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위기(The Imaginary Crisis)
제프 멀건, 루스 테일러, 번역협동조합 옮김, 2024, 사회적 상상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원저: Mulgan, G. 2020. The Imaginary Crisis / Tailor, R, 2021, Transforming Narrative Waters
꿈 꾸는 자들의 세계가 작아지다 못해, 붕괴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상상의 위기The Imaginary Crisis”에 주목한다. 어두운 현실에 한 줄 기 빛을 밝히는 일조차 허망하고 허무하다고 포기하는, 차디찬 시대 속에서 우리의 상상력이 퇴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상상은 무엇이고, 그것이 왜 무너지고 있으며, 그 위기가 왜 그토록 중요한지, 어떻게 다시 회복하고 촉진할 수 있을지. 제프 멀건은 길지 않은 책을 통해 이를 논의한다.
사회적 상상은 왜 퇴보하고 있는가? “상상의 위기”는 무엇인가? 21세기 사회는 사회경제적, 문화적, 과학기술적 진보를 경험한 시대이다. 물질적인 측면에서 과거에 비해 상당한 경제적 성장을 누렸고,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기술까지 삶의 전반에 녹아들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기후위기, 경제적 불평등, 고립과 불안, 분열의 극화 등의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 삶을 병들게 한다. 이 문제들의 기저에는 시대의 진보를 가능하게 했던 자본주의 경제구조, 산업사회, 기술중심주의가 자리잡고 있으며, 더 근본적으로 이분법적이고 인간중심적인 근대문명이 있다. 수많은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문제들이 우리 삶에 도사리고 있음에도 제대로 된 해법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 나아가 우리의 존재를 지탱해왔던 삶의 기반이 우리로 하여금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상상의 위기”이다.
저자가 “상상”의 문제에 주목한 이유는 “우리 삶의 가능한 선택지를 제공하고”, “난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회구조를 변혁하고”, “상상의 독점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함이다. 즉, 사회적 상상의 회복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유용할뿐더러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의 사회적 상상을 지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적들로부터 우리는 다시 "상상할 수 있는 자유"를 찾아야 한다.
이 글의 원 제목은 “상상의 위기”이다. 여기서 상상이라 하면, 단지 사회적 상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회적 상상은 기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즉 우리는 사회-기술적 상상을 논해야 한다. 우리 사회문제는 과학기술로부터 태동하기도 하지만, 과학기술로 해결하기도 한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도 이를 예측한 바 있다. 기후위기를 불러오는 원인 중 하나는 과학기술의 끝없는 발전과 성장주의이다. 최근 인공지능의 발전은 그 속도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다. 그러나, 이 기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에너지와 물질들이 투입된다. 인류는 그렇게 진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해왔고, 기후위기를 통해 그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모쪼록, 삶의 문제와 그 해결책들은 기술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 따라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상상의 문제는 사회-기술적인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기술적인 상상을 촉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기술적인 상상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저자는 상상은 이전에도 존재해 왔다고 설명한다. 유토피아, 철학사상, 미래학, 새로운 관찰방법(현미경, 엑스레이 등), 사회운동, 픽션, 게임, 기업가정신 등이 이에 속한다. 그 양상만 다를 뿐, 우리 사회에는 우리의 상상을 촉진하는 수 많은 모양들이 존재해 왔고, 지금도 존재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새로운 모양의 사회적 상상들이 출현한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실험적 공간들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 모양들 속에서 사회적 상상을 촉진하는 도구와 기법들 역시 다양하다. 흔히 말해, 혁신은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것뿐 아니라, 기존의 생산방법, 구조, 관계 등을 새롭게 조합하고 바꾸어 보는 것등을 포괄하는 용어다. 기존의 아이디어를 확장하고, 뒤집고, 다른 아이디어와 새롭게 조합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사회적 상상이 촉진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상상을 촉진하는 과정이 마치 유레카처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도 지난한 과정과 반복적 연습이 필요하다. 상상의 공간이 훈련받은 전문가들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상상이 사회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상상에 기반한 내러티브가 충분히 탄탄해야 한다. 그것이 조약하거나 너무 단순할 경우 복잡한 사회에서 제대로 된 변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학습, 반복, 경험, 비평, 시행착오를 거쳐 보다 탄탄한 내러티브를 가진 사회적 상상이 촉진되어야 한다.
유사한 맥락에서, 저자는 비전과 상상을 관념론적으로 머물게 하지 말고, 이를 엄밀함을 가지고 분석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를 위해 1) 상상과 실험의 결합 2) 변증법적 상상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즉 “더 나은 세상을 의도적으로, 반복적으로, 실험적으로 설계하고, 확장적 상상과 시스템 분석을 더하며, 실험을 통해 현실에 구현하는 방법”(68)과 ”변화의 결을 따르면서도 그에 반하는“(70) 방식으로 사회적 상상을 설계하고 촉진해야 한다. 특히 첫 번째 주장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저자는 사회적 상상을 실험을 통해 체계적이고 비판적으로 설계하는 방법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 사회변화를 목표로 이루어지는 수많은 혁신활동들이 실험실 형태의 혁신공간을 구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리빙랩, 팹랩, 정책랩, 소셜 리빙랩 등이 이에 속한다.
이쯤에서 '사회적 상상' 이 무엇인지, 그것을 촉진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이야기해보자.
먼저, 사회적 상상이라는 관념은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제도, 담론, 물질 등과 얽혀있다. 상상의 아이디어가 집단지성이 되고 그것이 하나의 정책으로 나아가 구조의 변화로 이어지는 과정은 선형적이지 않다. 그것을 분명 “관계론적”인 복잡한 과정이다. 생성적인 아이디어, 공간, 사회구조, 사람, 기기, 데이터 등이 얽혀서 만들어지는 것이 사회적 상상이다. 따라서 사회적 상상은 그 사회-물질적인 것들에 의해 수행적으로 구성되며, 동시에 그것에 배태되어 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로, 사회적 상상은 경로의존성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기존의 사회적 상상이 지배적인 시스템에 고착화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 시스템이 다시 지배적인 사회적 상상을 유포시킨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낯설게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낯설게 보되 그것을 배척해서는 안된다. 경로의존성은 극복해야 할 문제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요소이다. 즉, 저자는 오래됨과 새로움의 “균형”을 강조한다. “우리는 사회적 상상을 과거의 최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가장 공명하는 전통, 비옥한 유산을 보존하면서 이를 새로운 것과 결합하는 방법을 찾는 일로 이해해야 한다”(91). 많은 젊은세대들이 혁신을 논할 때, 새로움만을 찾는다. 이전 것은 낡았고 유용하지 않았다고 쓰고 버린다. 전통은 도외시되고 전통을 강조하면 시대에 뒤쳐진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이 또한 진보의 폐해이다. 진보는 물질뿐 아니라, 우리의 가치도 쓰고 버리는 것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존의 것은 역시 존중되어야 한다. 그 균형이 정말 중요하다.
세 번째로, 서두에 논했듯 우리의 사회적 상상은 사회-기술시스템과 적합해야 한다. 즉 사회-기술적 상상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저자는 자사노프와 김상현의 "사회-기술적 상상물"에 대한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이들의 상상은 "상상" 그 자체보다 분석과 비평이 주 목적이라고 평가한다.
다섯 번재로, 사회적 상상을 이루는 생태계 조성이 필요하다. 생태계라 하면, 상상을 촉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 이를 후원할 수 있는 경제기반과 공간을 가진 기관을 설립하는 것, 상상하는 방법의 확산, 상상의 극장 조성이 있다. 현 시점에서 사회적 상상은 협동조합, 사회적경제조직, 사회운동조직 등의 비주류 집단을 통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진다.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실험적 프로젝트들이 사회적 상상을 촉진하는 공간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들이 지배적인 사회적 상상을 실험하고 촉진하는 것인지, 아니면 해방적인 상상을 촉진하는 공간일지는 경험적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주체”의 필요이다. 여기서 존 듀이가 인용되는데, 그도 정치프로젝트에서 대중의 필요를 언급한 적이 있다. 저자도 마찬가지로 “사회적 상상이라는 행위는 자신의 주체를 만든 후, 그 주체가 자유롭게 활보하도록 놓아줘야 한다”(97)고 주장한다. 즉, 사회적 상상은 주체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상상이 널리 퍼지고,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주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상상은 주체를 발명해야 하고, 다시 주체는 그 사회적 상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 분명히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상상의 위기라는 시대적 진단은, 우리가 다시 상상할 수 있기 위한 담론들의 시작을 알린다는 의미에서 정치적 효과를 낳는다.
상상의 위기라는 시대진단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
그것에 응답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작은 존재들이 있지는 않을까?
그들의 사회적 상상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 현존하는 상상들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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