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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스마엘 그리고 2박 3일 논스톱 하역
이스마엘(Ishmael)은 K808호 감독관(inspector)이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이슬람을 좋게 보았다. 대학 축제 때 민족의상을 입고 행렬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아랍인 복장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일부 사람들은 이슬람교를 이상한 종교라고 여기는 경우가 있지만 이슬람은 ‘일신교’ 중에서 가장 순수한 종교 중 하나다. 인간과 신 사이가 제일 깨끗한 종교가 이슬람이다. 중간 대리점 없이 이슬람 교인들은 위대한 ‘알라’를 직접 접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리도 어렵지 않다. 알라를 철썩 같이 믿고 그냥 착하게 살면 된다. 단 우상(偶像)숭배는 안 된다. 그런데 우상은 이슬람교뿐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나쁜 것이다. 우상이란 ‘헛된 것’이니까. 철학, 과학, 기술 그리고 예술 등 여러 방면에서 역사의 중요한 족적도 남겼다. 그래서 이슬람은 문화로서도 훌륭하다. 그들은 성선설(性善說)을 믿고 평화롭게 사는 사람들이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이슬람 시조와 상관있다. 아브라함(Abraham)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고, 그 아브라함과 이집트 여종 ‘하갈(Hagar)’ 사이에서 태어난 게 ‘이스마엘’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수많은 이슬람교도 중에 메카(mecca)를 향해 경배를 드리거나 ‘헤지라(hegira,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도망 간 사건, 성스러운 도망으로 이슬람교 원년으로 여긴다. 622년)’ 같은 이슬람에서 중요한 사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이슬람이 그들에게 종교라기보다는 문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모태신앙’ 같은 것 말이다. 태어나서 부모 손에 이끌려 모스크(이슬람 사원)에 가게 되고 그들이 무릎을 꿇고 알라에게 경배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장하는 것 말이다.
이스마엘은 나와 나이가 같았고 쿠웨이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했다. 들어보니 자기 친구들 중에 고등학교 졸업한 사람들은 대부분 쿠웨이트나 바그다드에서 공부를 했다고 했다. 그땐 오만에 대학은 물론 다닐만한 고등학교가 없었다는 얘길 들었다. 당시 오만 정부는 그렇게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청년들을 많이 채용했다고 한다. 당시 오만 뿐 아니라 중동의 여러 아랍 국가들은 자국의 중간 관리직으로 인도나 파키스탄의 고급인력을 많이 채용했었다. 무스카트 항에도 컨테이너 사무실에도 그리고 오만 수산회사 현장관리 책임자들도 모두 인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현장 노동자로는 아프리카인들이 주로 들어와 있었다.
이슬람을 매우 폐쇄적인 종교, 문화로 생각하였지만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다는 생각을 이스마엘과 친해지면서 알게 되었다. 그곳 청소년 혹은 청년들도 우리와 비슷하다고 했다. 그는 쿠웨이트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면서 키스까지는 해 보았지만 섹스는 못해 보았다고 했다. 같은 동네에서 이성교제를 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는 술을 좋아해도 술이 강하지는 않았다. 내가 당직을 마치고 내려가면 자주 기다리고 있었다. 위스키는 올리브 열매 절인 걸 안주삼아 먹었는데 그 정도 안주로는 독한 위스키를 마시기 어려웠다. 당시 나는 초사와 같은 침대(한 침대에 교대로 잠을 잤다)를 사용했는데 나는 위 칸 이스마엘은 아래 칸이었다. 그에게 아랍어 인사말 그리고 이슬람 기도문 같은 것도 배웠다. 아랍어는 우리와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자를 쓴다는 것도 알았다. 그게 멋져 보였다. 그때 영향으로 지금 나는 서명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현지 ‘트레이너’들도 한두 명 승선하였다. 명목은 그들을 승선시켜 우리의 원양어업기술을 전수해 주는 것이지만 승선하면 그냥 처리원이었다. 그들이 일 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어떻게 할 수는 없었지만 말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처리실로 내려와 어획물 처리를 도와주었다. 감독관을 포함한 그들의 임금은 모두 우리 회사에서 지급하였다. 입어조건이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트레이너가 나중에 감독관이 되는 것은 보질 못했다. 아마도 국적이 달라 그랬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감독관은 오만인 즉 아랍인들이고 트레이너는 아랍인도 있지만 대부분 아프리카인들이었다.
오만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나라였는데 가끔 무스카트 시장엘 가면 한 명의 남자가 두 명의 여자들과 함께 쇼핑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일부다처제를 허용해도 두 명의 부인이 함께 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다니는 사람들도 있는 걸 보니 이상했다. 사람 따라 다른 모양이다.
보통 남녀 간의 사랑이라면 ‘배타적 사랑’을 의미한다. 가령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도 나를 사랑해야 하고, 그게 결혼으로 이어지면 사랑이 서로를 구속하는 힘으로 작동하는 것 말이다. 그러니까 둘의 사랑에 다른 사람은 낄 수 없으며 더불어 그 사랑과는 별도의 사랑(이른바 외도)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결혼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변치 않는 사랑을 하겠다는 결의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가능하지 않은 것을 억지로 맹세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결혼의식은 중세 교회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교회가 신도들의 결혼에 개입한 것이다.
가정 내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 ‘일부일처제’ 때문에 생길 가능성이 높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왜냐하면 일부일처제 그리고 사랑에 의한 결혼이란 가능하지 않은 것을 억지로 구겨 넣은 판도라의 상자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 속에 든 사랑이라는 저장물은 부패하기 쉬워 판도라 상자 안으로 부패의 힘이 풍선처럼 빵빵해 질 때가 있을 것이고, 그걸 겨우 억제하고 있는 상자는 마치 시한폭탄처럼 언젠가는 큰 폭발음을 내며 터질 수 있다는 말이다. 반면에 일부다처제 혹은 일처다부제 결혼제도는 일부일처제보다 훨씬 여유 있는 공동체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가정 내 여성 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지점이 더 많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다처제 혹은 일처다부제는 성욕의 과다 혹은 특별함과는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들의 문화다. 오히려 섹스는 일부일처제 결혼에서 더 중요하게 되고 그래서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다부다처제’ 같은 군혼(群婚)제가 좋다고 해야겠지만 문화나 풍습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랍인들은 두 번째 부인을 인도에서 데려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그들의 말로는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인도여성은 상대적으로 아랍여성에 비해 학력이 높고 개방적이라서 남편의 입장에서 보면 좋은 점이 많다고 했다. 오만 수산청에 직원들 중 두 번째 부인이 인도사람인 경우 종종 배로 부인을 데리고 오기도 했다. 그는 아랍여성과는 달리 우리와 농담을 주거 받거나 장난을 치기도 했었다.
라마단(ramadan, 이슬람력 9월)은 아침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물을 포함한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금식 기간이었다. 건강이나 살림살이의 크기 같은 것 때문에 생긴 것 같았다. 먹지 않으니까 돈이 절약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오히려 라마단 기간 중에 빈부의 격차는 더 심하게 드러난다고 했다. 해가 지면 라마단 기간엔 축제 비슷한 음식 파티가 벌어지는데 그때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차이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라마단 때 입항하면 우리 같은 이교도들은 아무리 더워도 밖에서는 물 한잔도 못 마신다. 반드시 실내로 들어가서 마셔야 했는데, 뜨거운 햇빛 아래 하역 할 때는 몹시 힘들었다. 아랍인 중 이슬람이 아닌 기독교인도 많았는데 그들도 라마단이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이슬람교인 중 라마단 금식을 어기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돼지를 불결한 동물로 취급하기에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했다. 돼지는 잡식 동물이다. 이슬람교도들은 초식 동물만 먹지, 돼지고기 뿐 아니라 육식 동물은 전부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 역시 그곳의 자연환경과 관련된 것이리라. 그러다 보니 돼지고기가 엄청 비싸고 구입하기도 어려웠다. 당연히 식당에서 돼지고기는 팔지 않았다. 하지만 오만과는 달리 좀 더 개방된 ‘아랍에미레이트(UAE) 같은 곳에 가면 돼지고기를 구하기가 한결 쉬웠다.
트레이너 ‘존비’는 아프리카 자이레 출신이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트레이너를 했기에 한국선원과 친했다. 한국말도 곧 잘해 우리와 대화가 되었다. 일도 열심히 하고 성격도 쾌활했다. 그러다보니 한국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아하였다. 그때 알게 된 노래가 ‘말라이카(malaika)’라는 노래였다. 우리에겐 ‘보니엠(bony m)’을 통해 알려진 노래인데 존비는 노래 가사가 스와힐리(swahili)어로 되어있다고 했다. 스와힐리어는 아프리카에서 많이 쓰이는 언어 중 하나인데 내용은 이슬람의 관점으로 천사와 자연을 찬양하는 노래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의 아리랑과 비슷한 아프리카에서 유명한 민요였으며 수많은 가수들에 의한 여러 버전이 있었다.
또 ‘밥 말리(bob marey)’라는 가수도 알게 되었다. 그는 ‘자마이까(jamaica)’ 출신으로 레게(reggae)음악의 원조로 여겨지는 사람이었다. 난 대체로 음악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말라이카와 밥 말리의 여러 노래들은 날 감동시키고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밥 말리’는 제3세계에서 ‘음악의 체 게바라’로 불리는 사람이었고, 그의 곡들은 저항적인 내용이 많아 전두환 시절 우리나라에선 당연히 금지곡이었다. 그의 노래 ‘get up stand up’은 흑인들이 집회할 때 우리의 ‘임을 위한 행진곡’처럼 불리는 노래라고 들었다. 그 이후 난 ‘밥 말리’ 음악을 좋아하는 걸 넘어 한동안 ‘밥 말리’를 존경하는 지점까지 나아갔다. 그는 음악 하는 운동가이고 철학자였다. 그의 종교인 ‘라스타파리’는 종교이면서 ‘운동(Rastafari Movement)’이었다. 그것은 흑인을 넘어 억압 받는 모든 소수자들을 위한 운동이었다.
놀라운 것은 입항하면 본선 선원들이 하역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배들이 입항하면 항만 노동자들이 하역하는 게 ‘강제 조항’으로 되어 있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기지장이 말하길 무스카트 항에는 그런 항만 노동자들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눈에도 다른 나라 배들은 항만 노동자가 하역을 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 해외어업 트롤어선들은 모두 그렇게 하질 않았다. 또 다른 이유는 밖으로 외출해 봐야 놀 곳이 없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무스카트는 여성도 없었고 도박장도 없었으며 낮에는 술을 마실 수도 없었다. 오직 야간에만 호텔에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하역은 2박 3일을 쉬지 않고 해야 했다. 선원들은 3개조로 나누어 한 조는 어창, 한 조는 배 밖의 컨테이너, 다른 한 조는 휴식이었다. 계산해 보면 어창에서 8시간 일하고, 밖으로 나와 컨테이너에 어획물냉동박스를 적재를 8시간, 그게 끝나면 8시간 쉴 수 있었다. 그러니까 16시간 노동하고 8시간을 쉬는 셈이다. 게다가 항해사는 단 한 시간도 쉴 수 없었다. 초사를 뺀 모든 항해사는 컨테이너에 곁에서 적재되는 어획물의 종류와 사이즈를 기록해야 했기 때문이다.
쉴 수 있는 사람은 선장 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장은 대부분 하역이 시작되기도 전에 기지장과 함께 기지장 승용차로 외출을 했다. 그때 국장은 입항과 하역 서류를 마치고 함께 나갔으며 기관장은 기관실에 특별한 일이 없다면 역시 함께 외출을 했다.
우리가 받는 하역비는 30불이었는데 완전히 노예가 된 것이었다. 항해사들은 2박 3일 잠을 못 자니까 나중에 어획물의 종류와 사이즈를 컨테이너에 적재하는 선원들이 불러 주는데 그걸 잘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초사 역시 하역에 직접 참석하지 않지만 쉬질 않고 어창과 컨테이너 상황을 체크해야 했다. 그리고 다른 항해사들이 모두 잠도 못자고 일하는데 자기 혼자 쉴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가끔씩 초사가 교대를 해 주어서 하급 항해사들은 1시간 정도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스스로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별이 잘 가지 않았다. 짐승이라고 그렇게 일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천동설의 시대에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걸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하듯 우린 그렇게 하역을 하면서도 그 악마 같은 노동을 힘들어 하기만 했지 거부하질 못했다.
그렇게 지옥 같은 하역이 끝나면 죽은 듯 몰려오는 잠을 자다가 잠에서 깨면 출항 시꼬미를 위해 잠시 무스카트 항 밖으로 나가는 게 고작이었다. 그것도 야간에는 외출이 금지되어 저녁 6시 이전에는 배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니까 입항해서 논스톱으로 2박 3일 하역하고 자유 시간 1박 2일이면 출항이었다.
선원들의 불만은 부글부글 끓었는데 선장을 비롯한 국장과 기관장은 때론 술을 마시고 취해서 밤늦게 기지장의 승용차를 타고 배로 돌아왔다. 몸에서 술 냄새가 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늦게 오면서도 하역하는 선원들 수고한다고 음료수 한 병 가져오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기지장이나 선장은 돈이 아까워 그런 것을 가져 오지 않았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의 혹독한 노동조건이 그들에겐 당연한 일로 여겨진 것 같았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 온 것이다. 항해사에게 하역 진행률을 묻고는 침실로 들어가 버리는 게 고작이었다.
무스카트 항엔 분명히 하역할 항만노동자가 없다고 했는데 우리 주변 다른 나라 배들은 모두 항만 노동자들이 하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2박 3일 논스톱으로 하는 노동 강도는 지옥이었다. 본선에서 카고 윈치를 운전하는 갑판장과 헷또는 잠이 와서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고, 어창에서 목꼬(하역을 위해 만든 어획물을 쌓기 위한 판 혹은 망태기)에 냉동 어획물을 적재할 때, 본선 밖 컨테이너 곁으로 목꼬를 내릴 때, 어획물 가득 실은 목꼬가 본선에서 컨테이너로 오는 도중 화물(냉동된 어획물이라 돌덩어리의 강도와 같음)이 떨어질 가능성 등등 하역 작업 주변엔 위험요소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외출은 저녁 6시까지였기에 선원들은 외출해도 술 한 잔 할 시간도 없었다. 외출하면 생활필수품(특히 샴푸) 구입하고, 시장 통에 있는 전기구이 통닭집에 가서 프랑스산 육계 몇 마리 뜯는 게 고작이었다.
아마도 세상 어디에도 2박 3일 논스톱으로 250~280톤의 어획물을 직접 하역하는 어선원들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데도 거짓말로 우리가 직접 하역을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고 하면서, 자기들도 바다에서 고생하고 들어 온 선원들에게 하역 시키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면서, 밖에 나가봐야 할 것도 없다면서 차라리 빨리 하역하고 출항해서 바다에 가서 쉬라고 하던 얼굴에 개기름이 질질 흐르던 배불뚝이 기지장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게다가 그 느끼한 냄새, 불결한 돼지새끼!
그와 공범에 가까운 선장, 그렇게 힘들게 하역을 마치고 출항 했는데 도선사가 돌아가고 배가 외항으로 나오자 피곤한지 자기 방으로 내려가면서 하는 말.
“2항사 힘든 줄은 아는디 절대 졸면 안뎌”
결국 나와 3항사는 두 시간씩 브리지 구석에서 교대로 휴식을 취하면서 배를 몰았다. 그렇게 위험하다 생각하면 선장이 몇 시간 브리지 당직을 서 주던지 그러면 잠시 눈 좀 붙이고 항해사들이 당직을 서면되는데 말이다. 그게 뭐라고 2박 3일 동안 한 숨도 자지 못한 우리에게 배의 운전을 맡기고 침실로 내려가는지.
선원들은 몇 항차 하역 해 보더니 불만이 쌓여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