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욕의 변주
<성에 대하여 5>
엄마가 젖을 뗄 때쯤 아이의 성욕은 항문으로 옮겨진다고 합니다. 배설할 때 항문으로부터 쾌감을 느끼고 아이는 배설과 배설물에 대한 좋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엄마는 아이의 배설물에 대해 계속해서 즐거울 수만은 없을 겁니다. 그때 아이는 처음으로 자신의 쾌감에 대한 외부의 저항을 느끼게 됩니다. 마냥 배설이 즐거울 수만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처음으로 자신의 성욕을 숨겨야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게 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론 성욕이 성기로 옮기는데 이때가 남근기(男根期)로 대략 3세전이라고 합니다. 남근의 성욕을 통해 아이는 상상(想像)계를 벗어나 상징(象徵)계로 들어오게 되는데 바로 이때 주체(主體)가 본격적으로 성립되는 시기라고 합니다. 이때 아이는 자신의 성기에 대하여 거대한 착각(?)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엄마에겐 없는 자신의 남근이 실제론 엄마의 남근이 아니었고 엄마의 남근은 자신보다 먼저 존재했던 아버지의 남근이었다는 것 말이죠. 또한 여아는 자신의 성기(그중에 음핵)가 남근에 비해 왜소하다는 걸 알게 되면서 여아는 남아에 비해 소극적 성격을 갖게 되며(엄밀하게 말하면 외부로부터 그렇게 되도록 부여 받는 것이겠지요), 남아 역시 자신의 성기가 아버지의 성기에 비해 현격히 작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은 아버지의 권위와 타협하면서 자신에겐 새로운 대체물로서의 상징계를 열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성욕을 너무 기계적으로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곤 할지라도 성욕의 또 다른 면을 엿볼 수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성욕은 기본적 욕망이고 나아가 모든 욕망은 성욕의 변형태입니다. 이런 그의 이론이 현대에 와서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그는 현대를 여는데 중요한 기여를 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합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성욕이 기본적 욕망이지만 공공연하게 드러나거나 말해지지 않습니다. 은밀하고도 특정 공간에서만 이루어지죠. 가령 자지, 보지라는 말은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하지 않습니다. 표준말이고 틀린 말이 아님에도, 성과 관련된 언어는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억압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억압된 것들은 터져 나오기 위해 약한(?) 곳을 향해 꿈틀거릴 겁니다. 하지만 욕망을 내리 누는 현실적 힘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하여 인간의 성욕은 ‘꿈’을 통해 해소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꿈 역시 완벽하게 해결하질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이 꿈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꿈속에서 원초적 욕망을 모두 이루게 된다면, 꿈을 꾼 사람은 꿈의 현실적 부도덕(?)성으로 인해 괴로워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꿈은 여러 작업을 통해 꿈의 내용을 변형시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늘 꿈에서 겪었던 사건은 또렷하지 않고, 심지어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정신 분석가들은 꿈을 꾼 사람과의 대화(자유연상법)를 통해 그게 ‘억압된 성욕’의 변형이었다는 걸 찾아냅니다. 꿈은 응축하거나 은유, 엉킴, 삭제 등을 통해 억압된 성욕을 변형시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고 할지라도 의식세계에 드러내지 않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이처럼 성욕도 꿈속에서 ‘꿈 작업’을 거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억압되기 전의 성욕’ 즉 욕망의 원형질은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 성욕은 늘 꿈과 더불어 해갈(解渴)되어 온 것 같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꿈은 현상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성욕을 비롯한 모든 욕망들은 마치 거대한 유전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마치 피하고 싶어도 결코 피하기 힘든 ‘외나무다리’ 같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