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특이한 비서가 되겠단 마음을 먹어 가지고
20대 초반, 나는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차가온 공기 속에서 미리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청춘이라지만 정작 가슴 뛰는 일이 없었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친구들과 동기들 사이에서 텅 빈 공허함을 느끼던 찰나였다. 적성에 맞지 않은 전공을 내려놓고 일찍이 사회에 뛰어들었지만 이 놈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방랑자 같던 삶을 잠시 접어두고 본가의 온기 속에서 나를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던 순간, 대뜸 대각선 테이블에 앉아있던 한 여성의 뒷모습을 계기로 나의 목표, 나의 방향이 잠재된 마음 구석 어딘가에 닿기 시작했다.
단정한 똑 단발에 회색 목폴라,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와 노트북, 그 곁을 지키는 낡은 캐리어 가방. 그녀는 내가 막연히 동경해 온 커리어우먼의 정석과 같은 분위기를 물씬 뿜어냈다.
나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본인 만의 자연스러운 아우라를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 특유의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던 것 같다. 분주한 듯 여유로워 보이고, 차분한 듯 꼿꼿하게 세운 허리. 코트 주머니 안쪽,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다급하게 전화를 거는 모습까지도 완벽해 보였다.
상대가 무슨 일을 하는진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분주히 세상을 유영할 것 같은 그 모습, 그 자체가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나도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 막연했고, 단순했지만 그 뒷모습이 준 무언의 메시지를 품은 얼마 뒤에 나는 다시 서울에 왔다.
그리고 완벽하진 않더라도 그녀의 에너지와 조금은 닮아 있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분주히 달려온 끝에 나이에 비해 묵직한 경력이 쌓인 나는 어느덧 12년 차 비서가 되었다.
문제는, 동경하던 삶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지만 밤낮 쉴 새 없이 울리는 알림음. 변수가 많은 대부분의 일들을 척척 수행해야 하다 보니 조금씩 직무를 대하는 태도가 긴장에서 부정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니 사실 직무를 탓하기 보단, 날이 갈수록 비대해지는 나의 자아에 대한 문제였다.
비서이기 전에 나. 더 나아가서 직장인이기 전에 나.
내가 왜 이런 마음을 느끼고 있으며,
현재 위치와 상황을 면밀히 점검해 보는 시간이 우선적으로 필요할 것 같다.
한때는 고군분투했고,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는 열망 하나로 회사를 다녔다. 다만, 개인적 욕심으론 보조적으로 주어진 일 외에 눈에 보이는 성과 즉,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일들까지도 내 직무에 자연스레 스며들길 바랐다.
이번 리브랜딩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하겠습니다.
현재 예산보다 적은 비용으로 진행할 방안을 찾았습니다.
고정 회의가 겹치는 각 그룹을 묶어 배치하면 시간이 단축될 것 같습니다.
이번 프랑스 투어에는 와인 대신 한국의 미를 담은 공예품을 선물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주도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자문을 구하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회사에서의 나의 시간을 단순 지시 수행으로만 채워 왔다면 아마 난 성장보단 도태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게 내가 바란 참 어른의 모습은 아니었으니까.
지난날,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서른 번 넘게 돌려본 건, 동경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놓인 앤드리아의 모습이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명 패션 매거진의 편집장 비서가 되기 전, 기자를 꿈꾸었던 그녀처럼 한때는 나 역시도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꿈꾼 적이 있다. 고군분투 끝에 면접장 문턱에 도달하긴 했지만 예상치 못한 코로나 여파로 겨우 그려낸 꿈이 무산되었고, 나는 다시 익숙한 현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다음 플랜이 정해지기 전까진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의 내실을 다지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래서 한 기업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내기보단, 전략적 이직을 통해 고용 형태보다 경험의 질에 집중하며 20대를 보냈다. 남들과 비슷한 스펙으로는 승산이 없었고, 조금씩 업무 영역을 확장하며 누구나 생각하는 전형적인 비서가 아닌 나만의 독보적인 색깔을 가진 특이한 비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고정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직무로 나를 단정 짓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터미널에서 보았던 그녀처럼 조금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켜켜이 경험을 쌓아가고 싶었다. 직무에 국한되기보단 " 저 사람은 좀 유별난데, 유능하다. "와 같은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직장에서 채우지 못한 결핍은 오로지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됐다. 고로 내 안에 꿈틀거리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쌓아온 영역과 업무 범위를 어떻게 활용하고 확장시키면 좋을지, 일터 너머의 자아 확립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다.
어쩌면 내가 꿈꾸는 모습은 직장에서 그리는 모습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