장을 불러 어떻게 좀 해보라고 했으나 기관장은 이리 저리 에어컨 본체 일부를 해체하고 조립해 볼 뿐 실내의 온도 변화는 없었다.

기관장은 두 손으로 둥근 것을 풀어 재끼는 손 모양을 하며

“선장님 싱가폴 들어가 가 ‘오버홀(완전 분해조립)’ 한 번 해 보께예”

기관장은 속으론 교체 얘기를 꺼내고 싶었으나 꾹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여태까지 뭐했는디?”

“점마들이 너무 사용 안 하거 아입니꺼?”

선장은 화를 참는 것 같았다.

“저거 새건디, 음... 기사를 불러야 쓰건네”

“앞 판네루 뜯어 봤는데 잘 안되네예”

“관세음보살은 불렀는가?”

기관장을 힐난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선장은 ‘기독교인’이었다. 열성신자는 아니고 아내가 남편이 바다로 나가니 예수님께 열심히 기도하라고 한 모양이었다. 선장 방 오른쪽 벽면엔 시편 구절이 적힌 긴 족자가 걸려 있었다. 선장은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며 기관장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오만엔 더워서 죽는다고 하는데 에어컨을 끌 수도 없고 켜자고 하니 방이 너무 춥고 진퇴양난이었던 것이다.

결국 싱가포르에서 현지 센추리 직원들이 왔다. 그들은 지금의 에어컨은 완전 새것인데 용량이 배의 크기에 비하면 너무 커서 온도를 떨어뜨리는 방법은 찬 공기를 방에만 공급할 게 아니라 전 거주구역에 공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결국 주방, 복도, 화장실, 심지어 창고들과 목욕탕까지 모두를 뚫는 거주구역의 대대적인 구조변경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 뒤 실내 온도는 크게 높아졌는데 그래도 18℃나 되었다. 약간 서늘한 편이었지만 방한복을 입고 잘 정도는 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리고 방 하나라도 에어컨 통풍기는 닫지 말하고 했다. 한 곳을 닫게 되면 다른 구역으로 그 바람이 몰려가 온도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새롭게 공기배관 공사를 해서 그런지 에어컨 통풍구에서 검은 쇳가루가 나왔다. 그래서 우웨스나 면장갑 등으로 틀어막았는데 처음엔 1일주일에 한 번 정도 교체해 주었지만 점점 교체 기간은 길어졌다. 다행이었다. 그래도 어기를 마칠 때까지 에어컨 통풍구는 헝겊으로 틀어막아야 했다. 헝겊을 교체할 때 헝겊에 걸린 검은 쇳가루를 보면 그게 마치 내 목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체 온도가 떨어지는 것 때문에 환풍구를 닫을 수는 없었다.

배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해결되었거나 해결되지 못했거나 관련된 사람들의 능력에 대한 구설수가 생긴다. 이번 일과 관련된 시선은 결국 기관장에게로 모아졌다. 어선이라는 좁은 공간이라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 구설수라는 게 기관부와 관련된 게 많았다. 왜냐하면 이상이나 고장 같은 게 일어날 확률이 높은 것은 기계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에어컨 사건을 계기로 ‘잘 모를 때는 메이커에게 물어 보라’는 교훈이 생겼다. 메이커는 일종의 ‘보편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먼저 메이커에게 묻는 게 가장 빠른 해결방법이라는 걸 K808호는 나중에 크게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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