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성적 존재
<성(性)에 대하여 4>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성적(性的) 존재라고 합니다. 인간이 성적 존재라는 그의 주장은 그동안 고매하게(?) 여겨졌던 ‘인간의 지위’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중세시대를 거쳐 온 유럽은 물론 독일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성에 대해 보수적 가치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유럽 사람들은 인간이 ‘이성적이고 의식적’이므로 우주에서 특별한 존재라 생각하였습니다. 프로이트가 그런 인간의 지위를 더 낮은(?) 곳으로 끌어내려 버렸던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성적 욕망에 휩싸여 살아가게 됩니다. 보통 성인(成人)이라 불리는 사람은 물론 노인(老人)도 유아(乳兒)도 성욕을 갖고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태어나서 맨 처음 갖게 되는 성욕은 입술과 관계된 것이고 그걸 ‘입술성욕’이라 부릅니다. 성적 리비도(Libido)가 입술에 집중적으로 투여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요, 그래서 유아들은 무언가를 빨면서 쾌감을 얻습니다. 쾌감을 얻으려는 것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망이지요. ‘쾌락욕망’이 그것입니다. 욕망이 없다면 쾌감을 얻으려 하지 않겠지요. 배가 고프지 않다면 먹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가 엄마의 젖을 빠는 행위는 배고픔을 채우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성욕을 만족시키는 행위라는 겁니다. 쉽게 동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아이가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 엄마 젖꼭지를 빨고 있다니요, 부정(否定)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성욕에 대한 선입견만 없앤다면 그것은 그리 부정(不淨)한 게 아닙니다. 아이가 태어나 자신의 몸과 같은 엄마의 몸에 대한 욕망을 갖는 것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그건 어쩌면 일종의 자기애(自己愛)일 수도 있는 최초의 성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상상의 나래를 한 번 펴 봅시다. 성욕이 없는데 배가 고플 수 있을까요? 즉 성욕과 배고픔은 분리된 것일까요? 성욕이 없는데 시(詩)를 쓸 수 있을까요?(매우 위험한 발언일 수 있겠지만) 성욕과 시를 쓰려는 욕망은 분리된 것일까요? 이제 겨우 시집 한 권을 내었지만 제 시는 모두 저의 성욕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심지어 저의 시적 욕망은 모두 성욕이 변형된 게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해 본 적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욕이란 자신에게 아니 우리 주변에서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욕은 마냥 부끄러운 것이니까 감추어야 하는 것인가요? 성욕은 깊은 바다 속 수괴(水塊)같은 에너지는 아닐까요?
저는 성욕이 불교에서 말하는 바라밀(波羅密, paramita, ~~이 되고자 하는 욕망 혹은 욕구, eros)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반야바라밀’은 지혜에 대한 욕망이지요. 어디로 가고자하는 욕망 즉 운동성으로서의 욕망 말입니다. 저는 그게 성욕이라 생각하였고 시와 관련된 힘도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생각하였습니다.
그게 없는 존재는 존재할 수 없지요. 만약 성욕이 없는 배고픔이 있다면 그런 상태에서 먹는 음식의 맛은 어떨까요? 그건 음식이 아니라 그냥 ‘질료 덩어리’일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먹는 것은 어쩌면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그냥 ‘처넣는 것’이죠. 우린 그렇게 처넣는 것을 자주 목격합니다. 욕망이 결여된 무거운 속도감이이라고나 할까요. 배가 고파서 먹는 게 아니라 ‘처넣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존재! 그들은 ‘처넣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모두 ‘악’으로 규정합니다. 물론 성욕이 모든 욕망의 본질적 욕망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성욕은 주요한 욕망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배고픔, 명예와 지위 그리고 화폐에 대한 욕망 등의 원형질 같은 것이 성욕이라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