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 대하여 3>

죽음에 대한 욕망

by 최희철

<성(性)에 대하여 3>


모든 생명체에겐 ‘죽음에 대한 욕망’이 있다고 합니다. 죽음을 쾌락이라고 한다면 좀 과도한 측면이 있지만, 이때 죽음이란 생명의 끝이라기보다 생명이 갖고 있는 모순(矛盾)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욕망이 아닌 가 싶습니다. 가령 ‘변증법(辨證法)’적 해법이라고나 할까요.


우린 살아가면서 늘 ‘모순’적 상황을 마주 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크고 유명한 사건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라 아주 일상적이고도 개인적인 상황에서도 벌어집니다. 가령 오랫동안 서 있게 되면 다리가 아파 앉고 싶어집니다. 앉게 되면 눕고 싶고요. 오랫동안 서 있을 때 다리가 아픈 것은 우리 몸이 그 상황에서 모순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앉거나 눕게 되는 겁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런 사소한 사건들 속에서 변증법적 해법의 과정이 녹아 있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세상 모든 게 이런 구조 속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회전하는 것도, 거대한 역사의 탕탕한 흐름도 그렇게 보입니다. 뉴턴의 운동 법칙들이나 에너지의 질서가 점점 무질서해지는 ‘엔트로피’ 같은 것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겁니다.


또 우주적 사건으로서 ‘빅뱅’ 같은 것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왜 우주의 에너지는 ‘임계점’이라 불리는 한 개의 점에서 그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빅뱅’을 할까요? 왜 에너지는 끝없이 흩어져 나갈까요? 모두 자신이 갖고 있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변증법적 해법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죽음도 그렇지 않을까요? 살아 있는 것들의 새로운 문턱이라고나 할까요. 누구나 겪어야 할 문턱이지만 모든 문턱은 언제나 다른 ‘차이’로서의 문턱이죠. 그렇다면 죽음이야말로 정말 짜릿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마치 섹스의 ‘오르가슴’처럼. 섹스는 그런 과정들을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과정들을 강물의 흐름처럼 거쳐 가는 작업 같습니다. 성행위 뿐 아니라 생식 같은 게 그렇다는 말입니다. 가령 생식은 ‘자기복제’가 목적입니다. 자기복제는 DNA 차원에서 보면 치밀한 기계적 과정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문명의 관점으로는 온갖 의미들이 내재해 있고 또 역동적으로 뿜어내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엔트로피처럼 죽음은 모든 것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욕망이란 어쩌면 에너지가 집적되는 것의 끝 지점에서 일어나는 욕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마치 모든 움직임이 멈춘 것 같은 ‘우주의 깊은 잠’ 같은 현상이라고나 할까요. 섹스 역시 어떤 지점에서 그런 욕망을 드러내고 또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오직 육체적 헐떡거림만 있는 게 아니라 그런 헐떡거림의 과도함을 잠재우려는 흐름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섹스는 단순한 육체적 욕망뿐 아니라 문명의 집적과 전달, 모든 관계들의 혁명적 변화 그리고 권력의 암투 같은 안간힘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는 여러 요소를 후손에게 전달하는 ‘자기 복제’ 기능 등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섹스를 통해 자신을 넘어서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쾌락의 활용’을 알게 되고, 그게 다시 ‘자신의 배려’처럼 역(逆)으로 확산 되면서, 섹스는 ‘삶의 기술’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삶의 기술’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삶을 기술이라는 측면으로 바라보고 또 실천하는 것,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위해 끝없는 도전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처럼, 섹스도 그런 게 아닐까요.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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