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3항사 강철의 몰락

23)

by 최희철

23) 3항사 강철의 몰락


3항사 강철은 K808호 황태자 같은 인물이었다. 어려운 협수로 통과 과정에서 선장을 잘 보좌한 것부터 시작해서 선원 관리라는 측면에서도 선장이 선호하는 이른바 ‘대가 쎈’ 항해사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거만하거나 선장 눈앞에서만 열심히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는 혼자 있을 때도 늘 선내 분위기를 생각하였으며 스스로 일을 찾아하는 이른바 성실한 항해사였다. 그에 비하면 2항사 그리고 나와 한 조가 된 3항사 고창준은 선내에서 존재감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난 선내 분위기 같은 것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으며 나에게 주어진 업무도 약간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편이었다. 가령 당직 올라가기 전 데끼나 처리실에 내려가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3항사 고창준이 말해 주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 끝냈다. 즉 어디를 가도 건성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는 말이다. 그건 고창준 3항사도 나와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았는데 그게 나이와 상관있는 것 같았다. 처음엔 자신도 마구로 배 타던 성향이 있어 선원들을 휘어잡아 보려고 했던 모양인데, 그런 일은 3항사 강철이 이미 설치고 다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지 고창준은 그런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꺼려하는 것 같았다. 아니 꺼려한다는 부정적 태도보다는 그냥 무관심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나와 당직을 함께 서면서 더욱 더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유유상종이라고 나와 당직을 서면서 3항사가 이렇게 저렇게 설쳐 봐야 특별히 자기에게 유리한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무튼 그런 것 때문에 선원들 사이에서는 강철보다 우리가 더 좋은 사람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하지만 고창준은 선원들하고도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는 선원들과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지만 대화를 나누는 경우에도 업무와 관련된 것에 국한해서 짧게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나는 다양한 선원들과 다양한 대화를 나눈 것 같다. 여자 이야기도하고 정치 이야기 그리고 선원들이 누군가 흉을 보면 쉽게 호응해 주기도 했었다. 원양어선에서 이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관은 사관끼리 선원은 선원끼리 노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가령 사관이 선원들하고 너무 과도하게 붙어 다니면 위계가 무너져 선내 분위기 망친다고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히 선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사관들 특히 선장들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던 것 같다.

내가 초보이기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선원들에게 공식적 업무 이외의 일을 시켜 본 적이 없다. 그런 것들은 모두 3항사들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령 이곳에서 저리로 무엇을 옮겨라, 어디를 청소해라, 무얼 만들어라, 무얼 하지마라 등등. 그러다 보니 2항사인 나는 그냥 브리지에서 당직 서는 항해사로만 인식되고, 선원들에게 자기들과 같이 노는 사람 그리고 약간의 지식이 있어서 이야기해보면 특이하거나 재밌는 사람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난 본래부터 그랬던 것 같다. 그게 트롤어선에서 특히 3항사를 거치지 않고 2항사가 되니, 내가 무언가 특별하게 할 일을 발견해서 선원들에게 시킬 게 없었다. 그런 게 나와 같이 당직을 서는 고창준 3항사에게도 전염이 된 것 같았다. 우리는 선장이 밥 교대로 브리지로 올라오면, 하여 함께 식당으로 갈 때 그리고 식사를 후딱 마치고 함께 사이드 데끼에서 담배 필 때 그리고 브리지에서 선장용으로 들어온 ‘대추(야자나무 열매, date)’ 훔쳐(?) 먹을 때 의기투합하여 낄낄거릴 뿐 배로 볼 때 큰 도움이 되질 않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초사 역시 어떤 업무가 하달되면 자신과 함께 당직을 서는 3항사 강철과 함께 그 일을 처리할 뿐 나에게 브리지 당직 업무 이외에는 따로 시키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물론 K808호에서 난 좀 특별한 경우지만, 대체로 2항사라는 직책이 그런 것 같았다. 상선의 경우 2항사는 미드(mid, 00~04시, 12~16시) 당직을 서는 관계로 배에서 벌어지는 각종 잡다한 업무 수행에서 열외가 되는 경우가 많다. 가령 홀드 청소(수당은 1/n로 나눈다) 같은 것도 2항사는 열외다. 그래서 2항사를 ‘항해장’이라고 하는 가. 2항사는 항해와 관련된 일을 할 뿐 다른 오버타임을 할 기회가 없었다. 미드 나이트 당직 마치면 새벽 4시니까 바로 자야하고, 한창 일이 벌어지는 낮 시간에도 브리지 당직시간이니 또 열외였다. 심지어 16시가 지나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 일에 초사가 빠질 수 없으므로 차라리 초사 대신 브리지 당직을 연장해서 서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구나 갑판용품 재고 챙기는 것, 의약품이나 술 그리고 안전용품 챙기는 것 등도 모두 초사 주도하에 3항사가 보조역할을 할 뿐 2항사가 호출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활동적이며 약간은 다혈질인 강철 3항사가 있는 K808호는 그런 게 더 심했던 것이다. 어떨 때 보면 강철은 초사가 할 일을 하고 다닐 때도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곽선장이 강철의 그런 점을 너무 좋아했다는 것이다. 2항사인 나에게 3항사를 칭찬할 때가 많았으니까. 경쟁심을 자극하려는 의도였던가.

“조 놈 비록 전문학교 나왔어도 열심히 하는 게 장난이 아니여”

“...”

“열심히 하면 쑥쑥 크는 거여”

나는 중간에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일부 선원들과는 좀 다른 측면에서 친하게 지냈는데 그 중 하나가 김억준이다. 자기 말로는 마누라가 초등학교 선생님이라고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초등학교 선생 마누라와 뱃놈 남편은 쉽게 떠오르는 조합이 아니었다. 선입견인가? 하지만 그에게 온 편지(자랑삼아 은근히 보여주는)와 책 따위를 보면 마누라가 초등학교 선생인 게 분명했다. 의심이 강해도 의심보다 더 강한 증거가 있으니 인정해야 했다.

‘이 놈이 어떻게 꼬셧지? 말까지 더듬는 놈이’

그의 몸에는 문신이 많았다. 하지만 문신이 갖고 있는 위압감과 그의 얼굴, 말 더듬는 버릇은 쉽게 매치가 되질 않았다. 난 오히려 그의 문신 작업에 관심이 있었다.

“안 아프더나?”

“예예 예전에 피치 모모 못할 사정이 좀 있었습니더”

사연은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을 한다. 마누라는 고등학교 때 여자 친구이며 자신은 그때 나쁜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누라는 자신이 그 길에서 빠져 나온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했다고 했다. 김억준의 말을 허풍이라는 선입견으로 듣게 되면 허풍처럼 들렸지만 아무튼 그는 아는 게 많았다. 그리고 집에서 마누라가 아니 선생님이 보내 준 잡지(신동아), 신문들을 반드시 내게 보라고 갖다 주었다. 그리고 가끔 소설책이 오곤 했는데 3류 통속 소설이나 무협지 따위가 아니었다. 이외수, 김승옥, 이문열, 조세희 심지어 토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까지. 그리고 그때 내가 접한 신문이 ‘한겨레신문’이었다. 한겨레신문은 세상에 대한 나의 관점을 많이 바꿔주었다. 그리고 30개월 오만 어장에 있을 동안 나의 생각을 다양한 방면에서 성숙시켜 주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여 나는 우리 집에 따로 한겨레신문을 보내 달라고 해서 내가 읽고 좋았던 부분을 대학노트에 스크랩하기도 했는데 그 분량이 거의 10권이 되었었다.

김억준과 어울리는 선원이 하나 있었는데 갑판원 조원성이다. 그는 초보 선원이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별명이 ‘라스 조’가 되어 버렸다. 이번 어기 마치고 꼭 라스팔마스어장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K808호에서 주워들은 라스어장 이야기들을 긁어모아 마치 자신이 라스어장에 갔다 온 사람처럼 말했다. 가령 오버타임이 좀 길거나 몽고가 많이 올라오면 ‘라스에서는 이럴 때 어떻게 한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던 것이다. 그가 가끔 꼰대의 말투 ‘나가 라스 있을 때는 말이야’는 K808호의 유행어가 되었다.

결정적으로 그들이 나와 친하게 된 것은 그 둘 모두 대한민국 정치판에 관심이 컸다는 것이다. 난 대학 다닐 때 ‘운동권 학생’이 아니었다. 그런 걸 몰랐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입학과 동시에 ‘군부학장 사퇴’를 외치다가 계엄령이 내려져 학교의 문이 닫혔었다. 우리가 외친 ‘군부학장 사퇴’는 정치적이긴 하지만 엄밀하게는 우리 학교 내부의 문제였다. 스크럼을 짜고 학교 운동장을 돌면서도, 이불을 가져와 학교 강당에서 잠을 자면서도 우린 절대 교문 밖으로 나가지 말자고 결의했다. 아니 운동권의 ‘맹아(萌芽)’적 상태였던 셈이다.

계엄령은 휴학을 의미했다. 나는 대학을 4년 다닌 게 아니라 3년 반을 다닌 셈이다. 나의 정치적 맹아는 학교라기보다는 휴학을 통해 자라난 것 같았다. 휴학할 때 문화사 교수가 읽고 레포트 제출하라고 한 책이 ‘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였다. 지금 보면 그리 어려운 책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당시 매우 어렵게 느껴져 읽다가 몇 번이곤 던졌다가 다시 읽고 다시 읽곤 했던 책이다. 역사의 민중성 같은 것을 이야기 한 책으로 알고 있다.

‘카’를 어떤 검사는 ‘공산주의자’로 규정했다고 한다. 그는 공산주의자 아니다. 그런데 그가 공산주의자라고 하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지? 난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당시 ‘전대협’ 운동을 좋게 보았었다. 젊은 사람이라면 저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건 우리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이북에서 피난 내려오셨는데 김대중씨가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우암동 ‘동책’으로 그의 선거운동을 하셨다. 당신은 야당적 성향을 갖고 계신 것 같았는데 그 뿌리가 얼마나 깊고 튼튼한지는 확실치는 않다. 왜냐하면 당신은 혜화여중 지정사진사였는데, 당시 학교 재단 이사장이 정상구씨로 신민당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화당을 좋아하는 성향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중학교 때 ‘승공통일의 길’에서 배운 북한 어린이들은 국수 한 가닥(한 묶음이 아니다)을 갖고 나누어 먹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했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누가 그라데?”

“반공 선생님이요”

“멍청한 놈”
“진짜로 샘이 그랬어요”

“북한이 우리보다 더 잘 산다 그런 공갈 말 믿지 마라”

“아이 아부지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야 임마 내가 그기서 살다 왔다 아이가”

“...”

“옛날에 우리 집 잘 살았다”

이북에서 내려와 수용소에서 신문읽고 있으니까, 남한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더니

‘피난민이 신문 본다’면서 놀라던 일화를 말해 주기도 했었다. 당신은 18살 때 내려오셨는데 ‘북에 있을 때 잘 살았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40살 때 같이 내려오신 할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내려오실 때까지 집에서 힘든 일은 하지 않으시고 이발 기구를 사서 동네 아이들 머리 깎아 주고, 나무 그늘에서 퉁소도 불고 하셨다는 걸 보면 그리 못 살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북에서 그렇게 살 사셨기에 남으로 내려와서도 그렇게 태평스럽게 세상을 사셨는지는 모르겠다. 언제든지 아니 조만 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도 생각하신 것이다.

아무튼 난 ‘야당끼’가 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억준과 조원성도 그랬다. 당시는 전두환 독재 시절이라 브리지에서 보이스 통신으로 정치 이야기를 자주했다. 전라도 사람들은 대체로 ‘야당끼’가 있었다. 전라도 출신이 아닌 몇 명의 다른 선장들은 정치적인 이야기를 잘 하지는 않았지만 해외어업은 전라도 사람들이 대세라서 대 놓고 전두환을 옹호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의 정치 이야기는 늘 훌륭한 정치인이 나와야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잘 될 거라고 주장했었다. 모두가 훌륭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정치인을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그것은 정치적 ‘메시아주의’처럼 여겨졌다. 그건 아직도 그렇게 훌륭한 정치인이 나타나질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 선장도 전라도 사람이라 가끔 김대중 선생을 말하면서 그런 사람이 정권을 잡아야 나라가 똑바로 설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김대중씨에 대한 전라도 사람들의 존경과 기대는 대단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이 승선하고 있는 트롤어선 내부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 비민주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질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하지 않았다는 것보단 몰랐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오만 어장 트롤어선의 민주주의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모래와 같은 일상이 모여 한 나라의 민주주의 즉 모래성이 이루어지는데 말이다. 정치란 그렇게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정치란 인간 세계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것 같지만 어쩌면 아주 높은 곳에 있는 경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가장 낮은 곳에 발을 딛고 있다. 그걸 잊지 않는다면 민주주의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원성은 정치도 정치지만 성(性)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했다. 20살 때 서울에 직장 구하러 갔는데 서울역에서 ‘히빠리’를 만난 이야기를 했다.

“날도 추운데 몸 좀 녹이고 가시죠”

“안 그래도 그거 사러 왔는데”

“??”

“요즈음 보지 한 가마 얼마요?”

“...”

“우리 아버지가 그거 한 가마 사오라고 해서요”

우리는 그런 얘기로 낄낄 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세계 좆 크기 대회, 씹 크기 대회 그리고 그곳 우승자들 둘이 같이 살면서 생긴 에피소드, 그리고 ‘소림사의 북소리’, ‘독일 게슈타포 이야기’ 등을 하며 우리는 시간을 이(벌레) 잡듯 잡아 죽였던 것이다.

3항사 강철이 씩씩거리면서 브리지로 올라왔다. 좀 전에 급냉실에서 갑판원 이상정과 고성이 오고 갔었다. 그곳은 처리실 용품을 넣어 두는 작은 창고이기도 하고 선원들 몇몇은 자기들의 여행가방(크면 침실에 두지 못한다)을 보관하기도 했다. 아마 그곳에서 산토리 위스키 빈병이 발견되었나 보다. 문제는 병이 창고에서 나온 게 아니라 이상정의 가방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 병은 빈병이었다. 묘한 관점들이 엉켜 있었다.

술병이 그 창고에서 나온 것을 3항사가 발견한 것은 문제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술병이 이상정의 가방 즉 개인소지품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걸 왜 자기 허락도 없이 3항사 당신이 열었냐는 게 이상정의 항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술병이 있었다는 것은 또 이상정에겐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술병이 빈병이었다는 것은 또 이상정에게 큰 문제가 되질 않았다. 즉 이상정이 허락도 없이 항해사가 관리하는 창고에서 산토리 위스키를 훔쳐 마셨느냐 하는 게 3항사가 말하는 사건의 핵심이었다. 실제로 몇 달 동안 20병이나 없어졌던 것이다. 3항사 주장에 의하면 그 일부가 그 창고 그것도 이상정의 가방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빈 병이라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소주 반의 반 잔 정도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문득 바가지 골목에서의 사건이 생각났다. 둘 다 빈 술병이어야 하는데 술이 남아 있다는 게 문제였던 것이다.

급기야 서로 멱살을 잡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상정의 절친 헷또가 뛰어 왔다. 그러면서 ‘이놈의 배 구석은 어찌 된 게 3항사가 너무 설친다’고 소리치며 둘이서 3항사에게 달려들었다. 둘은 술을 훔친 적이 없다고 했지만 술병이 가방에서 나왔다는 것은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이상정과 헷또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으면 끝났을 문제 같은데 이 문제로 며칠 동안 배가 시끄러웠다. 게다가 선장은 오래 전부터 초사에게 술 관리를 잘 하라 했고 그게 아마도 강철에게까지 전달되어 강철은 나름대로 사명감을 갖고 술을 관리하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술이 20병정도 없어지니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용의자인 이상정을 추격한 것이다. 헷또는 말다툼 하는 과정에서 자기가 월남 있을 때 사람도 죽여 보았다 같은 극단적인 발언까지 하면서 3항사를 자극했다.

나중에 보니 술을 훔친 건 이상정만이 아니라 헷또도 가담했었다. 그리고 술을 갑판원 모두와 나누어 마신 것도 아니었다. 트롤경험이 많다는 그들은 선원들 사이에서도 우월감에 사로 잡혀 있었다. 이른바 선내 분위기를 흐리게 하던 조(組)였던 것이다. 둘은 합심하여 갑판장을 좆도 아닌 존재로 보는 것은 물론 선원들 보는 앞에서 갑판장에게 대들기도 하였다. 가령 일의 순서 같은 것에서 갑판장과 의견이 다를 때가 많았는데 갑판장이 어떻게 하라고 시키면 ‘좆도 모르는기 갑판장이라’면서 뒤에서 험담을 하곤 했다.

결국 초사가 알게 되어 술을 3항사 침실로 옮기고 이상정과 헷또에겐 경고를 주었다. 초사도 3항사에 비하면 성격이 무난한 편이라 그 정도에서 끝내려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상정과 헷또는 항해사들과 싸운 그들이 나름대로 어떤 전과를 올렸다고 생각하였는지 선원들에게 그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자랑삼아 하곤 했었다. 그러니까 둘이서 술을 훔쳐 마셨지만 그들은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다는 걸 자신들이 이번 전투에서 승리한 것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둘이서 3항사를 격퇴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3항사 강철은 초사를 거치지 않고 선장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보고해 버리고 말았다. 선장은 다른 항해사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에게 보고된 3항사의 보고를 나는 모르겠다면서 그냥 넘어 갈 수는 없었다. 그 사건에 대해 선장이 어떻게 처리를 하는지 보여 주어야 했던 것이다. 결국 갑판원 이상정은 브리지로 호출되었다.

“이상정 이 놈 새꺄 너가 술 훔쳐 먹었어!”

이상정은 분위기가 험악한 것을 알고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하지 않는다.

“너가 술 훔쳐 먹었냐고!”

“...”

“우리가 술을 안주디, 왜 훔쳐 먹어 훔쳐 먹긴”

그 말과 동시에 선장은 이상정을 뺨을 아주 강하게 한 대 후려쳤다. 그리고 가속도가 붙은 것처럼 몸이 튀어 오르면서 힘차게 대 여섯 대를 연속으로 후려졌다. 이상정은 더 이상 맞아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거기 꿇어 안저 개새끼야!”

이상정은 얼굴이 벌겋게 된 채 어탐기 옆에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선장도 얼굴도 매우 상기되었다. 선장과 이상정의 나이는 비슷했다. 이상정도 이상정 나름대로는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사건에 대해선 더 이상 언급이 없었다. 그런데 헷또는 브리지에 호출되지도 않았고, 선장에게 맞지도 않았으며 따로 그 사건과 관련해 선장에게 욕을 얻어먹지도 않았다. 이상했다. 하지만 이상정과는 달리 헷또는 어느 날부터 얼굴이 어두워졌다. 왜냐하면 이상정도 그 이후 헷또와는 가까이 하지도 않고 조용히 자기 일에 열중하는 선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상정은 마치 백신을 맞은 사람처럼 그 사건을 잊고 3항사 강철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선장, 3항사, 이상정, 헷또 사이에서.

헷또는 그 항차를 마치고 귀국했었다. 이른바 ‘중도귀국’이었다. 당시 원양어선 선원들은 자신의 선원수첩에 ‘중도귀국’이라는 글자가 쓰여 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그것 때문에 조금 아파도, 피곤해도, 좆같아도 모든 걸 참아 내었던 것이다. ‘중도귀국’엔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다. 다른 배를 타려고 선원수첩을 내밀면 선원 구성을 하는 사람이 ‘중도귀국’이라는 글자를 볼 것이고 그러면 물을 것이다. 왜 ‘중도귀국’ 했냐고. 아파서, 싸워서 아니면 못 견뎌서? 그러면 일단 승선엔 후순위가 되었다. 그런데 헷또의 ‘중도귀국’은 말이 ‘중도귀국’이지 ‘강제하선’이었다. 당시 ‘강제하선’하면 우리나라 공항에서 경찰들에게 체포되어 조사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강제하선’을 시키고 그 선원에게 불리한 상황들을 회사에 보고하면 회사에게 경찰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중도귀국’이든 ‘강제하선’이든 회사에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도금, 항공기와 각종 체류 경비를 청구하거나 청구할 것이라고 협박하는 경우도 많았다. 참으로 좆같은 풍경이었다.

당시 ‘중도귀국’은 원양선원들에게 ‘주홍글씨’와 같은 것이었다. 헷또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정말 집에 가고 싶은데, 여러 가지 불이익 때문에 ‘중도귀국’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실 ‘중도귀국’은 장기계약과 관련이 깊었다. 30개월 아니 36개월은 얼마나 긴 시간인가. 그렇게 겨우겨우 힘들게 장기계약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도망 간 사람, 죽어 버린 사람, 변해버린 주변 환경과 이웃들 어쩌면 30개월이라는 긴 시간은 표현하기가 어려운 참으로 무서운 시간이었던 것이다. 30개월을 마치고 난 다음이야 겨우 그렇게 긴 시간이 무서운 시간이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건이후 3항사 강철에 대한 선장의 신뢰는 조금씩 낮아지는 것 같았다. 사건을 3항사 아니 최대한 초사 선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자기 손에 피를 묻히게 했다는 것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내 앞에서 3항사 강철을 칭찬하는 게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3항사 흉을 조금씩 보기 시작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하이튼 전문학교 나 온 놈은 못 믿겠어”

3항사에게 간단한 영문 조업 레포트를 만들라고 지시한 모양이다.

“어제 하던데예”

“그걸 레포트라고 가져왔어? 달랑 5줄도 안 되는 거를?”

선장은 그 장면이 떠오르는지 한숨을 쉬더니 담배를 물었다.

“수산청에 제출할 거니까 2항사 니가 맹글어 놔”

어제 3항사가 만든 영문레포트 봐 달라기에 봐 주긴 했는데 내가 작성한 게 아니라 말하기가 뭐했다. 그래서 사전을 보고 단어를 좀 더 찾아서 다시 만들라고 했는데 그냥 제출한 모양이다. 사전에 보면 단어가 있고 그 단어에 대한 ‘짧은 글짓기’가 있는데 3항사는 그걸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중도귀국’ 시킨 ‘헷또’는 곽선장 자신이 데리고 온 사람이고 이상정은 헷또 줄을 타고 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놈들로 선원구성을 하되, 그 중에서 똑똑한 놈 하나는 둔다는 전략에 꼭 들어맞는 갑판부 선원구성의 핵심이 헷또였던 것이다. 이젠 그게 무너진 것이다.

그러고 보면 헷또는 그 누구보다 자신감 있고 활력 넘치게 일을 한 것 같았다. 그물을 당길 때도 실실 당기는 게 아니라 팍팍 당겼고 데끼에서 지도력이라는 면에서는 갑판장보다 더 강하게 선원들을 통솔했다. 일단 그는 몸놀림이 빨랐던 것이다. 마치 월남에서의 총알이 핑핑 날아다니는 전투 상황처럼 그는 민첩했던 것이다.

우리의 호프 3항사 강철은 선장의 그런 심경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 나름대로 보안관처럼 계속 설쳐대고 있었다. 나와 3항사 고창준조는 그 사건에 대해 별로 한 게 없는데 선장은 이제 항해 파트에서 우리 조를 조금씩 선호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중 하나가 당직 때 3항사 고창준을 여태까지 불러오던 명칭 ‘3항사’로 부르지 않고 마치 동생 이름 부르듯 ‘창준이’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게 내 눈에 선장의 노회한 전술의 변화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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