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회상
<망상 클럽 18>
1980년 후반, 북태평양 트롤 어선 탈 때 40대 중반 처리실(어획물을 팬에 담는 곳) 반장이 있었다. 배에서 술도 마시지 않고 노름도 하지 않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처리실 상황은 늘 그 반장에게 물어 보곤 했는데, 그가 말하는 게 모두 진실인 것 같아서 그랬다.
저기압을 만나 피항(避航) 중이었다. 선원들이 가자미 회 떠 놓았으니 1항사님도 회 드시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항해사에게 술 몇 병, 들고 오라는 얘기인데, 내려가 보니 그 반장도 있었다. 하지만 반장은 역시 술은 마시지 않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6•25 사변(한국전쟁) 얘기가 나왔다. 그때 반장이 말하길 자기 동네에도 인민군들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런데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인민군도 있었다고 했다. 어린 자기들은 그게 신기해서 그들을 따라 다니기도 했다는 것이다. 가끔 둘러 앉아 먹을 걸 먹기도 하고 이야기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했다.
우린 옛날 얘기를 듣는 것처럼 반장에게 쏠려 있었다. 반장이 얘기를 하다가 문득 멈추더니,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하면서 우물쭈물 거렸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마치 취한 사람처럼 반장의 얼굴은 붉어졌다.
어린 자기도 인민군 바로 옆에 앉아 그들의 얘길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양키(미군) 비행기가 떴다는 고함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이다. 모두 공포에 떨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옆에 있던 중학생 정도의 인민군(형)은 급히 자기를 안더니 옆으로 구르고 굴러서 길 건너 다른 집 처마 밑으로 몸을 숨기더라는 얘길 했다. 그렇게 비행기의 사격을 그들은 피해 갔던 것이다. 마치 영화처럼.
얘기는 거기서 끝났다. 반장은 약간의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그때를 회상하는지 눈을 위로 치뜨며 천장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