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쾌락적 존재
<성(性)에 대하여 6>
프로이트는 우리가 성욕과 같은 쾌락적 존재라는 걸 알고 인간이 갖고 있는 허위의식을 버리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니체와 마르크스가 얘기하는 지점들은 종교적, 윤리적, 의식적으로 고결한(?) 인간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 제자리(?)로 갖다 놓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의 주장이 인간을 비하(卑下)하자는 의도는 아닐 겁니다. 다만 인간은 그렇게 윤리적이고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특히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이나 지능과 같은 정신 영역은 인간이 다른 종족에 비해 ‘나약하기’ 때문에 갖게 되는 진화의 산물일 뿐 그들보다 높은 차원의 그 무엇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욕망이 억압됨으로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모두 피한다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지만, 또 스트레스를 피한다고 해서 그것이 행복과 직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스트레스가 ‘사회화’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욕을 비롯한 모든 욕망은 이미 사회화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힘으론 헤쳐 나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죠. 오늘날 대표적 정치방식으로 여겨지는 ‘대의민주주의(代議民主主義)’도 사실은 개인이나 대중의 억압된 욕망을 표출하는 시스템이죠. 그런 방법의 문제점으로 인해 또 다른 억압의 측면이 있지만요. 정치학을 정신분석학과 결부시키는 방법은 현대정치이론의 한 측면이라 보여 집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의 구조와 미세한 작동을 살피는 것은 흥미롭지요. 현대인의 스트레스 중 ‘정치적 스트레스’가 큰 것 같습니다. 사실 정치에 대한 관심과 행동을 높여야 할 필요가 있지만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섹스는 ‘삶의 기술’이라고 했습니다. ‘여자가 섹스를 하는 237가지 이유’라는 책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과는 달리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섹스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남성의 대부분이 성욕 때문에 섹스를 하는 것과는 달리 말입니다. 여성은 파트너의 기분을 맞추어주기 위해,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문제나 파트너에게 힘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해 섹스를 한다고 했습니다. 남성과 여성은 이렇게 섹스에 접속하는 이유가 다릅니다. 이것은 여성들이 섹스를 삶을 살아가는 여러 방식 중 하나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대체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관계적’이라고 합니다. 가정 내에서 식구(食口)들을 위해 일하고 노력하는 것도 그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남성에 비해 훨씬 복잡하지요.
그래서 예전에 ‘부엌에서 우주가 보인다’라는 말이 있었나 봅니다. 태양이 태양계의 부엌이듯, 실제 부엌은 식구들의 탄생과 성장을 있게 한 화구(火口)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건강 그리고 기쁨, 에너지 등이 생겨납니다. 우린 여성이 운영하는 부엌을 통해 유아기부터 지금까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관계의 문제로 풀어간다는 여성의 관점은 아름다운 삶의 방식이라 여겨집니다.
한강의 소설에 나오는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 것도 죽일 수가 없으니까”라는 구절을 통해 드러나는 부드럽고 뭉툭함의 따뜻함! 그게 우리를 여태까지 살아오게 했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여성의 젖가슴 뿐 아니라 상대를 향한 성욕도 그런 힘의 계열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가슴을 뛰게 했던 그 성욕이 말입니다. 꿈결 속에서 작동하는 비늘 같은 에너지의 출렁임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자신이 아닌 ‘타자(他者)’를 욕망하여 하나가 되고픈 문턱을 넘어가는 순간을 기억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