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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bu Feb 25. 2024

빙판의 전개

스웨덴식 희망고문

지난겨울 3월에 내리는 눈에 당황했다면

올 겨울은 12월부터 꾸준히 눈이 내렸다.

게다가 영하 10도 혹은 이하의 날이 일주일씩 지속되기도 했다.

하늘은 주로 낮은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언제든 눈이 올 준비를 하고 있다.

영하 7도 이하에 눈까지 오는 날은 모든 게 새하얗게 덮인 뒤 전혀 녹지 않고 며칠 동안 그대로다.

눈이 와도 다음날이면 금세 질척하게 녹기 시작하는 서울과는 달랐다.

한라산 정상에서나 보던 새하얀 나무들이 어딜 가든 널렸다.

다행이라면 서울의 추운 날은 칼바람이 부는데 여긴 칼바람은 없다.

다만 영하 10도인 날은 현관문을 열고 나가 바깥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오면

콧속이 지잉하고 얼어붙는 느낌이 난다.

눈앞에 펼쳐진 하얀 세상은 매일 봐도 보기 좋았다.

하지만 이런 풍경이 유지되는 데 영하 10도의 기온이 필수조건이란 걸 깨달았다.


일주일 정도의 추위가 지나가면 영상의 기온이 찾아온다.

스웨덴은 칠한팔온이라며 혼자서 실없는 농담을 중얼거려 본다.

영상의 기온이래 봐야 1도지만

그제서야 일주일 내내 새하얗던 눈이 녹기 시작한다.

쌓여있던 눈이 표면부터 녹으면서 얼기설기, 막 녹기 시작하는 빙수의 얼음 같다.

낮에는 얼음 결정의 모습을 보이며 녹던 눈은 밤이면 떨어진 기온에 다시 언다.


눈이 많이 오고 그친 날이면 제설차와 자갈차가 분주하다.

차도는 눈이 그치자마자 제설차들이 눈을 치운다.

제설차가 지나가고 나면 다음은 작은 자갈을 뿌리는 차가 돌을 뿌리며 지나간다.

이렇게 도로를 관리하니 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는 날이 풀리면 눈이 사라진다.

하지만 동네 길은 다르다.

제설차와 자갈차가 지나가도 차량이 많지 않다.

바닥에 남은 눈이 일주일간 차와 사람의 무게로 단단히 다져진다.

그렇게 다져진 눈이 날이 조금 풀린 일주일 동안 낮엔 녹고 밤엔 얼기를 반복하면서 빙판을 이룬다.

매끈매끈. 점점 스케이트장처럼 변한다.

스웨덴의 겨울 신발은 기본적으로 잘 미끄러지지 않는 바닥에 심지어 징이 박힌 신발도 있다.

하지만 동네길을 걷는 사람들이 모두 조심조심 한걸음 한걸음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신경 쓰고 있는 게 보인다.


대체 이렇게 불편한데 어떻게 사나 싶을 때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어린이집을 다니는 어린아이들은 아침에 모두 썰매를 타고 있다.

엄마아빠는 조심스럽게 걷지만 아이들은 썰매에 앉아서 즐겁게 어린이집을 간다.

어린아이가 있는 집은 집집마다 겨울 이동 수단으로 썰매를 구비해 놓은 게 틀림없다.

빙판을 아이 둘 어른 하나셋이 걸어가는 것보단 현명한 선택인지도.

어른만 고생하면 아이들은 넘어질 걱정 없이 신나게 등원한다.

하루는 주차하고 집에 들어오는데 옆집 마당에 물을 틀어놓은 소리가 들려왔다.

겨울에 왜 마당에 물을 틀어놓았나 놀라서 봤다.

여름이면 마당 잔디에서 하키 연습을 하던 옆집 소년이 마당에 천막천을 길게 깔아놓고선 물을 받고 있었다.

맙소사!

겨울의 추위를 이용해서 마당에 아이스링크를 만들고 있었다.

무엇인들..

길바닥도 빙판인데..

아이스링크가 잘 만들어질까 궁금해서 매일 그 집 마당을 살펴보았다.

저녁마다 물을 받던 마당은 일주일도 되지 않아 미니 아이스링크가 되었다.


다시 추위가 찾아오고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눈이 종일 오는 날은 하루 만에 빙판은 흔적을 감춘다.

차도 사람도 다시 뽀득뽀득 눈을 밟으며 눈 아래 있는 빙판의 모습은 잊은 채 눈 덮인 일주일을 지낸다.

그렇게 추운 날은 눈이 오고 조금 따뜻해지면 다시 녹기를 반복한다.

빙판 위에 눈이 다져진다. 녹는다. 다시 언다. 결국엔 바닥을 알 수 없는 두꺼운 빙판이 탄생한다.


그렇게 겹겹이 쌓여 녹지 않을 것 같던 빙판이

영상의 기온에 아주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제는 눈 대신 비가 와서 눈을 녹이기 시작한다.

비가 오면 이제 금방 다 녹아버리겠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날은 따뜻하지만 길 위에 눈과 빙판은 얼음이다.

밤이면 비가 눈과 얼음과 엉겨 붙어 다시 언다.

다음날 아침은 또다시 아이스링크처럼 매끈한 빙판이 완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제 2월 말인걸.

기온이 영상 4도나 5도인 날들이 일주일쯤 이어지자

겹겹이 쌓인 빙판과 눈도 어쩔 수 없이 녹아

얼기설기 빙판의 틈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남편과 아이들은 주말에 쨍한 해까지 나자 신이 났다.

아무래도 이제 봄이 오는가 보다라며 호들갑을 떤다.

아니야 아직 멀었어 3월에도 눈이 올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나 또한 해가 반가웠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났다.

완연한 영상의 기온 탓인지 눈대신 비가 며칠이나 내렸다.

녹은 빙판 사이로 시냇물처럼 물이 졸졸 흐르더니

기어이 삼 일 전부턴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다. 하늘은 파랗고 마당엔 잔디가 모습을 드러냈다.

겨울내내 이고 지고 있던 눈 때문인지 매생이같이 푸욱 숨이 죽은 잔디지만

눈 밑에 깔려 있던 잔디를 4달 만에 마주했다.


3월에 종일 눈이 오는 어느 날이면 에라이를 나직이 읊조리며

내 또 이 희망고문에 다시 한번 속았구나 하겠지.

하지만 오늘은 이제 봄이 오는 건가 하는 기대를 해본다.

주말에 친정엄마가 한국은 매화꽃이 핀다고 했지 않는가.

스웨덴도, 봄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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