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항구 주변 그리고 도크

29)

by 최희철

29) 항구 주변 그리고 도크


㉠ 무스카트항 입구에 학교가 하나 있었다. 고등학교였을 것이다. 우리가 옷을 빼 입고(선원들은 외출을 할 때 가장 좋은 옷을 입는다. 항구에서 옷 입은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선원인지 항구에서 일하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새 옷을 입었지만 왠지 그곳의 유행과는 다르게 튀는 옷을 입은 사람은 분명 선원이다.) 그곳을 지나칠 때 학생들은 2층 베란다에서 우리를 쳐다보았다. 아마도 우리의 모습이 신기해서였을 것이다. 그들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매우 성숙해 보였다. 모두 여자였던 것이다. 하얀 옷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가 너무 오랜 만에 여자를 봐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정말 하얀 빛 그 자체였다. 광활한 바다 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한껏 구워진 우리를 쳐다보는 하얀 빛의 다발들. 하지만 우린 감히 손을 흔들 수 없었다. 이슬람의 율법이 엄격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갑판원 심재술이 갑자기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들도 손을 흔들어 주는 게 아닌가. 아 그건 감동이었다. 긴 머리에 하얀 얼굴, 성숙하지만 앳된 여자들이 말이다. 왠지 우리 눈엔 그들의 얼굴이 더 하얗게 보이고, 머리칼은 더 길어 보이고, 앳되지만 더 성숙해 보여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우리가 본 것은 ‘아우라(aura)’였다. 심재술은 손짓을 멈추지 않고 흔들며 속삭였다.

“아 보드라운 짐승들”

그건 토템 의식 같은 것에서 토해져 나오는 싯구(詩句)였다. 이제야 겨우 착륙할 곳을 찾아 낸 날개 짓이라고나 할까. 결코 그건 꿈이 아니었다.

㉡ K808호는 아랍에미레이트(UAE)에 있는 도크(dock)로 ‘정기수리’를 들어갔다. 아랍에미레이트는 4개의 토후국이 합쳐서 된 나라인데 예전에 우리식 이름으론 ‘아랍토후국연맹’이었다. 도크는 그 중 ‘아지만(Ajiman)’에 있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도크였는데 우리처럼 작은 배들이 오는 곳이었다. 배를 도크에 올리는 방식도 배를 띄우는 부유식이 아니라 레일 위에 얹어 윈치를 사용해 육지로 끌어당기는 방식이었다. 아지만에 가기 위해선 호르무즈(Hormuz) 해협이라는 살벌한 곳을 지나야 했다. 호르무즈 해협은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잇는 좁은 해협으로 안전과 보안을 위해 ‘통항분리방식’이 적용되는 해역이었다. 육상의 차선처럼 가는 배, 오는 배의 길이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걸 어기면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선장의 명령으로 ‘통항분리방식’을 완전히 무시한 채 아예 그곳을 벗어나 작은 섬 사이로(그게 지름길이기에) 달리고 있었다. 선장은 예전에도 이렇게 다녔다는 것이다. 항해사들이야 뭐 선장이 가라는 대로 가야하니까. 아니다 다를까 고속경비정이 떴다. 그리고 VHF 16번에서 우리를 호출하였다.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배를 정지시켰고 선장이 잘못을 인정하였다. 다행히 오만 경비정이라 우리 배의 정보를 확인하고는 용서해 주었다. 그리곤 다시 ‘통항분리방식’이 적용된 곳으로 복귀하여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였다. 더 늦어진 셈이다.

도크는 아지만이지만 놀러 다닌 곳은 두바이(Dubai)였다. 두바이는 당시 아랍지역에서 가장 개방된(무엇이 개방인지는 모르겠지만) 곳으로 알려졌다. 자유무역구역으로 두바이 전역이 면세구역이라 당시 선원들은 일제 전자제품을 쇼핑하러 다녔다.

한인 식당 ‘아리랑’에 갔었다. 음식은 비싼 곳이었지만 한국음식을 먹는다는 기쁨이 있었다. 서빙 하는 사람들은 태국여성들이었는데 선원들의 눈에는 영화배우보다 더 예뻐 보였다. 하지만 우리의 욕망을 말할 순 없었다. 음식을 나르기 위해 그들이 가까이 왔을 때 그들의 냄새가 났다. 사람 냄새? 아니 보드라운 짐승 냄새. 우린 그저 무식한 뱃놈이기에 그 냄새 밖에 맡지 못한 것 같다.

야간에 열리는 바(bar)가 있었는데 한국처럼 아가씨들이 접대하는 곳은 아니었고 대중식당이었다. 저녁엔 술을 팔았다. 마치 오아시스 같다고나 할까. 필리핀 그룹사운드의 공연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손님들 중 필리핀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았다. 이곳도 오만과 마찬가지로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 사람들이 와서 일했다. 그룹사운드의 공연을 보면서 우리나라 가수들이 생각났다. 극장 쇼 같은 걸 할 땐 반드시 ‘이번에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방금 돌아온’과 같은 멘트를 날리던 가수들 말이다. 두바이는 술을 허용하되 술 먹고 싸우거나 길거리에서 비틀거리는 게 경찰에게 발견되면 바로 체포했다. 밤늦게 뒷구멍으로 싼 가격으로 담배를 판매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가격이 70% 정도 밖에 되질 않았다. 윈스톤(winton)을 10보루 샀는데 나중에 보니 재고품이었다. 담배 표면에 얼룩이 조금 있었는데 피워보니 정말 쓰디썼다.

아무튼 우리는 아랍세계에서 제일 개방된 도시라고 불리는 두바이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지만 우리의 욕망을 결코 그것을 찾지 못했다. 우리는 무력감에 빠졌다. 우리가 번 돈이 아니 무스카트에선 쓸 곳이 없어 하루하루 모아 둔 돈이 자신이 가야할 방향을 잃어버리고 두바이 밤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두바이는 서면이나 자갈치가 아니었다. 심지어 겨우 찾은 호텔 나이트에도 우린 입장할 수 없었다. 그곳에 나이트클럽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이 되었는데 우린 정장을 갖추어 입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입장이 거절되었다. 기도는 인도인이었는데 입장시켜 주면 웃돈을 주겠다는 우리의 제의에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펴 목에 대는 시늉으로 거절하였다.

며칠 후 부식을 납품하는 사장이 배로 올라왔다. 그는 한국 사람인데 직업은 배구감독이라고 했다. 이곳 배구팀의 감독이면서 부업으로 부식을 납품한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당연히 선원들의 관심사인 여자 이야기가 나왔다. 사장이 말하길 이란에 가면 공창(公娼)이 있어 그게 가능한데 그것도 지금(존경하는 호메이니 혁명 이후라서)은 이란도 안 된다고 했다. 이곳 두바이도 안 된다고 했다. 다만 자기 능력으로 여자를 낚을 수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하나마나 한 얘기였다. 여자를 낚을 수 있는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하지만 사장은 다음 날 부식을 갖고 오면서 귀한(?) 선물을 갖고 왔다. 이른바 ‘문화영화’였다. 포르노 비디오테이프를 갖고 온 것이다. 서양 것으로 다섯 개였다. 우리 배에 일본 것은 몇 개있었지만 모두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오히려 욕망을 억압하는 것 같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싱가포르 갈 때까지만 보고 아무도 보질 않았다. 일본 대리인이 늙은이라 그런 것인가? ‘고색창연’하고 예술성은 거의 없는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모자이크까지, 그걸 걷어내도 시원찮을 판에. 하지만 부식 사장이 갖고 온 것은 모자이크가 없는 서양 것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복사를 여러 번 해서 그런지 화질이 조금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우린 틈만 나면 그걸 보았다. 어제도 보고 오늘도 보고, 보고 또 보고, 보고 또 보고. 눈알이 지쳐 빠질 때까지 아니 정신적으로 쌀 때까지. 포르노에 출연한 서양 배우들의 이름과 얼굴은 모두 잊었지만 당시 그들은 우리 모두의 연인이었다. 이미 늦었지만 K808호를 대표해서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포르노라고 하면 1982년 일본 오사카에 실습 간 게 생각난다. 당시 일본은 포르노 극장(포르노 게끼죠)이 있었다. 놀라운 문화 충격이었다. 그 전까지 난 포르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영화관이라 개봉관과 재상영관이 있었고 요금 차이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게 참으로 무의미한 구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개봉관과 재상영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나라엔 법적으로 금지된 화면이 큰 스크린 위에서, 그것도 선명한 화질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가슴 벅찬 충격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입장한 영화관은 재상영관이라서 그런지 관객은 거의 없었다. 일본 것 하나 서양 것 하나를 상영하였는데 관객이라고 해 봐야 초로의 노부부 한 두 쌍뿐이었던 것 같다. 비록 우리에겐 무의미했지만 그건 아마도 재상영관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나이에 그것도 연인과 함께 포르노 극장에 올 정도라면 일단 포르노의 예술성을 깊이 이해하는 ‘매니아층’이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성적문제를 치료하는 차원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들의 뜨거운 욕망을 더 뜨겁게 담금질하기 위해 온 것 같았다. 그러니까 20대인 우리가 포르노를 보는 관점과는 완전히 달랐다는 말이다. 아직도 우리나라엔 포르노 극장이 없다. 대신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보여주는 변형된 포르노가 공중파를 통해 보여 지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과연 포르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필요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필요하다면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욕망이 용솟음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욕망이 꺼져 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인가 하는 것 말이다. 어쩌면 이건 철학의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아지만 도크가 없을 때 오만어장 어선들은 인도 중부에 있는 뭄바이(Mumbai) 도크로 갔다고 했다. 그곳은 기술도 부족하고 일의 진행도 느려 한 번 도크에 올리면 언제 내려올지 감감 무소식이었다고 했다. 두 달 가까이 도크 할 때도 있었는데 문제는 돈이었다. 선원들이 그곳에 두 달이나 있게 되면 돈이 다 말라 버린다고 했다. 상륙비, 도크비, 하역비 다 쓰고 나중엔 가불까지 해서 쓰는데 회사에선 가불을 많이 해 주는 것도 아니니까 결국 가장 싼 아가씨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된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선원들은 성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당시 돈으로 500원짜리 숏 타임도 있었다고 하니 상상이 되질 않았다. 결국 뭄바이 도크는 회사에서도 꺼리게 되고, 싱가포르 도크를 했는데 그곳은 도크 비용이 너무 비싸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일본인이 오만과 가까운 아지만에 도크를 열었던 것이다.

도크에서 하는 일 중 가장 큰 일은 외판 청소다. 수심이 낮고 수온이 높은 해역 그리고 트롤어선처럼 천천히 움직이면서 조업을 많이 하는 배의 외판엔 ‘쩍(해조류와 작은 조개류)’이 많이 들러붙는다. 1년 정도 조업하면 배 스피드가 떨어지는 걸 느낄 정도로 많이 붙는다. 대신 수온이 낮은 해역, 항해를 많이 하는 배는 ‘쩍’이 잘 붙지 않는다. K808호는 어마어마했다. ‘쩍’의 제거가 도크에서 하는 일이다. 그 일은 도크 측에서 하는데 모래를 이용하기 때문에 ‘샌딩(sanding)’이라 부른다. 샌딩은 강도에 따라 샌드블러싱(brushing)과 샌드치핑(chipping)이 있는데 ‘브러싱’은 ‘쩍’을 걷어내는 수준이고 ‘치핑’은 ‘쩍’을 걷어내는 것은 물론 페인트까지 벗겨 금속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기계가 하는 깡깡 작업이라 보면 되겠다.

도크는 일본인들이 운영하고 노동자들은 대부분 인도사람들이었다. 도크에서 느낀 일본인과 우리의 차이점이 있었다. 우리는 대체로 장비와 일상용품을 구별하지 않았다. 도크에서 사용하는 철판을 우리는 철판의 사용목적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용하였다. 가령 위에 앉거나 누워 휴식을 취한다던지 혹은 분필 같은 걸로 윷판을 그리고 윷놀이를 한다든지 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그런 걸 엄격하게 구별하였다. 그들에게 장비는 늘 장비였던 것이다. 그걸 보면서 일본인들이 너무 코드화 된 삶을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가령 철판의 경우 그 위에 앉거나 눕는 것 혹은 분필로 윷판을 그리는 게 그 철판을 쓸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보니까 도크 노동자 인도인들도 우리와 비슷하게 철판을 이용하고 있었다. 철판 위 앉아 이야기 하거나 차를 마시고 카드 게임 같은 것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일본의 코드화 된 문화인지 아니면 그곳에 있는 일본인들의 이방인에 대한 차별적 관점이었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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