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속에서 반짝이는 우리들.
<망상 클럽 11>
‘시(詩)’도 그렇다. 누군가가 좋다고 해야 좋은 시가 되는 것이지 본래부터 좋은 시는 없다. 반대로 재미없다고 하면 재미없는 시가 되는 것이다. 난 그걸 많이 느낀다. 시를 적었는데 누군가가 좋다고 하면 그 시가 좋아 보여 지기 시작하는 것 말이다.
그렇다고 영원히 좋은 시는 없다고 했다. 당연한 얘기다. 왜냐하면 시가 처한 상황이 변하기 때문이다. 이때 ‘시’의 자리에 그 어떤 것을 대입해도 마찬가지다. 진리, 역사, 사랑, 건강, 부, 명예 모든 게 그렇다.
그럼 누군가가 좋다하기 전에 스스로 좋다고 여기는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크게 보면 위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 같지만 ‘주체(가령 시인)’도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자연선택’의 경우 일방적으로 자연이 어떤 종(種)을 선택하는 경우는 없으니까. 종 역시 자연을 선택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고 실제로 진화는 종과 자연 간의 부단한 선택의 뒤섞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가령 시인과 꽃의 관계도 그렇다. 누구도 그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다. 우리(관찰자로서)가 보는 것은 그들이 뒤섞인 사건을 보는 것이다. 그걸 확대하면 마치 우주 속에서 운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어찌 우주를 규정할 수 있으랴. 우리가 우주의 특이점이긴 하지만 특이점이 우주를 규정하는데 사용하라는 힘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주는 무한이고 우리는 무한 속에 반짝이는 특이성일 뿐 우리는 우리 힘만큼만 우주를 반짝이게 할 뿐이다.
우린 누군가가 좋다고 해야 좋아지는 그런 존재라는 말이다. 그게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늘 그 속에서만 반짝일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거대함의 부분은 아니다. 우리 역시 홀로 반짝일 수 있다고 여기거나, 반짝임이 영원하거나 혹은 영원히 꺼져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슬픔이나 기쁨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기쁘다고 해주면 더 기쁜 것이고 슬픔 역시 그렇다.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야 한다. 무거워서가 아니고 그게 우리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방식을 ‘평등’이라고 하면 어떨까? 누군가의 관심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 독특함은 관계를 이루는 힘이고 그 독특함 때문에 평등한 존재 말이다.
우리들이 관계 속에서 반짝이지만 그게 영원하진 않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