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현장발 그리고 청수

21)

by 최희철

21) 현장발 그리고 청수


드디어 첫 항차를 마치고 무스카트로 ‘현장발’ 했다. 현장발 하면 청수(담수, fresh water)가 개방된다. K808호는 하루에 1톤 정도 청수를 만들 수 있었으나 엔진 냉각수로도 사용되기에 먹는 물 이외에는 청수를 쓸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샤워는 물론 빨래도 해수로 했다.

요즈음(2022년)은 작은 배들도 대체로 빵빵한 조수기를 싣고 다니기에 청수 걱정을 하지 않는 게 보통이지만 당시만 해도 349톤짜리 작은 어선들은 청수가 늘 부족했다. 태평양어장 마구로 배의 경우 아직도(2021년) 청수 사정이 좋지 않은 배들이 있다. 그들은 적도 부근에서 조업하는 경우가 많아 빗물을 모아 빨래에 이용하고, 에어컨 물을 모아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양이 모자라서 사용시간을 통제한다.

무엇이 과잉될 때뿐 아니라 부족하면 차별이 생긴다. 가령 한국선원들은 청수를 사용하고 외국선원들은 해수를 사용하는 게 그것이다. 한국선원들은 일반선원이 아니라 사관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나 선원이라고 해서 사관들과 차별을 받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차별적 행위들은 모든 배에서 조금씩 있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배가 크거나 조수기 성능과 용량이 빵빵하여 청수 사정이 좋은 곳은 한국선원, 외국선원 할 것 없이 모두 청수를 사용하지만, 그렇지 못한 배는 어차피 청수를 제한을 했을 것인데 제한의 경계를 어떻게 정할 것이냐가 늘 문제였다.

또 문제는 배를 지휘하는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 회사에 강력하게 요청하여 빵빵한 조수기를 배에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구로 배도 조수기가 좋으면 청수 사정도 좋았다. 모든 선원들이 청수로 빨래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경우라도 최소한 씻는 것 정도는 청수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본선 조수기 상태가 빌빌 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회사에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그대로 출항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모든 선원들이 고생한다. 마구로 배는 한두 달 조업하고 항구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보통 20개월 이상을 바다 위에서 조업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말이다. 입항 기회가 거의 없는 마구로 배들은 운반선이나 탱커를 만났을 때 청수를 얻기도 하지만 늘 청수 부족으로 빗물, 에어컨 냉각수 등을 모아서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빗물이나 에어컨 냉각수를 마시는 물로는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만약 빗물이나 에어컨 냉각수를 먹을 정도라면 그 자체가 지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빗물은 주로 선원들이 비가 올 때 모아서 자기들이 사용하고, 에어컨 냉각수는 따로 모았다가 사관들이 주로 사용하기도 한다. 에어컨 물이라서 차갑다. 빗물은 아니겠지만 에어컨 물도 충분치 못하여 기관실에서 통제할 때가 있다. 예전에 마구로 배 타다가 운반선을 타고 귀국한 적이 있는데 그 배에선 에어컨 냉각수를 욕실에 받아서 사용하였는데 그것조차도 통제를 하거나 기본 선원들과의 차별을 두었다. 아무튼 사람이 아니라 마치 화물처럼 취급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평양 어장 마구로 배에선 날씨가 무더운 관계로 옷들은 거의 여름 옷 수준이다. 아랫도리는 팬티와 반바지, 윗도리는 러닝셔츠 한 장이 고작이다. 그래서 빨래하긴 쉽다. 그것 때문인가 대체로 세탁기 없는 배가 많다. 모두 손빨래를 하는 것이다. 간혹 탈수기가 있는 배들이 있는데 탈수기만 있어도 빨래가 쉽다는 걸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탈수기가 아닌 사람 손을 물기를 짠 빨래는 마르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마르고 난 후 냄새나는 경우가 많았다. 약간 쉰 내 같은 것. 그러다보니 빨래를 줄이기 위해 팬티를 아예 입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마구로 배와 비슷한 크기의 배라도 ‘저연승어선(낚시를 이용하여 바닥 고기를 잡는 어선)’들은 대체로 조수기 성능이 빵빵하여 부담 없이 모든 선원들이 청수를 사용하는 편이었다. 청수로 빨래를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심지어 조수기를 두 대 돌리기에 청수가 펑펑 생산되어 청수가 넘쳐흐르니 좀 써 달라고 하는 배도 있다. 사실 선박에서 청수 담당은 초사가 해야 하는데 청수를 만드는 조수기가 기관실에 있고 기계를 기관부들이 관리하기에 청수를 기관부에서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청수 생산은 기관부가 하되 그 사용은 초사가 관리하여야 한다.

청수는 배에서 기본적으로 마시는 물이 되기도 한다. 물론 마시는 물은 생수를 싣고 다니는 게 일반화 되었지만 음식을 만들거나, 차를 마시는 경우에는 대개 조수기로 만든 청수를 사용한다. 그런데 조수기에서 만들어진 청수는 청수 탱크에 보관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다 보니 청수 탱크가 불결해서 청수가 오염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보통 청수가 나오는 부분, 가령 수도꼭지 뒤 청수 파이프엔 기본적으로 여러 개의 필터를 끼워 사용한다. 물론 필터 수명이 있어 교체를 하지만 기본적으로 청소 탱크의 청결이 유지되어야만 한다.

북양어장 트롤어선 탈 때는 입항하면 반드시 청수 탱크를 청소했는데 그걸 ‘오발(탱크를 청소하고 청수를 채워 몇 번이고 넘치게 하는 작업)’이라고 불렀다. 그때는 지금처럼 생수를 먹는다는 개념이 없었고 가격도 아주 비쌌다. 조수기로 만든 청수로 밥도 지어 먹고, 차도 마셨으며 몸을 씻고 빨래도 했던 것이다. 그래도 당시는 청수 탱크의 물이 더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문제는 일차적으로 회사의 문제다. 좋은 회사는 최소한 조건을 절대 어기지 않는다. 가령 청수, 부식, 안전 그리고 약속한 임금 같은 것을 절대로 어기지 않는다. 그것은 회사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자기 선원들의 사기를 진작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등한시 하거나 언제나 빠져 나갈 궁리를 하는 회사들도 있다. 그런 회사들은 결국 선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선원들로부터 원망의 소리를 듣거나 회사 자신에게도 결코 이익이 되질 않는다. 바다에서 사기가 떨어질 때로 떨어진 선원들로부터 획기적인 생산성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까.

바다 위에서 장기 조업을 하다보면 탱크가 오염되어 그곳에서 나오는 청수가 오염될 수도 있다. 물론 청수 탱크 속의 청수를 사용할 때는 여러 개의 필터를 통과시켜 사용하긴 하지만 탱크 오염이 심하면 그렇게 해도 오염된 청수가 나왔다. 필터를 통했지만 오염된 더러운 물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먹을 수 없어 빗물을 받아먹어 본적이 있다. 그때 개인용 정수기(컵에 필터를 설치한 것)를 비상용으로 사용하였는데 정말 빗물은 마시기가 힘들었다. 우리가 조난을 당해 구명정을 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이럴 때 심각한 갈등이 생길 수 있다. 선원들 특히 외국선원들이 차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빨리 생수를 사서(탱커에서 판다) 나누어 주거나 청수 탱크를 청소해서 청수의 오염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먼저 출항하기 전에 완벽한 점검을 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해야겠지만 어쩔 수 없이 출항하여 문제의 발견이 늦었더라도 무슨 조치를 취해야지 그러지 않고 계속 오염된 물을 방치하는 경우 폭동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 때 기관장과 항해사가 결국 이틀 간 청수 탱크에 들어가서 청소를 함으로서 일정부분 오염된 청수 문제가 해결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출항하기 전에 최소한 청수 탱크의 오염 문제는 철저하게 준비하고 또 점검해서 일정한 기준에 미달되는 배들은 출항을 금지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먹는 물이야말로 인간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조수기가 청수를 만드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가열식이다. 해수를 가열하여 소금기를 증발 시켜 버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삼투압(osmotic pressure)식인데 해수를 어떤 막 사이로 통과시켜 소금기를 걸러 내는 방식이다. 제조하는 양으로 따진다면 삼투압식이 좋지만 가끔 삼투압이 시원찮아 만들어진 청수에 소금기가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조수기가 2대인 배에선 가열식은 먹는 걸로 삼투압은 씻고 빨래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기본적으로 청수 탱크가 깨끗해야 하고 정수 시스템(여러 개의 필터장치 같은 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그런 게 안 되면 먹는 청수를 기관실로 내려가서 청수가 탱크로 들어가기 전 조수기 파이프에서 직접 물을 받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대안은 아니었다. 그럴 경우 씻는 것은 청수탱크 것을 사용하고 먹는 것은 모두 그렇게 조수기에 직접 받아다 사용하였다. 거듭 말하지만 청수는 출항할 때 잘 챙겨야하는 출항 조건이다. 하지만 출항이 급해 메인엔진, 발전기 정도만 이상이 없다 싶으면 그냥 출항을 시키려고 애쓰는 회사가 있다. 그런데 따져보면 이건 좋은 회사 그리고 좋은 선장, 기관장의 문제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잉여가치’가 생산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했다. 잉여가치가 원료, 토지, 기계 등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노동자의 노동력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잉여가치’는 ‘잉여노동’이면서 노동력에서 ‘착취된 가치’이다. 이 문제를 원양어업자본으로 가져와 보자. 자본은 더 많은 잉여가치율을 더 높이고 싶어 하고 그리고 자본의 회전율도 높이고 싶어 한다. 만약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본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이 아닐 것이다. 투하한 자본의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가 되어 돌아오길 기대하는 게 자본의 욕망이다. 그리고 자본가는 자본의 욕망을 담지 하는 존재 즉 ‘담지자’이다. 착한 자본가는 있을 수 있다. 가령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인간성이 좋은 자본가는 있을 수 있고 실제로도 많다. 하지만 자본의 욕망을 담지하지 않는 자본가는 한 명도 없다. 원양어업에서 원양어업자본의 욕망을 자본가를 대신해서 담지해 주는 사람이 선장이다. 선장은 ‘자본의 욕망’을 대리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선장이 자본의 욕망을 대리하지 않는다면 그는 회사에 의해 모가지가 바로 잘린다. 똑같은 논리로 착하고 인간성이 좋은 선장은 있을 수 있고 실제로도 많다. 하지만 원양어업자본의 욕망을 담지하지 않는 선장은 없다. 우리의 원양어업은 늘 그런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게 누구에게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원양어업을 운영해 오고 있다. 이게 어업에 있어서 더 높은 생산성을 올리는 최선의 방법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지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원양어업이라는 구조 속에서 선장은 자본의 대리인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걸 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청수 문제도 그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선원들이 아무리 불편하다 죽는다고 아우성을 쳐도 잉여가치를 생산하는데 도움이 되질 않으면 자본은 하지 않는다. 즉 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을 만큼만 해 준다는 것이다. 그걸 노동력의 가치로 바꾸어 말하면 자본가가 운영하는 회사는 선원들의 노동력을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 이상으로 절대 구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기준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그 기준이라는 게 학문적으로 계산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기준은 늘 자본가와 노동자의 힘의 대결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게 나라나 시대마다 다른 것은 그 힘의 대결이 늘 달랐다는 말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의 원양어업이 노후선, 장기조업, 선원 노령화, 외국선원으로 상징되는 어려움에 처한 것은 모두 노동력의 가치를 어떻게 볼 것에 대한 싸움과 직결되는 것이다. 자본은 자신의 잉여가치를 감소시킬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원양어업이 이루어지는 원양어선 그리고 바다는 바로 그 투쟁의 현장이다. 그곳에 무슨 환상, 낭만, 아름다움, 거대함 그리고 도전이나 개척정신 같은 게 있다는 말인가. 인간의 생존을 갉아 먹는 조건들이 버글버글한데 말이다. 그야말로 좆 까는 소리일 뿐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과정은 ‘노동력을 소비’하는 과정이다. 노동자에게 노동력은 생명력이라고 마르크스가 말했다. 그렇게 생명력을 소비하는 과정이 원양어업 어장이고 원양어선이다. 그걸 직시하지 않는 것은 실존적 인간이 아니다. 그저 환상적인 인간일 뿐이다. 인간은 ‘플라스틱’이 아니다. 실존이라고 하는 현상계를 벗어난 것들은 모두 일종의 허무주의란 말이다. 그것도 패배적 허무주의!

해수로 샤워하고 빨래하려면 비누가 아니라 해수 비누가 필요하다. 예전에 일본선원들은 해수 비누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나는 한 번도 보질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해수 비누 대신 ‘샴푸’를 사용하였다. 샴푸를 사용하면 해수에서도 거품이 잘 나온다. 그래서 빨래도 샴푸로 한다. 해수로 오랜 기간 샤워를 하면 피부가 약간 변색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자세히 보면 바닷물의 물때 같기도 하고 색깔은 녹색에 가깝다. 해조류인가 플랑크톤인가. 그때 문득 ‘마린보이’가 떠올랐다. 물속에선 산소 껌을 씹었다던 마린보이 말이다. 그걸 생각하면서 지은 시다.

<마린보이의 꿈/ 최희철>


위도 20도, 아열대의 바다는

끈적거릴 뿐 움직임이 없다.

끝없이 반복되는 투망(投網)질로

바람도 힘없이 가라앉아

새파란 청춘은 비릿한 냄새에 친친 감기고

숨 막혀 견디지 못하는 나는

50미터, 깊은 곳에서 예망(曳網) 중인

그물의 전개(展開) 상태를 확인해야겠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바다 속으로 뛰어 들고 싶었다.

두꺼운 현실의 장막을 찢고

발가숭이로 수압(水壓)을 잊는 곳.

푸르디푸른 빛의 세계로

와이어(wire)를 잡고 따라 내려가서

천장망(天仗網, upper net)의 입구를 붙잡고

물살을 멋지게 타보기도 하면서

갑오징어, 도미, 갈치, 민어 등과 만나고 싶었다.

그때 나는 마린보이가 되어

그들의 은빛 비늘, 현란한 춤의 절정을

산소 껌처럼 질겅질겅 씹으리라.


물 바깥의 세상을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오히려 나를 미치게 만들어

나와는 완전히 다른 종족들과

연애를 하고, 새끼를 낳고

생명이 다할 때까지

아니 특례보충역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행복한 용궁 속에서 머물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건 어쩌면 용궁으로 가는 꿈이었다. 떨리는 메인와프가 일정한 각도로 바다 속에 안테나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난 그것을 타고 들어가면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난 좆같은 감상주의 새끼인가?

우리 피부는 그렇게 해수에 적응되어 갔던 것이다. 아니 적응이 아니라 항전(抗戰)인가? 피부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말이다. 맨 처음 해수로 샤워를 했을 때는 미끌미끌한 게 마치 묻은 샴푸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 옷을 입는 것 같았다. 그래서 몇 번이고 다시 씻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해수의 고유한 속성이었다. 그렇게 미끄러워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피부도 빨래도 처음엔 그렇게 어색한 미끄러움 속에서 서서히 적응하고 있었다. 생생한 피부의 숨구멍들이여 여태까지 쉽게 만날 수 없었던 소금기가 어떤가? 그것 역시 하나의 노동조건이었고 노동 강도였다.

해수, 샴푸, 세탁기로도 해결되지 않는 것도 있었는데 기관실에서 기름이 절은 작업복 그리고 면장갑이었다. 그것들은 끈으로 묶어 바다로 던졌다. 그러면 배의 달리는 힘과 바다의 표면이 만나 ‘빨래 방망이’ 효과가 나타났다. 한 3일 정도 매달고 다니면 기름때가 쏙 빠졌다. 작업복도 그렇게 하는 선원들이 있었다. 하지만 가끔 너무 지나친 방망이 효과 때문에 끈이 떨어지거나 작업복이 닳아 묶어 놓은 빨래가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생겼다. 그들은 자유를 찾아 훨훨 날아간 것이다.

현장발 하고 하루 반이면 무스카트 항에 도착할 수 있기에 청수 탱크가 개방되고 선원들은 비누로 해수의 침전물들을 벗겨낼 수 있었다. 피부와 비누가 만나니 놀랄 만큼 엄청난 거품이 생겨났다. 피부, 청수, 비누의 용승(湧昇) 작용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북북 우리는 한 항차의 고됨을 씻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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